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잔에 담긴 마음과 추억을 마시다

백영옥·소설가 2016. 4. 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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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품 그 도시] '잔' ― 카페가 있는 세상의 모든 도시

나는 카페인 중독자다. 커피를 많이 마시다 보니 차를 마시게 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일일이 거름망으로 찻잎을 우려내는 게 귀찮기도 하고, 차 특유의 씁쓸한 맛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친구가 본격적으로 차를 공부하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그녀 덕분에 한여름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시원한 '백차'의 맛을 알게 되었다. 겨울에는 홍차 대신 보이차에 따뜻한 우유를 듬뿍 넣어 보이 밀크티를 만들어 마시면 좋다는 것도 알았다. '동방미인'이라는 이름의 대만 차를 마셔본 것도 친구 덕분인데, 이름 유래를 물어보니 빅토리아 여왕이 이 차를 마시고 차의 맛과 향이 동방의 미인 같다고 해서 붙었다고 했다.

어느 겨울, 그녀는 늦은 밤 내 작업실에 와서 '허니 앤드 바닐라 카모마일 티'를 우려 주었다. 트와이닝스 상표가 붙어 있는 노란색 티백이었다. 울음이 멈추지 않던 그날, 그녀와 달콤한 차 한 잔을 나눠 마셨다. 차가 식을까 봐 그녀는 따뜻한 물을 내 찻잔에 계속 조금씩 부어 주었다. 말없이 그저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위로란 말이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으로 증명하는 것이란 걸 말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가끔, 그때 찻잔에서 올라오던 희미한 바닐라 냄새가 떠오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기억해내는 건 그러므로 너무 당연하다.

나는 찻잔을 많이 가지고 있다. 딱히 잔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중국의 리어카에서 1달러에 산 싸구려 찻잔부터, 에르메스 로고가 새겨진 비싼 찻잔까지 장식장 안에는 찻잔이 가득했다. 작가인 내가 가장 많이 선물받는 것도 커피와 차, 그리고 찻잔. 재밌는 건, 찻잔이 집까지 들어오게 된 사연이다. 찻잔 하나에는 찻잔 하나만큼의 사연이 있다.

"입구가 넓은 잔은 공기와 닿는 면적이 넓어 향을 즐기기 좋다. 공기와 접촉해야만 느낄 수 있는 화학적 반응인 '향기'를 더욱 잘 느끼게 하도록 음료와 공기의 표면적을 넓힌 것이다. 그만큼 빨리 식을 수 있지만 미각의 부족함을 후각과 시각이 채워주고도 남는다. (…) 커피 잔이 좁은 건 그만큼 온도가 중요한 것이고, 홍차 잔이 넓은 건 향기를 더욱 잘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서재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다가 문득 이 책 '잔'을 발견했다. 책의 저자는 나처럼 커피를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매일매일 녹차, 홍차, 커피를 온몸에 누적시키다 보니 언젠가 카페인으로 만들어진 아이를 낳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말을 할 정도다. 카페인 아이라니…. 카페인처럼 새까만 아이가 달린 티백이 담긴 찻잔 그림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 특유의 상상이 재밌었다.

"신선한 바람이 불 땐 케냐 AA가 좋더군요. 우울할 땐 예가체프가 좋지요. 분위기를 잡고 싶을 땐 과테말라를 마셔요. 새로운 것이 마시고 싶을 땐 온두라스가 맛나지요. 평소에 좋아하는 건 흙맛이 나는 만델링이고요. 현실을 바로잡고 싶으면 공정무역 커피를 마셔요. 머리가 아플 땐 마시지 않는 것이 좋아요. 그리고 비가 올 땐 카푸치노,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비가 오면 무조건 카푸치노를 마십니다."

'잔'은 아주 예쁜 책이다. 책장을 열면 커피 잔, 찻잔, 술잔 등이 가득 펼쳐져 있다. 세상의 모든 커피와 찻잔이 이곳에 담겨 있을 것 같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주인공은 어느 날 작업실 앞에 생긴 카페 '제리코'에 들른다. 그녀는 그 후 카페의 단골이 된다. 애칭이 백 마담인 여자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는 동네 사랑방처럼 이런저런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동네의 작은 카페 소사이어티. 나도 그런 곳을 얼마쯤 알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잔'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교토와 강릉의 작은 카페에서, 삼청동과 부암동의 카페에서 그녀는 커피나 차를 마신다. 사람 사는 곳 이야기는 비슷비슷해서 웃을 일이 있으면 울 일이 생기고, 울다가도 웃게 된다. 불면증이 심해져 찾아간 한의원에서 그녀에게 의사가 말한다. 모든 병의 근원은 스트레스이고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매사에 무책임해지는 것이라고. "그냥 무책임해지세요." 마음이 힘든 어떤 날은 전문가에게 돈을 주고 이런 말을 듣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불량 생두를 하나하나 골라내어 정성스럽게 볶는 로스터의 마음과, 갈아놓은 커피에 가늘고 촘촘하게 부어 내려오는 커피를 기다리는 바리스타의 마음과, 예쁜 잔에 담긴 깊은 커피를 눈으로, 코로, 입으로 음미하는 나의 마음까지. 강릉에 다녀온 후로는 커피 한 잔에 담긴 마음들을 생각하게 된다."

커피 원두에 꽃삽처럼 손가락을 파묻고 있으면 늘 기분이 좋았다. 커피를 열 잔쯤 마시며 원고를 쓰다가 종종 북 카페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책이야 쌓이고 넘치니 책장을 채워 넣을 걱정은 없을 것 같았고, 찻잔도 제법 많이 가지고 있으니 집에 있는 걸 쓰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카페에는 발걸음이 가만가만한 고양이를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스콘 정도는 구워 팔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 옛날 얘기다. 하루 대부분을 작업실 앞 카페에서 보내는 나는 찾아가는 카페마다 어느새 단골이 되었다. 반포, 한남동, 연희동, 일산에 있는 이런저런 카페 주인들과 친해졌고, 카페를 운영하는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너무 잘 알게 돼버렸다. 카페 제리코의 백 마담 역시 결국 카페 문을 닫는다. 카페 문을 닫은 후, 백 마담은 먼 여행을 떠났다.

"백 마담은 시간에 익숙해지는 게 싫다고 했고 나는 시간에 익숙해지는 게 좋다고 했다. 하루속히 나의 생활에 푹 묻혀 내가 보이지 않게 되길. 어설프게 부유하는 이물질 따위 얼른 가라앉길 바란다. 틈만 나면 뜨개질을 한다. 엄마에게 멋진 카디건을 선물하고 싶어서. 나를 시간 속에 묻어버리기 위해서. 다음 주엔 기타를 사러 낙원상가에 가야겠다. 또다시 굳은살을 만드는 진통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조금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해 있겠지."

문득 내가 백 마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셔터를 내리고 '영업 종료'를 외치고 싶을 만큼 바쁜 시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가 지나온 세상의 카페들이 내 눈과 귀로 천천히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책을 다 읽고 자기 전, 차 한 잔을 마셨다. 허니 앤드 바닐라 카모마일 티. 추억 때문에 더 다정해지는 향과 맛이었다.

●잔―박세연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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