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요리사가 무슨 연예인이가?"
"요리사 안 지겹습니까. 그놈의 쿡방인가 먹방인가 젊은 사람들 다 망치지 않았나예. 요리사가 연예인인 줄 알고 기들어온다 아닙니까."
김소희(51)의 첫 마디는 뜻밖에도 이랬다. 김소희는 2001년부터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장 예약하기 힘든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킴 코흐트(Kim Kocht·김씨가 요리한다는 뜻)'를 지휘해 온 요리사다. 이 나라 총리도 3개월 전 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만 음식 맛을 볼 수 있다는 식당이다. 그래서 그녀는 유럽서 '빈의 요리 여왕'이라고 불린다. 십수년 전부터 유명세를 타면서 오스트리아·독일·이탈리아의 각종 방송에서 요리를 선보였고 톱 셰프로 이름을 떨쳤다. 요즘 TV만 돌리면 나오는 '쿡방' '먹방' 열풍의 원조이자, 쏟아질 듯 넘쳐나는 우리나라 스타 요리사들의 대선배인 셈이다.
김씨는 그럼에도 방송 화법으로 말할 줄 몰랐다. 14일 경기 여주 한 TV 프로그램 촬영장에서 만난 그녀는 거침없는 부산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다. "요새는 얼굴 좀 빤빤하고 모양만 잘 내면 셰프가 되는 줄 아나 본데 도대체 다들 틀려먹었지예." 그러고 보니 그녀의 또 다른 별명이 생각났다. '단디 셰프'다. 몇 년 전 우리나라 방송에서 김씨는 분칠을 하고 나타난 요리사 지망생에게 "얼굴에 뼁끼칠 하지 말고 이거나 단디해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물론 음식이었다. "단디하라"는 이후 김씨의 유행어가 됐다. 요즘 그는 다시 우리나라 요리 서바이벌 방송에 심사위원으로 나온다. 아무래도 그의 말을 '단디' 들어봐야 될 것 같았다.
'단디 셰프', 쿡방을 꾸짖다
―요즘 다시 방송에 나오는데요.
"2년 정도 일이 너무 바빠서 방송을 쉬었는데 이번에 또 나와달라고 해서 고민하다 나왔어예. 내한테는 요리가 본업이고 방송은 사치거든예. 요리할 시간 뺏으면서까지 방송은 안 해예."
―부산 사투리 억양이 계속 화제던데요.
"무슨! 나는 많이 고쳤어요. 이봐, 지금도 '요'라고 끝내잖아요?(좌중 폭소) 몇 번 고치려 했는데, 잘 안 돼요. 오스트리아에서 서울말을 썼더니, '북한 여자냐'고 하는 거라예. 확 기분 나빠서 치아뿌렸지예."
―몇몇 네티즌은 '독설 아지매'라고도 부르고요.
"아무래도 좋아예. 근데 말입니다. 한국에선 그새 요리가 엄청 유행이 됐나 보지예? 요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요리사를 해보겠다고 하는 게 아니고, '요리사를 하다 보면 연예인처럼 살 수 있나 보다' 그런 생각으로 나온 아그들이 천지더만요. 머스마들이 얼굴에 분칠하고 성형까지 해서 나오고 말이지예. 그런 애들은 딱 보면 알아요. 말 더 섞을 것도 없어. 난 그냥 바로 보냅니다."
―집으로 그냥 돌려 보낸다고요?
"하모요. 요리사는 잔재주로 하는 게 아니라예. 이건 지독한 노동인기라. 나는 요새도 매일 17시간 18시간씩 주방에 붙어 서서 일합니다. 남들은 내보고 팔뚝에 근육 붙었다꼬 멋지다꼬 언제 운동했냐 카던데, 내는 운동 평생 해본 적이 없어예. 할 시간이 어딨습니까. 이건 다 죽어라 하루종일 프라이팬 흔들어서 생긴 근육이고예. 요리는 그래 하는 겁니다. 근데 분칠할 정신이 어딨겠습니까."
