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무대악단 지휘 23년째.. 12개 단체 利害도 '和音' 만들 것"

최현미 기자 2016. 7. 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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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기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은 “여러분이 있기에 내가 있고, 국민이 있기에 국가가 있고, 사원이 있기에 회사가 있다고 생각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송순기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 한국방송작가협회,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등 12개 회원단체의 권익을 대표하는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송순기(69) 이사장은 트럼펫 연주자이자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송순기 오케스트라를 23년째 이끌어 오고 있는 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가수들의 공연 무대에 서서 연주하는 최고의 빅밴드라고 자부했다. 그와 그의 오케스트라는 가수 현미, 최희준부터 최진희, 송대관, 남진, 주현미를 거쳐 이선희까지 당대 최고 가수들의 무대 연주를 맡아왔으니 가요계의 산증인이자 역사라 할 수 있다.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수장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상의 불법 복제물 단속과 모니터링 작업을 관장하고 있는 송 이사장은 지난 2일에도 당진문예의전당에서 열린 가수 남진 콘서트 무대에 송순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섰다. 지난해 취임한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직에 앞서 2007년부터 9년간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장을 맡아 실연자 개인에게 저작권 수익이 돌아가도록 시스템을 바꾸며 탁월한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증명한 그이지만 자신은 여전히 무대에 설 때 가장 생생하게 기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저작권 문제는 머리 아프지만 음악은 머리를 맑게 한다는 송 이사장을 지난 6월 27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협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그의 삶을 따라 초등학생 트럼펫 연주자에서 시작해 미 8군 보조, 서울 녹음실 악단,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음악 녹음 감독 등을 거쳐 저작권 행정가로서의 빡빡한 실무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와 트럼펫과의 인연은 초등학교에서 시작됐다. “인천에서 신흥국민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에 브라스 밴드가 있었습니다. 4학년 때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 연주를 시작했어요. 그 뒤 진학한 배명중·고등학교에서도 줄곧 밴드부 생활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자연스럽게 이 계통에 뛰어들었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자연스럽게 뛰어든 곳은 미 8군 무대였다. 그 당시엔 미 8군 무대 이외에는 달리 연주할 곳도 연주할 무대로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미 8군 무대에 트럼펫 연주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이봉조 선생 같은 선배님들 밑에서 잔심부름하고 각종 보조 일을 했어요. 1963년 워커힐 개관을 기념해 이뤄진 루이 암스트롱 내한 공연에서도 보조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심부름 시간이 허튼 시간이 아니었어요. 그때 이봉조 선생에게 재즈 음악을 배웠으니까요. 그저 좋아서 무작정 쫓아다녔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3, 4년 정도 무대 아래에서 보조 생활을 한 뒤에야 그는 비로소 연주자로 무대 위에 설 수 있었다.

그 뒤 한국 경제가 발전하고 한국 가요가 자리를 잡으면서 곳곳에서 악단에 대한 수요가 생겼다. 이런 변화 속에서 7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당대 최고로 꼽히던 MBC 관현악단 단원과 서울 녹음실 리코딩 악단원으로 지냈다. 한때 서울 녹음실 악단장을 맡기도 했다.

“70, 80년대 스튜디오 녹음 시절은 요즘과 완전히 달랐어요. 당시 동부 이촌동에 있던 서울 스튜디오와 장충동 스튜디오가 양대 산맥이었지요. 이와 함께 마장동 스튜디오가 3대 녹음실이었어요. 지금은 가수들이 몇 번이나 녹음하고 목소리도 기계로 보정할 수 있지만 그땐 그럴 수 없었어요. 녹음실에서 한번에 딱 맞춰야 했어요. 제작자가 3시간30분 안에 몇 곡을 부탁한다고 하면 리허설 한 번 하고, 악보 체크 하고, 가수와 한두 번 맞춘 뒤 시간 안에 녹음 작업을 마쳐야 했어요. 가수들이 굉장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 가수들의 라이브 실력이 좋은 것도 이런 제작 환경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선희 씨는 진짜 성대가 쨍쨍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가수 이선희, 이상은과 그룹 소방차를 자신이 스튜디오에서 직접 반주를 맡아 녹음한 거의 마지막 세대 가수들로 기억했다.

