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짠맛·신맛·단맛 절묘하게 어우러진 간짜장

"에, 또, 우리나라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찬 바람 부는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던 3월의 둘째 날은 앞으로 다가올 학교 생활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갔던 중국집의 짜장면도 비슷했다. 나름대로 유명하다는 동네 중국집에서 아버지는 짬뽕 한 그릇에 반주 한잔을 하시고, 어머니는 식욕이 없다며 내가 시킨 짜장면을 나눠 먹던 그날 오후. 그 시간은 김영랑 시인의 시구처럼 찬란하지도, 엘리엇이 '황무지'에 묘사한 것처럼 잔인하지도 않았다. 대신 황사로 희석된 공기처럼 색이 바랬고 무미건조했다. 왜냐하면 짜장면이 맛없었기 때문이다.
"맛있니?" 나는 어머니의 질문에 "예"라고 답했다. 맛없다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짜장면 맛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휴일 없이 장사하시던 부모를 앞에 두고 맛 투정 부릴 용기도 없었으리라. 그 이후 나는 몇 번의 입학식을 마쳤고 시중의 맛있는 짜장면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때 먹었던 짜장면이 얼마나 맛이 없었는지를 알게 됐다. 경험이 쌓여 지금은 남들에게 짜장면 맛있는 곳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중 단 한 곳만 골라야 한다면, 이라는 질문은 나에게 너무 쉽다. 부산 중앙동 화국반점이다.
부산역에서 한 정류장 떨어진 원(原)도심 중앙동. 용두산 공원 밑 인쇄소 골목 언덕배기의 화국반점은 영화 '범죄와의 전쟁'과 '신세계'에 나오기도 했던 중국집이다. 한자로 빨갛게 쓰인 간판 밑, 문을 밀고 들어가니 인공 돌과 해초 사이로 금붕어들이 노니는 파란 수족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가한 평일 점심, 늘 이곳에서 점심을 먹으리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유니폼 차림의 사람들 사이로 객(客) 티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자리를 잡았다.
한 가지 메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내가 고른 것은 간짜장이었다. 전분을 섞지 않아 마를 건(乾) 자를 쓴 간짜장을 시키니 살짝 볶은 머리가 단정하고 말투가 공손한 아주머니가 보리차 한 잔을 두고 갔다.
큰 주전자 가득 보리차 끓여 놓던 시절을 추억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 틈에 단무지, 춘장, 깍두기가 나왔다. 단무지 두어개 끼적거리는 틈에 단정한 면과 까만 간짜장이 식탁에 올라왔다. 흔히 만나는 것에 비해 조금 양이 적은 간짜장이다. 노르스름한 면 위에 튀긴 듯 부친 달걀과 채 친 오이가 올라가 있다. 그 둘을 비비려다 보니 생소할 만큼 뻑뻑한 무게감이 이 집 간짜장의 남다름을 예고했다. 그다음의 일은 5분 만에 벌어졌다. 짜장면을 마시듯 입에 욱여넣었다. 밑간 된 고기, 살짝 아삭거리는 양파, 춘장의 짠맛과 신맛, 그 뒤로 스쳐가는 단맛, 마치 제갈공명이 천하삼분지계를 펼치며 이야기하던 솥의 세 다리처럼,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균형감에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5분 뒤 내 앞 그릇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제 나는 안다. 나의 부모가 그때 맛없는 짜장면을 사드신 이유는 당신들의 입맛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닐 여유와 시간이 없었을 뿐이었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또래였던 그분들. 푸른 젊음을 희생하고 남은 것이 나란 생각이 들 즈음, 짜장의 단맛이 가시고 쓴맛이 입에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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