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Why] 어쩌면 꿈꾸기 위해 여행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백영옥·소설가 2016. 4. 2. 10:25
번역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 그 도시]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 할리우드

"잠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장면들을 너는 포착해야만 해. 잠은 현실의 그림자야. 현실의 무성영화야. 나는 잠을 살고 싶어. 내 잠을 찍는다는 것은 내 잠의 무성영화에 너도 함께 출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지금 나는 내 여행을 필름에 담으며 영화를 만들지만, 언젠가는 내 잠으로 이루어진 무성영화를 만들고 싶어. 제목은 '잠자는 남자'가 될 거야. 너는 내 잠의 인도자이며 내레이터가 되어야 해.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우리 사이에 형성된 무형의 계약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여행을 다니게 된다."

배수아의 여행 산문집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을 읽었다. 조르주 페렉의 소설 '잠자는 남자'를 모티브 삼은 이 여행기는 '잠'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 하는 독일인 영화감독과 배수아가 LA에서 보낸 일주일간의 기록이다. 남자가 카메라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담는 동안 그녀는 옆에서 페렉의 '잠자는 남자'를 읽는다.

그는 찍고 그녀는 읽는다. 사진 찍는 남자와 연애했던 내게도 더없이 익숙한 풍경이었다. 노을이 하늘 위로 가라앉기 직전 가장 좋은 빛을 포착하기 위해 말없이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이 만든 그림자를 바라보는 일이나 끝없이 달리고 멈추다가 길 위의 빈 모텔 안으로 흘러들어 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아 종일 찍은 사진을 확인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남자의 실루엣 같은 것들 말이다.

"할리우드 드림 호텔에 대한 엄청난 수준의 불만 리뷰가 수십개나 달려 있다. 더럽다, 더럽다, 더럽다…. 주차 공간이 없다, 분명히 늦게 도착한다고 말하고 밤 10시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새벽까지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다른 모텔을 찾아가야만 했다. 한여름인데 에어컨이 없어서 쪄 죽을 뻔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이 호텔에서 묵는 것은 시간 낭비다. 하룻밤이 지난 뒤 도망치듯이 떠나야만 했다. 객실에서 악취가 나서 견딜 수 없다, 끔찍하다, 여기는 호텔이 아니다, 이건 불법 시설물이나 마찬가지 수준이다, 등등."

처음 LA에 갔을 때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단연 할리우드였다. "이게 정말 할리우드?"라는 심정이었달까. '파리 쇼크'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내겐 할리우드가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일단 생각보다 너무 작기도 했고 길바닥에 찍힌 스타들의 손이라든가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각종 '맨'들이 풀 착장을 한 채 거리를 돌아다닌다는 걸 빼면 관광객들이 버글거리는 이 거리가 주는 매력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근처 라 브레아에서 힐링 센터를 운영하는 언니 덕에 자주 할리우드에 갔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새뮤얼 잭슨이 그곳의 단골이라는 말에 현관 리셉션 소파에 앉아 책을 읽다가 심심하면 동네 탐험을 나선 것이다. 덕분에 근처에 액팅 스쿨과 상점 이외에도 수많은 호텔이 빼곡히 그곳에 박혀 있다는 것 역시 알게 됐다.

"나는 불만 리뷰들 사이에 있는 호텔의 답변 속에서 이 호텔 로비가 몇몇 유명 무성영화 배우들의 촬영 현장이었다는 정보를 읽게 된다. 그중에는 채플린도 있다. 그의 어떤 영화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이곳은 무성영화 시대에는 멋진 호텔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아마도 비디오테이프의 시대에는 아침 식사 식당의 풍경도 아름답고 품위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호텔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급 호텔이든 싸구려 모텔이든 좋아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인데, 아무래도 규격 상품처럼 정형화된 공간에 대한 반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쩐지 '할리우드 드림 호텔'에는 가보고 싶었다. 대부분의 저가 호텔이 그렇듯 독서할 수 있는 램프조차 없어 안내 데스크까지 내려가 빌려야 하고, '인터넷 가능'이라고 적혀 있긴 하지만 로비가 아니면 인터넷이 거의 작동되지 않는 싸구려 호텔에 말이다.

아무래도 무성영화 시절을 거치며 갖게 된 이 호텔 특유의 쇠락한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쇠락이나 몰락, 폐허의 느낌을 찾아 모으는 나의 괴상한 수집벽을 이 호텔의 무너져내리는 벽과 화장실의 온수기가 자극한 것이다. 이 책을 만약 올해 초 서부 로드 트립 중에 읽었더라면 나는 분명 할리우드 드림 호텔을 찾아 몇 번이고 길을 나섰을 것이다. '스타워즈' 개봉 때문에 도로 곳곳을 통제한 할리우드를 걷다가 "아! 이게 정말 할리우드인가?"를 남발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도시 생활을 잊고 인적 없는 고요한 분위기에 온전히 잠긴 채 오직 두 사람이 함께 글과 필름으로 작업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간다. 그래서 차를 몰고 읍내의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는 일 따위는 없다. 머무는 내내 가져온 식료품만으로 식사를 해결한다. 오직 촬영과 독서 그리고 글쓰기에만 최대한 집중하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 메뉴를 궁리하지 않고 번거롭게 음식을 조리하지도 않는다. 오직 빵과 사과 그리고 약간의 스파게티 국수와 통조림 소스, 커피만으로 일주일을 보낸 적도 있다."

두 사람의 여행법이 마음에 들었다. '집필 여행'은 언제나 내 마음을 흔들었다. 2년이나 이탈리아를 떠돌며 글을 쓴 괴테나 글을 쓰기 위해 특정한 나라로 가는 행위 말이다. 나는 여행 중에 언제나 글쓰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고 온종일 머문 후 본격적으로 도시로 진입해 여행을 시작하는 것도 맘에 들었다. 이때 공항 근처의 호텔을 은유하는 '잠의 환승역'이란 말은 '집인 듯 집 아닌 곳'을 새롭게 명명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차 부적응 상태의 여행자라면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게 환히 보이는 호텔 방은 몽환적일 것이다.

"너에게는 9년 동안이나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여자가 일 때문에 홀로 떠난 여행 중에 갑자기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면서 너를 떠났다고 한번 상상해봐…. 그녀가 일년 쯤 지난 다음에 새로운 애인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겨서 다시 너에게 돌아왔다고. 그러면 너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여행 중 작가는 종종 잠자는 남자에게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여행을 하는 동안 쓴 작가의 단편이 실려 있다. 남자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또 다른 질문이다. 여행 중에 쓴 그 소설에선 유독 바람 냄새가 났다.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 배수아의 여행 산문집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