폴라니라면 브렉시트를 어떻게 봤을까

정태인 2016. 7. 2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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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년 전, 2015년 7월5일 그리스 국민들은 유럽집행위원회·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트로이카의 최후 통첩안(추가 구제금융에 대한 대가로 강한 긴축정책 요구)에 대한 찬반투표에서 '노(No)'라고 외쳤다. 하지만 치프라스 총리는 당시 협상 책임자였던 바루파키스 재무장관을 해임하고 최후 통첩안보다 훨씬 나쁜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그리스가 유로존에 잔류하는 조건으로 상당한 양의 채무를 탕감해줘야 한다고 선언한 세계 유수의 경제학자들(피케티·삭스·로드릭 등)로서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라의 운명을 건 치킨게임에서 그리스가 뒤로 물러서서 합리적 해답을 선택한 것이다.

2016년 6월23일 영국 국민들은 브렉시트를 선언했다. 또 한번 저명한 경제학자들은 당황했다. 영국 안팎의 어떤 경제학자도 브렉시트를 옹호하지 않았다. 브렉시트를 둘러싼 치킨게임은 서로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균형이 아닌 파국으로 치달았다.

영어 스펠링 하나 차이지만 그렉시트와 브렉시트는 사뭇 다르다. 그리스는 유로존 국가지만 영국은 유로를 쓰지 않는 유럽연합(EU) 국가이다. 그리스의 문제는 유로존 국가들이 재정 통합까지 나가든지, 아니면 유로를 포기하고 국민 통화로 복귀해야만 해결된다. 진정한 하나의 나라라면 어떤 지역이 위기에 빠진다면, 당연히 정부가 재정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유로존의 재정은 각국에 맡겨져 있고, 흑자국 국민들은 긴축으로 해결하라고 외쳤다. 유럽 시민으로서 갖는 정체성, 또는 유럽 차원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한 일인 것이다.

유럽 통합의 역사는 ‘단일 시장 만들기’와 ‘통일된 규제’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영국은 거대한 단일 시장을 향유하고 싶으면서도, 인권과 사회·환경을 위한 규제는 피하고 싶었다. 영국이야말로 시장 만능을 신봉하는 앵글로색슨 모델의 원조가 아닌가?

브렉시트에 찬성한 이들은 대체로 북부의 전통적 제조업 지대, 노인, 이민 반대자, 빈민 등으로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세계화의 루저’인 셈이다. 물론 브렉시트를 부추긴 정치인의 감언이설도 난무했다. 유럽에 내는 분담금으로 국가의료체계(NHS)를 강화할 수 있다든지, 유럽연합의 규제를 없애면 산업이 살아날 거라든지, 모두 확실한 거짓말이거나 근거가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영국 국민의 35% 이상(투표자의 52%)이 브렉시트에 찬성했을까? 직접적으로는 시티(런던의 금융 중심지)가 싫고, 보수당이건 노동당이건 기성 정당을 믿을 수 없고, 경제학자 등 잘난 척하는 지식인들도 꼴 보기 싫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양극화의 수혜자인 상층 엘리트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으리라. 또 국가 주권을 잃고 유럽의 한 주가 된다는 생각도 대영제국의 후예들에겐 황당한 일이었을 터이다. 실험경제학에서 입증하듯이 사람들은 앞날의 희망이 별로 없어 보이면 모험을 택하기 마련이다(심지어 식물도 마찬가지란다).

브렉시트는 시장 만능 세계화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대응운동

속아서든 분노해서든 브렉시트에 찬성한 영국 시민들 역시 반세계화를 외친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그렉시트 땐 그리스 시민을 편들고, 브렉시트 땐 유럽연합의 손을 들어준 걸까? 특히 스티글리츠나 로드릭과 같이 ‘또 다른 세계화’를 줄곧 외친 학자들은 왜 입을 다물거나 브렉시트를 걱정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이들이 유럽형 지역공동체를, 지적재산권 강화나 투자자의 주권 침해를 포함하는 미국식 세계화의 현실적 대안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사회 보호라는 면에선 분명 진보적이었지만 단일 시장 만들기, 특히 통화 통합 과정에서 선출되지 않은 관료(집행위원회)의 비밀주의 행정이 두드러졌고, 유럽 위기에 대한 대응은 IMF마저 걱정할 만큼 금융자본과 강대국의 이해를 적나라하게 대변했다. 현실의 대안이 사라질 위기에 빠진 것이다.

나는 브렉시트 역시 폴라니의 대응운동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장원리로 사회 구석구석을 조직하면 사회는 갈기갈기 찢어지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대응운동을 일으킨다. 이 운동은 우루과이라운드에 반대하는 농민운동, 시애틀의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 ‘점령하라’ 운동, 포데모스나 시리자의 집권뿐 아니라 브렉시트와 같은 국수주의적 움직임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시대를 앞서 가든 시대착오적이든,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심지어 인종차별적이든 간에 시장 만능의 세계화에 대한 대중의 저항임이 틀림없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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