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악을 위해 내 안의 편견 깼죠"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역시 작가 정유정(50)이다. 3년 만인 14일 펴낸 신작 장편소설 '종의 기원'은 이야기에 12기통 엔진을 장착한 듯 술술 읽힌다. 전작인 '7년의 밤'과 '28' 못지않은 속도감이다.
악(惡)에 천착해온 정 작가는 '종의 기원'에서 그 저릿한 기운을 폭발시킨다. 살인자로 거듭나는 청년 '한유진'의 이야기다. 그녀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있던 1990년대 부모를 살해한 패륜 사건이 추악한 얼굴로 드러난다.
유진은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내 심장을 쏴라'의 점박이, '7년의 밤'의 오영제, '28'의 박동해를 뛰어넘는 악인으로 사이코패스다. 기자도 부러워하는 치밀한 정 작가의 단문에 탑승한 이야기는 긴박한 호흡으로 읽는 이의 가슴을 쥐락펴락한다.
예약판매만으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주간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차지하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침체에 빠졌던 문학계에 숨통이 돼주리라는 기대가 크다.
출간 전날인 13일 서교동 출판사 은행나무에서 만난 정유정은 "악을 그리고자 내 안의 편견, 세계관, 받은 교육을 깨뜨리려고 노력했다"고 눈을 빛냈다.
"사이코패스의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유진이처럼 생각을 해야 했다. 소설 자체가 세상을 향해 유진이의 자기 변론이 돼야 했다. 그러니 서술이 왜곡, 합리화가 됐다.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까지 포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인칭이 필요했다."
3번이라 처음부터 다시 썼다. "처음 썼을 때 이야기는 나쁘지 않은데 주인공 자체에 생기가 없더라. 두 번째 다시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180개 장면으로 쪼갰다. 그리고 복잡한 설정은 하나씩 내치거나 해체했다. '유진이가 자고 일어나니까, 엄마가 죽어 있다'는 설정만 남기니까 분명해지더라. 그런데 그의 존재감이 아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 번째 다시 썼는데 그때 깨달았다. 내 윤리관, 교육받아온 것을 다 깨지 못하고 내 안에서만 작업했다는 걸 말이다."
형식과 내용,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삼위일체 된 문장은 쾌감이 느껴질 정도다. "내 문장에 핵심이 되는 것은 속도감이다. 미문보다는 가장 정확한 문장을 좋아한다. 문장의 톤은 이야기에 맞게 쓰고자 했다. '내 심장을 쏴라'는 쾌활했고,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는 유쾌한 편이었다. '7년의 밤'은 비장한 맛이 있었고 '28'은 어두웠다. '종의 기원'은 시니컬하다."
잔인하거나 무서운 이야기를 쓴 사람은 건강하고 선하다는 풍문이 있다. 그만큼 악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정 작가는 "사실 우리는 나쁜 상상조차 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그것이 교육의 효과"라며 "소설로 쓰니 죄책감을 느낄 수 없이 상상을 전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간호사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거친 정 작가는 소설 쓰기 전 치밀한 취재를 하기로 유명하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우리 집에서 일어난 일밖에 못 쓴다. 작가들이 글이 막히는 경우는 대부분 그 세계를 잘 몰라서다." 정 작가는 수영선수 출신인 한유진의 심리와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수영도 약 3년간 배웠다.
'종의 기원'은 시공간이 한정됐다. 2박3일간 간척지 신도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정 작가 소설의 핏줄과도 같은 핍진성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등단한 지 10년이 지나면 신인 작가의 딱지를 뗀다고 하더라(정유정 작가는 2009년 등단했다). 그 전에 마지막 작품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시도를 신인 때 다 하고 싶었다. '7년의 밤'(2011)부터 미션을 줬다. '내 심장을 쏴라'에서 여성 캐릭터의 겹이 얇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래서 '7년의 밤'에 강은주를 앞세워 여자 캐릭터의 겹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드센 여자로 보이지만, 불쌍하고 연민이 가는 여자로 만들고자 했다. (호수가 배경인) '28'에서는 내가 다룰 수 있는 공간의 한계에 도전했다. 이번 '종의 기원'에서 미션은 '인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했다."
좋은 작품은 예측 없이 시대를 예고한다. '종의 기원' 출간 직전 또 하나의 패륜 사건으로 사회가 떠들썩했다. '해법 없는 미지의 전염병을 다룬 '28' 역시 메르스 당시 끊임없이 회자했다.
"인간의 야만성과 잔인함은 중세 이전이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지금은 최소한의 법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다. 안전한 삶에서 소설을 통해 끔찍한 일들을 간접 경험하는 거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것이 무색하게 황당한 일들이 벌어져 두렵기도 하다.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제 한국 문단은 정 작가를 빼놓고 말하기 힘들다. 신작을 내는 작가에게 언론과 대중의 눈이 일제히 쏠리는 경우도 좀처럼 보기 드물다.
기대가 부담스럽지 않냐고 하자 "내가 워낙 낙천적"이라며 "기대를 해주시면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크다. 10을 기다리셨으면 11을 주자는 마음"이라고 미소 지었다.
정 작가는 '문학 한류'의 선봉장으로도 지목되고 있다. 독일에 독일어로 번역 출간된 '7년의 밤'이 지난해 말 현지 유력 주간 '디 차이트(Die Zeit)'가 선정한 '2015 범죄소설 톱10'에서 9위에 오르는 등 외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최근 프랑스에서도 주목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이라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종종 '28'과 이번에 신작에 대한 판권 문의도 온다."
정 작가는 한국 독자에게 인정을 받을 때 "가장 기분이 좋다"고 눈빛을 반짝였다. "모국어로 쓴 소설을 모국어로 쓰는 독자들이 잘 읽어줬을 때 정말 기쁘다. 하나뿐인 우리 독자들이 가장 소중하다. 내 호흡까지 읽어줄 수 있는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드보일드한 소설을 주로 쓰는 정 작가에게 "왜 행복한 것을 써보지 않느냐"라고 묻는 이들이 많다. 그녀는 "작가라도 모든 걸 다 잘 쓸 수 없다"고 웃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행복한 건 나보다 잘 쓰는 분들이 많다. 내가 가장 잘하고 싶은 걸 독자들에게 드리고 싶다."
강한 이야기와 시니컬한 문체로 무장한 소설을 쓰지만 정 작가는 사실 잘 웃고 수더분하다.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공모전에서 11번 떨어졌던 무명 시절에 "오로지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꿈을 꾼 그녀이기에 겸손함도 갖췄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독자들이 있어 감사하다"는 말에 진심이 그렁그렁하다.
그런 그녀를 장르소설, 대중소설, 순문학의 경계에 굳이 세울 필요는 없어 보인다. 정 작가의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장르다. "장르는 내게 수단일 뿐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다. 독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어줄 이야기 말이다. 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되, 재미있고 의미를 담아 잘 쓰고 싶다."
정 작가의 글은 펄떡거리는 생명력이 있다. 그녀가 글을 쓸 때 느낀 떨림이 그대로 전달된다. "소설을 쓰기 위해 이야기를 고를 때 나 자신의 욕망을 끓게 하는 걸 고른다. 가슴이 설레지 않으면 흥미가 있을 것 같은 이야기도 저버린다. 내가 100번 끓을 때 독자에게 1번 가닿는다. 그러니 내가 더 펄펄 끓을 수밖에." 384쪽, 1만3000원,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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