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인의 페르시아 산책](5) '왕중왕'이 세운 도시.. 신이 보시기에 아름다워야 했다 -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글·사진 ㅣ 김중식 시인 2016. 5. 27.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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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예술이 적을 이긴다… ‘불사 친위대’ 감시 속 만국의 문 지나 입궁하는 조공행렬, 장엄함에 머리 조아려

동양과 서양의 만남. 페르시아 제국의 세계사적 소임이자 유산은 그것이었다. 인류 첫 대제국 아케메니드 왕조(BC 550~BC 331)는 세상의 모든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들의 고유한 방식으로 융합한 뒤 그것을 더 넓은 세상에 확산시켰다.

반인반수의 ‘라마수’가 페르세폴리스궁 초입의 ‘만국의 문’을 지키고 서 있다. 사람의 얼굴, 황소의 몸과 발굽, 독수리의 날개를 갖고 있다. 왜 황소 뿔, 독수리 부리(또는 발톱)가 아닌 ‘연약한’ 부위들을 합체했을까. 페르세폴리스궁의 건축이념은 하드파워보다는 스마트파워(평화)였던 듯하다.

새 수도 페르세폴리스(‘페르시아의 도시’라는 뜻의 그리스어)는 제국의 상징으로서 만국의 ‘서울’이었다.

도시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페르세폴리스는 너무 다양한 것을 통합한 독특하고 독창적인 종합양식이다.”

궁 벽면의 ‘불사 친위대(Immortals)’ 부조.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

“나는 아후라마즈다(조로아스터교의 주신)와 다른 모든 신의 뜻에 따라 이 궁전을 짓는다.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우며 장엄한 궁전을 만들고자 한다.”

다리우스(성서 이름 ‘다리오’) 황제는 페르세폴리스궁 건축의 3원칙을 초석에 밝혔다. 페르세폴리스궁은 제국 통치의 총본산으로 ‘왕중왕’인 자기 자신의 거처였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건축물이어야 했다. 궁은 노루즈(조로아스터교의 새해, 3월21일 춘분) 때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궁궐이었다.

신이 보시기에 아름다워야 했다. 그리고 궁은 만국의 사신들이 모이는 장소이므로 위엄이 있어야 했다. 그중에 제일은 아름다움 아니었을까. 성서에서도 신이 세상을 창조한 후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기 1:31)고 했다. 문자 그대로, 신 역시 보기 좋은 떡이 맛있다고 여긴다. 궁을 아름답게 만들면 신이 기뻐할 것이었다.

문맥을 살피자면, 삶의 궁극적 기쁨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데 있다. 황제가 세상 모든 것을 손에 쥔 다음 따분한 삶을 견디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은 미에 대한 헌신일 수 있다. 그게 의심스럽다면, 페르시아 황제들은 아름다움이 제국의 통치에 도움이 되리라는 속물적인 예술관 정도는 지녔다고 치자.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뒤 대를 이어 궁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인 크세르크세스 황제도 비슷했다.

“이 만국의 문과 아름다운 궁을 우리의 수호신 아후라마즈다의 명령에 따라 여기 짓는다. (중략) 아름다운 모든 것은 아후라마즈다의 은혜 덕분이다. 아후라마즈다여, 우리 제국과 저를 끝까지 보호하소서.”

페르시아 제국이 신의 보호 아래 만세(萬歲)를 누려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게 페르세폴리스궁의 이념이었다.

28개 조공국 사신들의 모습이 새겨진 ‘조공 행렬도’의 일부. 암사자가 뒤돌아보며 울부짖고 있다. 암사자 젖은 탱탱 부어 있다. 뒤따라오는 새끼들이 배고파 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들의 앙상블”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그냥 전 세계였다. 한반도 2배 크기의 카스피해가 제국의 호수였다. 인구는 2000만명 정도.

