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절규하는 저 핏빛 노을.. 노르웨이에선 과장이 아니죠

전원경 인제대 겸임교수 2016. 4. 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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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평론가 부부가 들려주는 '명화 속 과학'] (2) 뭉크의 '절규' 북극에 가까운 고위도 지역은 저녁 무렵 빛의 산란 더 많아.. 저위도보다 더 진한 붉은 노을 공포를 극대화하는 표현이지만 뭉크가 본 모습 그대로일 수도

유리구슬처럼 파랗던 한낮의 하늘에 어느새 붉은색 노을이 진다. 노을은 왜 생기는 것일까? 아니, 하늘은 왜 파란색일까? 빛이 없는 우주 공간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 우주 공간이 대기권인 '하늘'로 들어오면 갑자기 바다처럼 푸른빛으로 변한다. 16세기의 위대한 과학자이자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공기 중의 미세한 물질 때문에 하늘이 파랗게 보인다고 설명한 노트를 남겼다.

다빈치는 과학적으로 거의 맞는 설명을 했다. 190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존 윌리엄 레일리는 공기 중의 부유물과 산소·질소 등 대기 분자에 의해 산란이 일어나 하늘이 파랗게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태양에서 오는 일곱 무지개 빛깔 중에서 공기 중의 입자에 의해 가장 많이 산란되는 것이 파란색 계열이다. 푸른 빛은 400㎚(1㎚=10억분의 1m) 길이의 파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 빛은 640㎚ 길이의 파장을 가진 붉은빛보다 공기 중에서 여섯 배 정도 많이 산란된다. 쉽게 말해 파란색이 가장 많이 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이다.

해가 질 무렵에는 태양빛이 비스듬하게 대기를 통과하기 때문에 빛이 대기권을 지나는 길이가 한층 길어진다. 이 와중에 파란색 계열 빛은 다 산란돼 흩어지고 우리 눈에는 남아 있는 빛인 빨강 계열만 보인다. 이러한 빛의 산란 작용으로 저녁이 되면 파랗던 하늘이 빨강, 주황, 노랑 노을로 물드는 것이다.

노을을 담은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절규'일 것이다. 어느 늦가을 저녁, 한적한 길을 걸어가던 남자는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을 듣는다. 남자는 처절한 비명에 전율하며 두 손으로 귀를 막는다. 그러나 그의 동행 두 사람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총총걸음으로 다리를 지나가고 있다. 비명은 오직 이 남자에게만 들리는 자연의 무시무시한 절규이다. 유령처럼 일그러진 잿빛 얼굴과 동그랗게 뜬 두 눈, 타원형으로 벌어진 입이 남자가 느끼고 있는 공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강렬한 핏빛 하늘과 검푸른 바다 역시 남자가 느끼는 불안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절규'의 배경은 오슬로 인근 에케베르그(Ekeberg)라는 피오르 해안이다. 얼핏 다리처럼 보이는 나무 난간은 해안 절벽에 친 울타리다. 이 절벽에서 바다로 투신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고 한다. 그림이 그려진 1893년 초에도 뭉크의 친구 하나가 이곳에서 자살했다. 그러한 기억이 일순 그림의 주인공에게 몸서리치는 비명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규'를 가득 채운 핏빛 노을이 주인공의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아마도 뭉크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노을을 그렸을 것이다.

뭉크의 나라 노르웨이 위치는 북위 58~72도로 북극에 많이 근접해 있다. 고위도에서는 태양빛이 대기에 입사하는 각도가 더 낮고 공기 밀도도 더 높다. 이 때문에 고위도 지역의 하늘에서는 저위도 지방보다 빛의 산란이 더 많이 일어난다. 자연히 노르웨이 사람들은 우리나라 같은 저위도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진한 붉은색 노을을 본다.

뭉크가 '절규'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근원적인 공포의 감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절규'의 배경도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처럼 마냥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북극권에 가까운 도시인 오슬로의 노을은 뭉크의 그림 속 하늘처럼, 타오르는 불처럼 새빨갛다. 자연의 신비로움이 예민한 화가의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했고, 그 결과로 우리는 핏빛 노을을 배경으로 한 그림 속 주인공의 처절하고도 고독한 절규를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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