―요즘 워낙 요리사들이 인기이긴 합니다.
"내도 예전에 유럽에서 방송 많이 했지만, 방송은 잔인한 거라예. 변덕이 심해예. 지금은 내가 빠딱빠딱해서(독특해서) 재밌고 새롭다 어쩌네 하겠지만, 내년엔 하루아침에 헌신짝 될 수도 있는 거라예. 그런데 말입니다. 음식이라는 건 그렇게 순식간에 유행이 될 수가 없어예. 다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옷은 남이 입는 거 따라 입을 수도 있지만, 음식은 내 입으로 들어가는 거라서 먹기 싫은 건 못 먹는다고. 제일 솔직해지는 게 음식이에요. 근데 어떻게 그게 갑자기 유행이 되겠습니까. 다들 요즘 뭐가 맛있다고 이리저리 우르르 몰려다니던데, 정말 알고 먹나 싶어예. 그게 무슨 맛이고 왜 맛있는 건지. 요리사들만큼은 똑디 말해줘야 하는 거 아입니까. 이건 무슨 맛이다, 어디서 나온 맛이다, 이래 정확하게 말입니다."
―도전자들 음식 맛을 보고 혹평 많이 하시던데요.
"버터 넣고 생크림 넣고 설탕 넣고, 이게 요즘 인기인가 봐예? 그런 거 안 들어가도 신선하고 향긋한 식재료가 많은데, 왜 다들 그렇게 요리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꼭 청순한 아가씨를 확 다 뜯어고쳐서 성형을 있는 대로 시키고 유방에도 뭘 잔뜩 넣고 화장까지 떡칠해놓고 이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요즘 보면 젊은 셰프들도 다 그래 요리하고 있고, 그러니 다들 따라 하는 거겠지예? 그건 우리 음식이 아니에요. 우리는 원래 간결하고 담백하게 먹었다고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김소희는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네 살 때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부산 남포동에서 카페도 하고 수퍼마켓도 하면서 김소희를 키웠다. 단 둘이 마주하는 밥상에도 다섯 종류의 김치를 만들어 올리고, 각종 장과 젓갈을 손수 만들어 먹일 정도로 딸에게 극진한 어머니였다. 김씨가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갈 때면, 어머니가 영화를 미리 보고 '사전 검열'을 한 다음에야 딸의 관람을 허락할 정도로 보수적이고 또 열성적이기도 했다. 김씨가 부산여고 2학년 무렵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대답은 이랬다고 했다. "익은 호박에 씨도 안 들어가는 소리 마라!"
―왜 갑자기 유학을 가고 싶었나요.
"그때 느꼈거든요. '내가 사는 테두리가 짝다(작다)'고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보는데, 담뱃대 꽂고 파티하는 여자가 나오더란 말이죠. 나는 그때까지 생일 케이크는 미역국하고 쌀밥 사이에 놓고 묵는 건 줄로만 알았는데, 그 영화 보니 '케이크를 밥상에 놓지 않는 세상은 어떤 곳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꼬예. 어머니가 첨엔 음청 반대했는데 '야가 저 승질머리에 나중에 대학 가서 데모질하면 우짤꼬' 싶었던 것 같애예. 그래서 보내주셨던 거지예. 원래는 패션 공부 한다꼬 파리나 밀라노로 갈라캤는데 어쩌다 보니 오스트리아로 왔어예. '살아보고, 맘에 안 들면 옮기지 뭐. 일단 나가자,' 그래 생각하고 무작정 나왔어예."
김소희는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때 오스트리아로 건너와 헤업스트 슈트라세(Herbst Strasse) 패션·예술 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엔 자기 가게를 내고 의상 디자이너로 7년 동안 일했다.
―막상 외국 나와선 힘들었을 텐데요.
