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막으려면 남자랑 둘이 있지마라?

이태동 기자 입력 2016. 4. 29. 03:08 수정 2016. 4. 2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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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황당한 '성교육 가이드'.. 학생들도 야유] - 이걸 만드느라 6억 썼다니.. 성차별적 내용까지 들어 있어 150곳 고쳤는데도 여전히 엉망

서울 강북의 한 고등학교 보건 교사 A(여·49)씨는 이달 초 파워포인트(PPT) 자료로 성교육을 진행하다 진땀을 흘렸다. A씨는 남녀 학생 단둘이 집 안에서 TV를 보고 있는 그림을 보여주며 "이럴 때 성폭력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하고 물었다. 학생들의 대답은 주로 "다른 친구를 불러요"라거나 "수시로 부모님한테 전화해요"였다. 하지만 교사용 지도안에 나온 정답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였다. A씨는 지도안에 나온 대로 학생들에게 얘기했다가 "당연한 얘기 아니냐"는 야유를 받았다.

이 PPT 자료엔 친구들끼리 여행을 갔다가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친구들끼리 여행가지 않는다'고 돼 있다. A씨는 "하나마나 한 얘기로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는 성교육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교육부가 초·중·고 학생용으로 만든 '학교 성교육 표준안'의 일부 내용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성교육 표준안은 일선 학교에서 학생들 나이에 맞춰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성교육 지침을 말한다. 교육부는 작년 3월 6억원을 들여 처음으로 이 표준안을 만들었고, 그해 9월에는 '청소년 교육용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은 부분과 오·탈자, 띄어쓰기 오류 등 150곳을 고쳐 개정안을 냈다. '여성은 특정 남성에게만 성적으로 반응하는 데 비해 남성은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성들과 널리 성교할 수 있다'는 부분 등이 청소년들에게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삭제됐다.

하지만 일선 교사들과 청소년 성교육 전문가들은 "개정안에도 여전히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고 지적한다. 중학교 교사용 지도안 220쪽에는 만원 지하철에서 성범죄를 당할 경우 '가방 끈을 길게 뒤로 멘다'거나 '실수인 척 (가해자) 발등을 밟는다'는 대처법이 소개돼 있다. 행복한성문화센터 배정원 소장은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경찰에 곧바로 신고하라고 가르치는 게 적절한 대처법"이라며 "정말로 저렇게 가르쳤다간 수업 집중도만 떨어뜨릴 것"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지도안 233쪽에는 '데이트할 때 주의해야 할 상대방의 말'로 '술도 깰 겸 비디오방에서 쉬었다가 가자. 아무 짓도 안 할게' '집에 가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야, 한 잔만 더 마시면 집에 보내 줄게'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익명을 요구한 고등학교 보건 교사 B씨는 "그럼 고등학생이 데이트할 때 술을 마셔도 좋다는 뜻이냐"며 "성인(成人)들에게나 가르칠 내용이지 고등학생용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고등학생용 지도서에 나온 '출산과 부모되기 준비'는 여성 단체로부터 성차별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이 지도서엔 '어머니는 적당한 운동과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아버지는 금연·금주를 하고 부모로서 자녀 양육과 교육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고 돼 있다. 한국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 이명화 상임대표는 "출산에서 여성은 신체를 제공하는 역할만 한다는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고 했다.

교육부는 현재의 성교육 표준안을 바탕으로 내년부터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새 표준 자료도 만들겠다고 예고했다. 일선 교사와 성교육 전문가들은 "유치원생 대상 자료를 만들기 전에 지금 있는 자료의 문제점부터 수정·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각계 의견을 모아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고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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