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바구'가 흐르는 따뜻한 골목
‘이바구’는 부산 말로 ‘이야기’를 뜻한다. 기차역과 선박항이 있는 부산 동구에는 ‘이바구길’이 여섯개나 된다. 그중 부산역 앞 초량이바구길에는 골목마다 계단마다 사연들이 흐른다. 여행자를 맞이해주는 어르신들이 있는 곳, 옛날 이야기 들으며 걷는 길이다.

| 초량이바구길 |
◆할아버지·할머니 옛날이야기
“자, 여기가 옛날엔 백제병원이었는데….”
168계단 아래에는 웬 판잣집이 있다. ‘168도시락국’이라는 간판을 보고 식당이구나 싶어 들어가면 옛날도시락과 시락국밥, 쇠고기국밥을 판다. 밖에서는 판잣집 같았는데 깔끔한 내부가 반전이다. 늘 할머니 두 분이 손님을 맞이한다. 어르신 14분이 서로 교대하며 이 집을 지키는데, 최고령 할머니가 83세다.
168계단을 올라가면 또 판잣집이 있다. 그러고 보니 ‘168도시락국’과 디자인이 엇비슷하다. ‘625막걸리’라는 이곳은 오후 3시부터 문을 여는 막걸리집이다. 어르신이 만들어 주시는 안주에 술 한잔도 좋은데 가격 또한 고마워서 황송할 지경이다.
“뭐 많이 봤소?” 하고 말을 건네는 어르신은 자연스럽게 골목이야기를 풀어내신다.

| 168도시락국 |
그러고 보니 이 길에서 어르신을 참 많이 만난다. 하나같이 일하는 어르신이고 여행자에게 친절히 말을 걸어 주셨다. 비밀은 ‘이바구길 융·복합노인일자리사업’이었다. 옛 이야기가 있는 작은 골목에서 그곳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마을 어르신이라는 건 참으로 당연하고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인터넷 정보로는 느낄 수 없는, 살아 숨쉬는 이야기가 여행을 특별하게 만든다. 여기에 게시판과 지도를 찾아보는 수고를 덜어주는 건 덤이다.
◆골목골목 이어지는 이야기 보따리
초량동 앞은 부산항이고 부산역이다. 이곳을 통해 많은 사람이 들어오고 나갔다. 6.25 때도 그랬다. 1.4 후퇴 때 내려온 피난민들이 터를 잡은 곳 중 하나가 바로 이곳 부산항 근처의 초량동이다. 한때 부산역 앞은 ‘텍사스촌’이라 하여 최고의 유흥가이기도 했다. 지금도 차이나타운 쪽에 남아 있는 러시아 상점들이 50~60년대 꽤나 흥청거리던 그때를 말해준다. 이바구길은 이 거리를 지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바구길 시작점쯤에 있는 오래된 건물이 백제병원이다. 이것은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으로 1922년 한국인 최용해가 설립했다. 100년이 다 돼 내부는 낡았지만 지금도 빨간 벽돌 건물이 위풍당당하다. 그때만 해도 1, 2층의 낮은 건물들 사이에 우뚝 선 5층짜리 건물이었으니 당연히 일대의 볼거리였을 것이다. 백제병원은 서양의료진을 갖춘 부산 3대 병원이었지만 폐원 이후 중국요리집, 일본 장교 숙소, 치안대사무소, 중국영사관, 예식장 등 세월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었다. 급기야 1972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불탔고 5층은 철거됐다.
백제병원 뒷담으로 남선창고터가 있다. 1900년 바닷가에 세워진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창고다. 초량이 매립되면서 창고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셈이니 초량동 언덕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태를 보관해 ‘명태고방’이라고도 불렸고 ‘부산 토박이 치고 남선창고 명태 눈알 안 빼먹은 사람 없다’는 말도 있었다. 명태가 귀한 요즘, 담장만 남은 창고 터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인물사 담장에서 이경규·박칼린을 비롯한 초량초등학교 출신 스타와 부산 동구가 배출한 사람들의 면면을 둘러보고 길 따라 골목을 오르다 보면 마침내 좁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앞에 다다른다. 그 유명한 168계단이다. 옛날에는 부산항으로 내려오는 가장 빠른 길로 통했다.