“왜 아입니까. 몇 번이나 돌아오고 싶었는데 이 악물고 버텼지예. 여자라서, 남자가 아니라서, 외국인이라서 여기서 적응을 못하겠다는 소리는 죽어도 하기 싫었으니까예. 이런 건 다 핑계거든? 나는 핑계 많은 사람이 싫어예. 패션 학교 졸업하고 내 브랜드 만들어서 가게도 차려봤어예. 천도 직접 만들고 연극 의상도 만들어주고 다 해봤는데 막판엔 이게 내 길이 아니다 싶더라꼬예? 그래서 먹는 걸 해보자고 맘 먹었어예. 내가 맨날 친구들에게 ‘음식도 좋고 친절하고 음악도 좋은, 그런 밥집이 없다’ 캤더니 다들 ‘말만 하지 말고 너가 보여줘’ 했거든. ‘그래? 그럼 내가 해보지 뭐.’ 그러고 시작했지예.”
1995년 김소희는 빈에 ‘소희 스시’라는 이름의 일식집을 열었다. 처음엔 운영만 하고 셰프를 따로 고용해서 썼지만 금세 내보냈다. “내가 성격이 괴팍해서 다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습니까.”
평생 어머니가 손끝에 물도 안 묻히고 키운 탓에 계란 프라이도 할 줄 몰랐던 그녀였다. 일단 연어부터 한 궤짝 샀다. 책을 펴놓고 하루 종일 회 뜨는 연습만 했다. 3주를 하니 회를 뜰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때 질리도록 연어와 씨름한 탓에 김소희는 지금도 연어는 아예 입에 못 댄다. 그렇게 요리사 자격증을 따고 주방장이 됐다. 그녀가 요리를 시작하자 가게 앞에 손님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김씨는 이 가게를 1년 반 운영하다 1998년 팔고 새로 식당을 다시 열었다. 변호사·회계사·컨설턴트와 손을 잡고 퓨전 콘셉트의 레스토랑을 열었는데 8개월 만에 망했다. 김소희는 “내가 그때 교만해져서 그렇다”고 했다.
―왜 망했던 거죠.
“요리를 안 하고 사업을 했으니까예(웃음). 다들 식당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돈을 벌고 싶어했어예. 잘 될 턱이 없죠. 땡전 한 푼 없이 빈털터리가 됐는데 유기농 수퍼마켓을 하던 친구가 자기를 좀 도와달래요. 거기 가서 6개월 일하면서 매출을 엄청 올려줬어요. 새벽 5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했거든예. 뭐가 잘 팔리나, 뭐가 부족한가 매일 분석하고 연구하니 장사가 잘 됐죠. 내가 또 이때 유기농 식재료에 눈을 떴어요. 퀴노아, 아마란스같이 요새나 유행하는 곡물을 그때 벌써 알았고예. 그걸 가지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죠. 세상엔 공게(공짜가) 없어예. 실패에도 성공에도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죠.
“2001년에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우울증이 2006년까지 갔지예. 어머니는 내가 한 음식 한 번도 못 먹고 돌아가셨어예. 파리 에펠탑도 보여드리고 싶었고 베니스도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그리 돌아가신 거라예. 내가 그래서 유골함을 안고 세계를 다니면서 엄마에게 못 보여준 것 다 보여드리고 나도 죽으려고 했어예. 근데 사람이 또 그렇게는 안 되더라고….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돌아보면 어머니는 내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스승님이었거든예. 어머니는 평생 ‘넌 뭘 해도 될끼다’ ‘내서 어쩜 니같이 잘난 딸이 나왔노’ 하셨어예. 내가 어딜 가도 긍지를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건 다 그 덕이지예. 근데 문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 말을 해줄 사람이 없는 거지예. ‘역시 내한테서 낳은 내 딸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데 못 듣는 거죠. 나중에야 이런 생각을 했어예. ‘내가 죽어서 엄마 옆에 가서 잘했다는 말 들어야 되지 않겄나. 이렇게 울고만 있으면 안 되겠다.’ 그래서 2001년 식당을 냈죠.”
