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시선]덕밍아웃, 해치지 않아요
[경향신문] 저녁 일정을 미루고 집에 일찍 들어왔다. 주말은 ‘위데이’, 바로 <위장자:감춰진 신분>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종영한 <태양의 후예>를 방영하는 수·목요일이 ‘태후 데이’였다던데, 내게는 ‘위데이’가 있다. 방영 시간을 챙겨가며 중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중국 드라마는 <포청천>과 <황제의 딸> 외에 본 것이 없었고, 편견도 심했다. 촌스럽고, 재미없고, 유치하고, 과장된 액션까지…. 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보게 된 <랑야방: 권력의 기록>이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리모컨을 돌리다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정주행을 하고도, 54화가 끝나는 순간 다시 1화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랑야방에서 정왕 역을 맡은 배우 ‘왕개(왕카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원래 드라마나 영화가 좋으면 반복해서 즐기긴 해도, 며칠 그러다가 넘어가는 편인데 이번엔 달랐다. 어쩌다 본 중국 드라마에서 이렇게 ‘덕통사고(덕후+교통사고의 합성어로 덕후가 된 계기를 뜻함)’를 당할 줄이야! 이 나이에 연예인을 좋아하게 되다니, 그것도 외국배우를!
배우 한 명이 좋아졌을 뿐인데 내 일상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일단 중국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다. 전혀 모를뿐더러 배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으니 말 다 했다. 공부한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가끔 알아듣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어찌나 기쁜지! 중국 뉴스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중국의 근대사에도 관심이 생기고 있다.
드라마가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중국의 항일운동을 다루고 있고, 주인공이 친일파와 국민당, 중공지하당을 넘나드는 3중 첩자로 설정된 덕에 뜻밖에 역사 공부까지 하고 있는 참이다. 그뿐인가?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도 가입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배우가 바쁘면 팬들도 덩달아 바빠지기 마련. 드라마 외에도 볼 게 많다. 매일 사진과 각종 영상이 업데이트되고, 체크할 사이트는 늘어만 간다. 2차 창작에 팬아트, 사고 싶은 굿즈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세상은 넓고 능력자는 많다는 말이 실감 난다.
친구가 김연아 선수의 마지막 경기라며 소치 올림픽에 다녀오는 걸 보면서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경기 한 번 보겠다고 러시아까지 가다니’…. 내 친구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간다. 왕카이가 서툰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영상을 처음 본 날, 하루종일 너무 기분이 좋았다.
퇴근하자마자 책상에 앉아서 영상을 틀어놓고, 그가 부르는 노래 가사를 받아적고, 뜻을 찾느라 끙끙대는 모습을 본 동생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다. 민망하긴 하지만 좋은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좋아하는 배우가 10년 무명의 세월을 견딘 힘으로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고, 응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겁다.
요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중드’ 영업은 물론이고, “이 배우에 빠져 산다”는 자랑을 잊지 않고 있다. 심드렁한 사람도 많지만, 의외로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나이를 먹을수록 모든 게 심드렁하고 너무 좋아서 설레는 감정도 느껴본 지 오래됐는데, 기쁨을 마음껏 드러내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나? 나 역시 누군가를 목적 없이 좋아하는 내 에너지가 다른 사람에게 닿는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선배 덕후의 책 <어쩌다 어른>에는 “좋아하는 것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시간, 나만 아는 기쁨을 점점 늘려가는 삶. 그것만으로 썩 괜찮아 보인다”는 구절이 나온다. 맞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초보 팬의 무(無)해한 덕질은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된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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