계단 중간쯤에 ‘김민부전망대’가 있다. 김민부는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로 시작하는 유명한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가이자 방송인이었다. 이곳의 풍경, 즉 부산역에서 이어지는 부산 시내와 부산항, 부산항 다리, 왼쪽으로 영도 봉래산이 애잔한 노랫말의 정서와 무언가 통하는 듯 느껴진다. 계단을 다 올라와 언덕 꼭대기쯤에 이바구 공작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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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부전망대 |
이곳에서는 이 지역에 관한 상설·특별 전시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열심히 올랐으니 한숨 쉴 수 있는 쉼터라 좋다. 2층에 부산 동구의 영화 이야기들이 전시돼 있는데, 포스터와 전시물 사이로 시원한 통창이 뚫려있어 초량동이 시원하게 내다보인다.
이렇게 마을을 다 오르면 찻길이다. 아, 지금까지 숨을 참으며 좁은 골목길을 올라왔는데 버스가 다니는 찻길이라니! 어차피 걷기 여행이니 너무 억울해 하진 말자. 여기가 바로 산복도로다. ‘산의 중턱을 지나는 도로’라는 뜻처럼 산 위로 뚫린 길이다. 이곳 역시 피난민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바구길이 항구 쪽에서 수직으로 이어지는 걷기 길이라면 산복도로는 이바구길들 끝을 연결한다. ‘산복도로 버스투어’를 운영한다니 다음 번에는 버스를 타고 이 길을 다녀봐야겠다.
높은 곳에 서니 집집마다 옥상이 보인다. 집에서 쓰지 않는 것들이나 고추장독, 된장독 등이 나란히 올려져 있다. 빨랫줄에는 어제 입었던 일바지가 펄럭인다. 사다리를 놓고 오르는 작은 옥상에 치우지 않은 역기 의자가 보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의자 부분의 스폰지가 터져 나오고 심하게 녹슨 모양이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은 고물이 됐지만 누군가는 바벨을 들고 부산항을 내려다 보며 꿈을 꾸었을 것이다. 건강한 청년이었겠지….
계단 위로는 모노레일 공사 중이다. 공사가 완공되면 이 골목은 상대적으로 더 예스럽고 빈티지한 느낌이 들 것 같다. 골목의 오래된 것들도 치우지 않고 그냥 놔두면 좋겠다. 이곳에서 많은 이야기가 들리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은 다정히 말을 걸어 주시고 낡은 물건들은 여행자에게 속삭인다. 조근조근 따뜻한 이야기, 골목을 걷는 즐거움이다.
[여행 정보]
초량이바구길 가는 법
걷기 여행이므로 부산역 주변에 차를 놓고 걷는다.
초량이바구길 시작점: 부산역 맞은 편 종합안내판
[대중교통]
부산역
부산광역시 동구 문화관광
문의: 1330
http://tour.bsdonggu.go.kr
이바구자전거
문의: 070-8224-0122 /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 206
부산역에서 출발하면 1시간~1시간30분 걸린다.
이용요금: 일반·청소년 1만5000원 / 어린이(초등학생) 7000원
김민부전망대
문의(매점): 070-4229-1466 / 부산광역시 동구 영초윗길26번길 14
매점 이용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연중무휴)
커피 1000~2000원 / 허브티 2000원 / 식혜 1500원
이바구공작소
문의: 051-468-0289 / 부산광역시 동구 망양로 486번길 14-13
이용시간: 오전 9시~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 음식
168도시락국: 이바구길 168계단 아래 추억의 도시락과 시락국을 파는 식당이다. 시락국은 부산말로 시래깃국을 뜻한다.
추억의 도시락 4000원 / 시락국밥 4000원 / 소고기국밥 5000원
부산광역시 동구 영초길 191 / 오전 11시~오후 8시30분
6.25막걸리: 168도시락국과 함께 이바구길 어르신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다. 가격도 저렴하고 할머니 손맛을 느낄 수 있는 메뉴라 정감 있다.
김치전 3000원 / 오뎅탕 5000원 / 오징어무침 6000원
010-2047-2070 / 오후 3시~오후 9시
초량불백: 초량동 야시장에서 조금 더 언덕을 올라가면 불고기백반 골목이 있다. 그 중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백반집이다. 1인분 주문도 가능하고 반찬이 풍성하다.
불백정식 7000원 / 가정식정식 7000원 / 낙지볶음 7000원 / 김치찌개 6500원
051-464-0454 / 24시간 영업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667-8
● 숙박
이바구충전소: 이바구길 어르신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운영하는 체험 및 숙박 공간으로 이바구공작소 아래 위치해 절벽마을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 있다.
예약문의: 051-467-7887 / 부산광역시 동구 영초윗길 25
도미토리(1인) 1만5000원 / 객실 3만~6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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