그 뒤 1993년 시대 변화 속에 스튜디오 시절이 막을 내리면서 서울 녹음실 리코딩 악단을 그만둔 그는 당시 최고 실력의 연주자들을 모아 송순기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트럼펫 연주자 셋, 트롬본 연주자 셋, 알토 색소폰과 테너 색소폰 각각 셋, 여기에 피아노, 신시사이저, 기타, 베이스기타, 드럼, 바이올린 연주자까지 25명 안팎의 멤버들로 이뤄졌다. 가수들의 공연에 따라 악단 규모를 줄이기도 했고, 코러스나 연주자를 보강해 규모를 키우기도 했다. 지금 활동하는 트럼펫, 트롬본 연주자들의 평균 연령이 73세라는 것은 그만큼 이들이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 감각이나 리듬 감각은 어느 젊은이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라고 자부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단독 공연도 하고 교포 위문 공연도 많이 다녔지만 역시 가수들의 무대에 반주 밴드로 자주 섰다고 했다.

“요즘 대중 가수들은 소위 MR(Music Recorded·반주 음악)를 많이 틀고 경비 문제로 악단을 쓰지 않습니다. MR를 틀면 연습할 시간도 많지요. 하지만 소위 빅가수들은 여전히 무대에서 실제 연주가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가수들도 우리 오케스트라를 좋아합니다. 몇십 년 동안 가요 연주를 해오다 보니 6·25 이전 가요부터, 옛날 팝송까지 제목만 대면 악보 없이 척척 연주해 냅니다. 가수 입장에서는 상당히 편하지요.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빅 가수들이 있고 그들이 우리 오케스트라를 찾는 한 계속 무대에 함께 할 생각입니다.”

그는 무대가 주는 성취감이 참 중독성이 있다고 했다. “가수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면 힘이 들어도 성취감이 있습니다. 지휘봉 하나로 음악을 함께 만들어 내고 그 음악으로 가수를 편하게 해주고 공연이 훌륭하게 끝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성취감이 대단합니다.” 그는 2011년 이후 지금까지 30∼40회 무대를 가졌다고 하니 매년 5, 6회씩 무대에 선 셈이다.

그동안 함께 한 가수 중에 누구와 가장 호흡이 잘 맞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모두 좋았다고 답했고, 그러면 누구의 무대가 가장 멋졌느냐는 질문엔 멋지지 않은 무대가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주현미는 타고난 목청을 가졌고 가요뿐 아니라 팝송에도 매우 뛰어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잘했다고 했다. 남진은 무대 매너가 뛰어난 가수로 자신의 몸을 내던져서라도 관객을 즐겁게 하고 흡수하는 재주가 있다고, 송대관 역시 관객을 휘어잡는 법을 알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활동을 하면서 송 이사장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의 음악 녹음을 맡기도 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폐막식에 쓰인 음악, 선수단 입장할 때 음악, 참가국의 국가, 시상식에 흐르는 음악 등 모든 음악을 녹음했다. 이 활동으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로부터 공로상도 받았다. 이렇게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했기에 대중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수든, 제작자든 그 당시 ‘송순기’ 이름 석 자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가요계에서 그의 명성은 확고했고 많은 가수가 그와 함께 무대에 서기를 원했다고 했다.

이렇게 음악 인생을 살아온 그는 2007년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장을 맡으면서 추진력이 뛰어난 행정가로 변신한다. 그 뒤 9년간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장으로 일하면서 그가 이룬 가장 큰 보람이라면 가수, 연주자 등 실연자 개인에게 저작권료가 돌아가도록 한 것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가 연합회 회장직을 맡기 시작했을 때엔 연합회 내 가요 분과, 연주 분과가 있어 각각 저작권료를 받아 전체 경비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가 법제화 등을 추진해 방송횟수에 따라 저작료가 개인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개별 신탁 제도를 정착시켰다. 이에 요즘엔 실연자들이 분기별로 저작료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저작권 관련 12개 단체의 권익을 대변하고, 이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12개 단체가 각각 이해관계가 있으니 답답할 때도 있다”면서도 그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함께 연주를 해왔고, 또 여러 연주자를 조정해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왔기에 조정과 설득에는 꽤 능하다고 했다. 그는 연주자로서 어렸을 때부터 익힌 원칙이 ‘상대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있기에 여러분이 있고, 여러분이 있기에 내가 있다. 국민이 있어서 국가가 있고, 사원이 있어야 회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연합회의 가장 큰 업무인 불법 복제물 모니터링과 단속에 대해 이야기하며 최근 저작권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많이 높아졌지만 불법 복제 문제는 여전하다고 걱정했다. 그는 저작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 저작권 문제를 나와 상관없는 작가, 작곡가, 가수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가족 문제로 생각해달라고 요청했다.

“내 가족, 내 친구가 오랫동안 시간과 돈과 재능을 다해 만들어 놓은 저작물이 한순간에 복제돼 불법으로 유통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저작권 불법 복제물을 생각한다면 불법 복제물을 만들수도 또 사용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인터뷰 = 최현미 부장(문화부)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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