그는 2001년 빈에 킴 코흐트를 열었다. 겉보기엔 서양식이지만 뿌리는 한식인 음식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상추쌈, 비빔밥, 약초 수제비, 비빔국수 같은 음식을 현지인 입맛에 맞게 담아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금세 열광했다. 유기농 재료를 쓴 건강식인 데다 맛까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식당엔 이제 오스트리아·독일·루마니아·태국·중국·한국인까지 수십 명의 스태프가 일한다. 김씨는 “얘네들에겐 웃긴 공통점이 있다. 다들 독일어로 말하는데 밥은 나와 함께 쌀밥에 김치를 먹는다. 처음엔 나 혼자 먹었는데 하도 빼앗아 먹어서 이젠 다 같이 먹는다”고 했다.
―킴 코흐트에 가면 셰프가 손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에 맞춘 요리를 해준다죠.
“맞아요. 3개월에 한 번씩만 예약을 싹 받았거든예. 아침에 문 열기 전 손님 명단부터 미리 봐요. 그날 오는 사람에 맞춰 새벽에 장을 봐놓고 손님 오기 7, 8시간 전부터 움직이면서 요리 준비를 하죠. 그러고 손님을 맞으면 어떤 손님은 그날따라 눈에 빛이 없어예. 그럼 내가 가서 그럽니다. ‘미안한데, 오늘은 당신 마이 먹으면 안 되겠다.’ 그러면 ‘왜?’ 하고 난리가 나겠죠. ‘당신 오늘 일 되게 많이 하지 않았냐. 근데 아직 성과가 없지 않냐.’ 이러면 ‘어떻게 알았냐’고 해요. 나는 그때 ‘이런 날 마이 먹으면 소화가 영 안 되니까 내가 딱 두 코스만 줄게. 돈은 아주 조금만 받을게. 대신 담에 오면 그땐 당신이 먹고 싶은 건 실컷 다 요리해줄게.’ 하는 거죠. 그런 손님은 나중엔 꼭 단골이 됩니다.”
―얼굴 보고 그런 걸 어떻게 알죠?
김소희는 대답 대신 불쑥 “결혼했어예?”라고 물었다. “남편이 집에 들어와서 가방 딱 놓는 것만 봐도 기분이 어떤지 알지 않나예? 맞죠? 그런 거라예. 사랑하면 알아예. 나는 손님을 사랑하거든요. 내 모든 시간이 그 손님을 위해 쓰여지고 하루종일 그 손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는데 그 사람 얼굴을 보고 기분과 상태를 모를 리가 있나요. 우리 어머니가 살아생전 내한테 했듯이 딱 한 사람의 손님을 위해 그렇게 열심을 다하는 거지예. 그게 진짜 요리사라고 난 믿어예.”
‘여자’를 넘어서는 길
명성이 커지면서 김소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빈에만 식당 5개를 운영했고 유럽 방송에 연달아 출연했다. 요리책도 20여권을 썼다. 그중 몇 권은 ‘요리책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는 ‘구어만드(Gourmand) 쿡북 어워드’에서 상을 받았다. 오스트리아의 유명 소믈리에인 남편 윌리 발란육(Balanjuk)과 결혼했고 한국에서도 방송에 종종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김소희는 “그런데 남편과는 작년에 이혼했다”고 털어놨다. 언론에 이혼 사실을 말하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왜 헤어지게 됐습니까.