궁은 다리우스 즉위 직후인 BC 522년쯤 착공했다.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왕 때까지 3대에 걸쳐 약 60년간 지었다. 120년 걸렸다는 설도 있다. 배산임야(背山臨野)의 명당에 16만5000여㎡(5만평) 규모로 터를 닦았다. 궁궐 크기는 너비 300m, 길이 450m. 지붕의 채광, 가느다란 기둥, 황금의 천장, 회랑의 부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는 아래와 같다. “이 모든 것들의 앙상블은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학적 유적으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고대 문명의 독특한 자질을 보여주는 증거로 평가된다.”

안타깝게도 문외한의 까막눈에는 뒹구는 돌덩이의 개수와 크기만 보일 뿐이었다.

■만국의 문, 불사 친위대

매년 속국의 사신들이 제국의 수도에 들어서면 불사 친위대(Immortals)로부터 호위 내지 감시를 받았을 것이다. 친위대는 1만명으로 조직됐는데, 죽거나 다치면 다른 군인으로 보충돼 항상 같은 인원을 유지했다. 이들은 금으로 도금된 장창을 들고 있었다. 등에는 큰 활통을 멨다. 허리춤에는 칼도 찬 것 같다. 주름진 우아한 군복을 입었다. 머리에는 ‘티아라’(주름 잡힌 왕관형 띠)를 썼다. 불패의 부대였으나, 영화 <300>의 전사들에게 치욕을 맛보았다.

사신들은 111개 계단을 올라 입궁했다. 궁의 시작은 ‘만국(All nations)의 문’이다. 이때의 ‘만국’은 제국 내 28개 민족과 부족이다. 문 주변에 19세기 이후 방문객들의 낙서가 즐비하다. 가장 오래된 것은 1810년작이다. 유럽과 미국 사람이 대부분이다. 독일 신혼부부 명의의 낙서도 있다. 뒤늦게 중국인들이 가세했다. 한국인의 낙서는 보지 못했다.

라마수(반인반수의 신화 속 동물)라는 스핑크스 두 쌍이 가장 먼저 손님을 반긴다. 일종의 사천왕인데, 덩치에 비해 약한 이미지다. 얼굴은 사람(지혜), 몸통은 소(강인함), 날개는 독수리(자유)다.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려 했다면 얼굴은 소(뿔), 몸통은 독수리(발톱)로 했을 것이다.

■조공 행렬도와 알현전

황제가 머무는 알현전으로 가는 회랑 벽에 ‘조공 행렬도’ 일부가 남아 있다. 진상품을 바치러 온 사신들의 모습이 돋을새김으로 묘사돼 있다. 오리엔트 건축미술 양식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곱슬머리 에티오피아 사신은 상아를 메고 왔다. 터키 사람은 망토를 걸쳤다. 고깔모자 쓴 스키타이 사절은 모직물을 들고 있으면서 뒤에 칼을 숨기고 들어왔다가 들킨 적이 있는가 보다. 엘람은 사자를 바쳤다. 젖이 탱탱 부어 있는 암사자가 두 마리 새끼를 뒤돌아보며 울부짖고 있다.

궁 여기저기에 황소 엉덩이를 물어뜯는 사자 부조가 있다. 그것은 신년하례식을 상징한다. 춘분의 별자리는 사자자리가 나오면서 황소자리가 물러나기 때문이다. 알현전이지만 황제를 볼 수 없었다. 황제와 사신 사이에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신들은 황제를 보아서도 안되고, 보이지도 않았다. 황제는 휘장 너머로 사신을 보았다. 황제는 발판 위에 발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있다고 했다. 그는 땅과 흙을 발로 밟는 존재가 아니다.

궁 입구 바닥의 점토판. 조별 노동자들의 월급명세서라고 한다. 페르시아 제국 건설 현장의 인부들은 노예가 아니라 노동자였다는 것이다.

■백주 궁전

손님을 위한 대기실이자 연회장이다. 한 변 길이 70m의 정사각형 모양이다. 14m 높이의 기둥 100개가 황금지붕을 떠받쳤다. 지금은 기둥 2개와 출입구 일부, 그리고 기둥 꼭대기에 있던 조각상 파편이 뒹굴고 있을 뿐이다.

