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억의 야생화 이야기(9)-얼레지] 산 위에서 하늘정원을 만나다

2016. 3. 6.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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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분류학자 유기억교수가 들려주는 야생화 이야기,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림=홍정윤. 얼레지>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산을 오르다 보면‘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다’는 후회가 밀려들기도 한다. 산행으로 힘이 들 때는 주변에 볼 것이라도 많으면 그나마 피곤함이 줄어드는 느낌이다. 산 아래에서 흔하게 보이던 식물들이 줄어들고 새로운 식물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면 이미 꽤 높이 올라온 셈이다. 이쯤 되면 작더라도 좀 특별한 것이 반겨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발 1,000미터 가까이 가면 산행의 힘듬을 말끔하게 씻어 주는 아름다운 식물이 보인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큰 군락을 이루어 숲 속 꽃밭의 장관을 펼쳐 놓는다.

얼레지(Erythronium japonicum)가 그 주인공으로, 이른 봄 고산 지대에는 아직 새싹이 돋아나지 않아 황량하기만 한데 가냘프지만 커다란 꽃송이를 꽃줄기 끝에 내달아 매력을 한껏 뽐낸다. 멧돼지란 놈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땅속 깊은 곳 얼레지의 비늘줄기를 찾아 파헤쳐 놓은 흔적도 보인다. 마치 밭을 갈아엎어 놓은 것처럼 요란하다.

시기를 잘 맞추면 숲 속 비탈 전체를 뒤덮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군락을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그 속에 앉아 있노라면 신선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행복해진다. 수줍은 듯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개체가 있는가 하면 자기를 봐 달라는 듯이 고개를 들고 피어 있는 것도 있다. 꽃잎은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동여맨 듯 단정한 모습으로 대부분 가족끼리 모여 자란다.

속명 ‘Erythronium’은 붉은색을 뜻하는 그리스어 ‘erythros’에서 유래되었으며, 종소명 ‘japonicum’은 일본에 분포한다는 뜻이다. 붉은색 꽃의 화려함이 학명으로 잘 표현된 종류다.

그런데 우리 이름 얼레지는 잎에 얼룩이 진다고 해서 붙였다는데 순수한 우리말이라고는 하나 아쉬움이 좀 있다. 지방에서는‘얼네지’, ‘가재무릇’이라고도 하는데, 과실의 모양 때문인지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an Adder’s Tongue Lily’ 또는 ‘a Dogtooth’라고 부른다. 얼레지와 달리 꽃이 흰색으로 피는 흰얼레지는 별도의 품종으로 보고되어 있다. 얼레지 씨에는 개미의 애벌레와 비슷한 냄새를 가진 엘라이오솜(Elaiosome)이란 물질이 들어 있어서 씨가 땅에 떨어지면 개미가 씨를 옮겨 퍼트린다.

나는 한동안 얼레지를 유명한 원로가수를 일컫는‘엘레지의 여왕’의 엘레지와 같은 뜻으로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을 쓰기 전까지 그랬다. 꽃이 너무 아름답고 특이하게 생겼으므로 그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름을 빌려 쓴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다. 얼레지는 식물의 이름이고, 엘레지는 프랑스어‘elegie’의 우리식 표기다. 외국어라 ‘엘러지’나 ‘엘리제’로 발음하기도 하는데, 비가(悲歌) 또는 애가(哀歌)로 번역된다. 그 가수가 부른 노래의 곡조나 가사가 너무 애절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마터면 예쁜 꽃의 모습이 슬픔을 의미하는 식물이 될 뻔했다.

얼레지는 예로부터 비늘줄기와 잎을 식용하는 산나물로 유명하다. 특히 흰색의 비늘줄기에는 녹말이 풍부하여 ‘얼레지가루’라는 상품이 나올 정도로 널리 이용된다. 한방에서는 비늘줄기를 차전엽산자고(車前葉山慈菇)라 하여 변비 치료에 쓴다.

얼레지의 잎과 비늘줄기는 식용하기 때문에 이른 봄이면 수난을 당하기 마련이다. 산나물을 재료로 하는 식당에서는 얼레지가 기본 반찬에 속한다. 잎을 쌈으로 먹거나 절이거나 삶아서 묵나물로 이용하기 때문에 계절에 상관없이 사용하므로 수난의 강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얼레지의 씨가 발아해서 잎을 내고 꽃이 피려면 적어도 7∼8년은 기다려야 하는데, 그래도 봄나물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유기억 yooko@kangwon.ac.kr 강원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이며, 식물분류학이 전공인 필자는 늘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면서 숲 해설가, 사진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야생화를 주로 그리는 부인 홍정윤씨와 함께 책 집필 뿐 만 아니라 주기적인 전시회를 통해 우리나라 자생식물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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