“내가 바쁘니까 남편이 바람이 났심니다. 그 사람은 용서해달라고 지나가는 바람이었다고 했지만 그렇게 없던 일로 넘어갈 순 없었습니다. 호기심이다? 술을 먹었다? 나도 유럽에서 방송할 때 유혹하는 사람 많았고, 술도 먹었어예. 하지만 난 결혼서약을 굳게 지켰단 말이죠. 그건 약속이니까예. 결국 합의이혼을 그렇게 작년에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죠. 난 평생 일을 하면서 여자로서의 김소희를 낮추고 살았거든예. 발가락 보이는 구두도 안 신고, 살 안 보이도록 단추 다 잠그고 일했어요. 여자들이 날 보고 혹시라도 경쟁심을 느끼면 남자들이 ‘김씨네 가서 밥 먹자’고 하겠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터지니 괜히 그동안 잘못 산 것 같은 겁니다. ‘너 일만 하더니 꼬라지 좋다.’ ‘너가 너무 잘나가니 남편이 그러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그때부터 괜히 화장도 하고 못하던 술도 마시고 하이힐도 신고 다녔어예. 근데, 그러고 나니 말이라예, 음식이 영 맛이 없는 깁니더…. 요리를 도통 할 수가 없더라고예.”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먼저 가게를 싹 정리했지요. 일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예. 5개 중 4개를 팔고 남은 하나는 레노베이션을 시작했어요. 근데 그 무렵 내가 욕실에서 미끄러져 넘어졌어요. 팔이 크게 다쳐 피가 콸콸 났고예. 일단 지압을 하는데 춥고 몸이 덜덜 떨리더라꼬. 그때 정말로 맨 먼저 드는 생각이 놀랍게도 이랬어요. ‘아, 내가 혼자구나. 남편이 없으니 이렇구나….’ 근데 바로 다음 순간 정신이 듭디다. ‘뭐야, 아니야. 남편이 있었어도 출장을 갔을 수도 있고, 내가 혼자 호텔에 있었을 수도 있어. 이것과는 아무 상관없어! 김소희, 정신 차려. 너는 강한 사람이야.’ 마음의 병이 그 이후로 나았습니다.”
―멋지네요.
“작년 9월 초엔 가게를 다시 열었어예. 한국 사람들이나 미국 사람들이 그동안 ‘킴 코흐트’란 가게 이름을 좀 어려워했거든예. 그래서 새로 ‘킴(Kim)’으로 이름을 바꿨지예. 유니폼 바꾸고 메뉴도 재정비했고예. 가게에서 파는 소금이나 양념, 멸치볶음 같은 제품도 인기가 꽤 있는데, 그 제품 상표도 다시 만들었어예. 이름이 ‘김치(Kim Chi)’라예. ‘치(chi)’가 기(氣)의 중국어 발음이어서, 외국에선 그렇게 통하거든요. 김치는 다시 말해 ‘김소희의 에너지’가 되는 거지예.”
―그럼 이젠 음식이 다시 맛있습니까.
“(희미하게 웃으며) 네…. 지금은 다시 요리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내 본질인 김소희로 돌아왔지 싶습니다. 재료를 보면 요리하고 싶고 만들고 싶고 안에서 다시 몽글몽글 솟아 오르네예.”
―그렇게 마음을 회복해 나갈 무렵엔 무슨 음식을 먹었습니까.
김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치는… 아니었어요. 그때 내겐 너무 세고 강한 음식이었거든예. 심심하게 물김치를 담가 먹었어예. 쌀밥에. 그렇게 천천히 씹고 넘기고, 그러고 나았어예….”
―이제 쉰을 넘기셨죠.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까.
김소희의 눈빛이 조금 아득해졌다. “내는 원래 입으로 먼저 계획을 말하는 사람이 아이네요. 행동으로 보여드릴래예.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겁니더. 우리 어머니는 죽기 전 내게 그러셨어예. ‘니를 위해 살라’고. ‘가슴으로 니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라’고요. 그 이후로 내는 힘들 때면 속으로 이래 욉니다. ‘엄마, 내도 언젠가는 그 옆에 갈 거라예. 남 부끄럽지 않게 살다 갈 테니 기다리소.’ 그때가 되면 다시 그 말 듣고 싶어예. ‘니는 역시 내한테서 난 내 딸이다. 잘했다.’ 그날을 위해서 내는 넘어지지 않고, 혹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꼬장꼬장하게 살 깁니더. 한번 사는 인생, 단디 사는 거지예. 아입니까?” 이상했다. 그녀가 말을 단디 할수록 코끝이 시큰했다. 꼭 물김치 맛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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