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모험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 될 수 없어
‘자신의 방에서, 인생 따위 생각할 수 있을까?’
맞다, 방 안에서는 안 된다. 특히 요즘처럼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물든 6월에는 창밖으로만 자꾸 시선이 간다. 방 안에서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기에는 꽃이 아깝고 나무가 아깝다. 가벼운 신을 신고 가벼운 가방을 메고 어디로든 나가야 한다.
‘민들레처럼 여행을 떠났다.’
손에 들고 훅 불면 미련 없이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름도 낯선 간이역에 내려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동네 노인들 틈에 끼어 앉아 국밥을 나눠 먹으면 좋겠다.
‘모험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어.’ ‘때로는 옆길로 새는 것만 해본다.’
그래서 내가 좋은 어른이 못 되었나 보다. 모험해야 할 나이에 남들 하는 대로 모범생 흉내만 내서 이 나이 되도록 철이 덜 든 미숙한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용부호를 넣은 문장들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진행되었던 일본철도(JR) ‘청춘18티켓’의 인쇄광고의 헤드 카피들이다. 청춘18티켓은 우리나라의 철도공사에서 제공하는 ‘내일로’티켓과 비슷한 상품이다. 표 한 장으로 하루 동안 무제한으로 JR열차를 탈 수 있는 티켓인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대학 새내기들을 주 타깃으로 만든 상품이다. 광고의 비주얼은 한적한 바닷가 모래사장에 편안하게 누워 하늘을 쳐다보는 청년이나 언덕 위에 있는 낡은 나무배에 걸터앉은 소녀 혹은 화면을 가득 채운 하늘 아래 그림처럼 놓여있는 간이역이다. 기차를 타면 만날 수 있는 흔한 풍경이지만 도심에서는 동경만 하다가 말게 되는 아름다운 장면들이다. 광고를 보면 기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 책 한 권의 지혜쯤은 거뜬히 담고 있는 헤드라인들은 만 18세 청춘들을 충동질하기에 충분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KTF의 광고 카피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나이가 들어보니 그 말은 거짓말이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다. 그 나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있다. 일본의 청춘18티켓이나 우리나라의 내일로 열차표를 사는 것도 그 중 하나다. 내일로는 만 25세 이하 청년들만 이용할 수 있는 철도 자유여행 패스다. 사실 나이 들어 체력이 떨어진 이들은 살 수 있어도 이용하기 힘든 티켓이다. 지정좌석 없이 일반 열차의 입석과 자유석만 사용할 수 있으니 생각만 해도 다리가 아프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들 얘기하는 데 겪어보니 마음도 늙는다. 몸이 더 빨리 늙을 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청춘들의 알콩달콩 로맨스 드라마를 보면 주로 여자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했는데, 요즘은 주인공의 엄마 마음이 되어 드라마를 본다. 아니 비현실적인 우연이 계속 일어나는 해피엔딩 로맨스보다 ‘저승바다에 발 담그고’ 살면서 ‘자신들의 영정사진을 재미 삼아 찍는’ 늙은이들이 나오는 드라마가 더 재미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봄은 소리 없이 가버리게 된다.’ ‘언젠가는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 온다.’
다시 청춘18티켓 광고를 들여다본다. 이런 헤드라인은 청춘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쓰기 어렵다. 청춘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지나버린 청춘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와 환희를 고스란히 간직한 중년 이후에나 쓸 수 있는 카피가 아닌가 싶다.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도 소중히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에게.’ ‘아아, 여기다, 싶은 역이 분명 있다.’
한가하게 아무 역에서나 내리며 여행하는 스무 살 무렵의 청년들을 상상만 해도 즐겁다. 철도공사에서 올해 하계 내일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니 기말시험을 보느라 며칠째 책상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막내에게 이 광고들을 보여주고 내일로 티켓으로 여행을 떠나보라고 해야겠다.
‘여름방학은, 늦잠이 가장 아깝다.’
이 카피는 곧 여름방학을 맞는 아이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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