페르시안 카펫 위에서 쿠션에 기댄 손님들은 비스듬히 누워 춤과 노래를 즐겼다. 예수가 의자에 앉아 ‘최후의 만찬’을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를 것이다.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던 페르시아 무희는 늘씬했을 것이다.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와 다른 아리안족 여인의 이국적인 풍모 때문에 더 아름답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녀들은 헐렁한 옷에 황금 장신구를 걸쳤다. 몸에서는 장미 향수 냄새가 피어났다. 쉬실릭(숯불구이 양갈비) 안주와 함께하는 쉬라즈산(産) 와인의 앙상블이라니. 제국에 대해 원한을 지닌 사절이 있다 하더라도, 그날만큼은 흔들렸을 것 같다.

이튿날은 왕과 함께 사냥을 했다. 사육 중이던 사자 몇 마리를 ‘낙원’(숲과 오아시스가 있는 왕의 정원)에 풀었다. 왕은 쌍두마차 위에 반쯤 일어선 자세로 서 있었다. 사냥은 왕의 용기와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소프트파워(아름다움)로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고, 사냥터에서 하드파워(군사력)로 저항의 의지를 꺾어놓았을 것이다.

유물을 통해 재구성한 다리우스 황제 부부의 모습. 금붙이 하나하나가 제국의 용광로에서 흘러나온 당시 전 세계 문화의 엑기스였을 것이다.

■보물창고

‘보고(寶庫)’라는 말은 귀한 게 많다는 비유의 언어다. 하지만 이곳의 보물창고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지녔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이곳 보물을 고국으로 실어보낼 때 2만마리의 노새와 5000마리의 낙타를 동원했다. 그걸 돈으로 환산하면 당시 그리스 재정의 100배였다고 한다.

남아있는 조각상의 눈이나 부리 부위에는 마마 자국 같은 것이 있다. 보석을 박아넣었던 자리들은 다 비어 있다. 가장 빛나던 곳이 가장 큰 흉터로 남았다.

‘타고 남은 재’만으로도 페르시아 제국의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은 3D로 입체복원한 동영상을 볼 수 있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차라리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태조 키루스의 석묘. 알렉산더가 “우리가 깨어 있으니 그대는 잠드소서”라며 무덤을 쓰다듬었다고 한다. 키루스는 원수에게도 존경받은 만민의 해방자였다.

■‘관용’을 베푼 덕일까…알렉산더도 파괴 못한 ‘키루스 대왕 석묘’

제국의 창시자 키루스(BC 585~BC 529)는 골칫덩어리인 중앙아시아 유목민들과 전투를 하다 죽었다. 묻힌 곳은 제국의 첫 수도로서 역대 황제의 즉위식이 열린 파사르가다에. 페르세폴리스에서 43㎞ 떨어진 곳이다.

BC 331년 알렉산더(BC 356~BC 323)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키루스 석묘를 파괴하려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비문을 보고는 마음을 바꿨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아, 나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 나 키루스는 한때 세계를 지배했지만. 이 땅이 다른 왕에게 점령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 몸을 덮고 있는 흙에 손대지 말라.”

알렉산더는 “우리가 깨어 있으니 그대는 잠드소서”라며 무덤을 어루만졌다고 한다. 알렉산더와 칭기즈칸의 묘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키루스는 자신의 묘를 지상에 당당히 내놓았다. 모든 민족에게 관용을 베푼 자의 도저한 자신감 덕분이었을까.

이란인들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세상 전부를 정복하고, 세상 전체를 파괴했다. 페르세폴리스궁 역시 실화(失火)로부터 안전했을 건축물이었는데 완전 소실됐다면, 방화(放火)가 아니었을까 싶다.

서양에서는 알렉산더가 무희의 유혹에 넘어가 술김에 페르세폴리스궁에 불지른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았다고 한다.

키루스 석묘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건축물 가운데 현전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제국의 융·통합적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한다.

■필자 김중식
1967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90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하고, 1993년 첫 시집 <황금빛 모서리>를 냈다. 최근 3년 반 동안 주이란 한국대사관 문화홍보관으로 근무했다. 이란 재임 중 페르시아 신화와 문화 관련 답사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글·사진 ㅣ 김중식 시인 uuyou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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