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자가 깜짝 놀랐어요, 진짜 사과 못 받았냐고

입력 2016. 2. 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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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 백남기씨 두 딸의 석 달

85일째 혼수상태에 빠진 아빠
백남기씨 두 딸이 보낸 3개월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아스팔트 위에 백남기(69)씨의 옷을 펼쳐 놓았다. 그는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가했다가 물대포에 맞고 쓰러진 농민이다. 백씨의 딸 도라지(33)씨는 설을 앞둔 지난 2일 아버지의 옷을 품에 안고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앞에 앉아 있었다. ‘아빠 백남기’는 아직도 혼수상태다. 도라지씨는 아버지가 병원에 실려오기 전까지 입고 있던 이 옷을 소중하게 보관해왔다. 경찰이 아버지가 입은 피해에 대한 진상조사를 하러 올 때 건네주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관심이 없다. 대통령의 사과도 없다. 잠바와 바지, 운동화는 지난해 10월6일 아버지의 69번째 생신 때 도라지씨가 직접 사드린 선물이었다. 파란 조끼는 농민회 옷이다. 아버지는 분명 국가 공권력에 의해 쓰러졌는데 다 해진 아버지의 옷에 가슴 아파하고 눈길을 주는 국가는 없다. 도라지씨는 아버지의 옷을 지난 2일 <한겨레>에 건네 사진 촬영을 도왔다. 백남기씨의 두 딸인 도라지씨와 민주화(29)씨를 지난 2개월여간 만나 이들이 어떤 일을 겪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폈다. 국가 폭력 피해자 가족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건강했던 아버지가 쓰러졌다. 2015년 11월14일 오후 7시께 서울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였다. 이날 전남 보성에서 올라온 68살 농민이자 세 남매 아버지가 쓰러진 소식을 언론도 전했다. “경찰 과잉 진압 논란…농민 1명 사경 헤매”. 건조한 제목의 이 보도는 그러나 쓰러진 아버지의 가족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11월14일은 민중총궐기대회라고 이름 붙여진 집회가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날이었다. 아버지는 쌀 80㎏ 한 가마의 산지 수매가격이 대통령의 약속(21만원)과 달리 여전히 13만6000원인 현실에 항의하고 싶었던 농민이었다. 경찰 차벽 앞으로 다가갔고 살수차가 뿌린 물에 맞았다. 약 20초간이었다. ‘물에 맞았으면 옷이 젖어야지 어떻게 의식을 잃을 수 있나?’ 병원으로 달려온 자식들은 처음에 이해되지 않았다.

‘경찰 물대포 피해자’ 백남기씨에게는 두 딸이 있다. 민중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백도라지(오른쪽)씨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이름의 백민주화(왼쪽)씨다. 딸들은 매일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을 찾아 아버지를 살펴보았다. 백민주화씨는 지난해 12월21일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사진은 백남기씨의 두 딸이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근처를 산책하고 있는 모습. 민주화씨가 네덜란드로 떠나는 날 아침에 촬영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가장 슬픈 명절

아버지가 쓰러질 당시를 찍은 영상을 한 언론이 며칠 뒤 공개했다. 살수차는 물을 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을 향해 공격했다. 아버지는 물공격을 받고 바닥으로 쓰러졌고, 머리에서 피를 흘렸고, 눈을 감았다. 동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는 그 순간에도 살수차의 공격은 계속됐다. 사람들이 경찰 살수차를 왜 물대포라고 부르는지 그제서야 아버지의 자식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 얼른 일어나요. 손주 안 보고 싶어요? 지오(손자 이름)랑 놀아줘야지.” 큰딸 백도라지(34), 둘째 아들 백두산(31), 막내딸 백민주화(29)씨는 오늘도 의식이 없는 아버지를 위해 기도한다. 아버지 백남기(69)씨는 85일째(6일 기준)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오는 8일은 설이다. 백남기씨의 가족들은 이날 떡국을 함께 먹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지금껏 지내왔던 명절 중 가장 슬픈 날이 될 것만 같다.

악몽 같던 그날로부터 37일이 지난 2015년 12월21일 백남기씨의 두 딸은 다소 차분해져 있었다. 겉으로는 그랬다. 가끔 웃었고, 밥도 잘 먹었다. 기자는 백남기씨의 딸들을 이날 처음 만났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 혹은 그 가족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그들은 누구를 만나고 무슨 생각을 하며 보내게 되는지 살펴보고 싶다고 청했다. “저희도 어떻게 하면 잊혀지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이에요.” 기자의 전화를 받은 백도라지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백남기씨는 여전히 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백씨의 쾌유를 비는 것이 이들 가족만의 일이어야 할까. 이들이 맞닥뜨린 비극은 사회적이다. 백남기씨를 쓰러뜨린 것은 국가이고, 그 국민의 안위를 보살필 책임은 국가에 있기 때문이다. 기록하지 않는 폭력은 재발하고, 기록하지 않는 아픔은 잊혀진다. 백남기씨와 그 가족들에 대한 기록은 개인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록이어야 한다. 지난해 12월부터 백도라지씨 등 백남기씨 가족을 두 달에 걸쳐 만났다.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본관 3층 중환자실 앞 복도는 환자의 가족들로 북적인다. 어깨는 물기 빠진 이파리처럼 축 늘어져 있고 얼굴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다. 닫혀 있던 중환자실의 문이 열리면 환자를 품에 안은 침대가 나온다. 풍선 같은 인공호흡기가 환자의 품에 혹처럼 붙어 있다. 환자의 가족들은 침대에 손을 얹고 침대를 밀고 간다. 사람이 많아 북적이지만 모두 숨죽이며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병원 중환자실 앞이다.

“안녕하세요. 제가 백민주화입니다.” 21일 오전 백남기씨의 막내딸 민주화씨가 중환자실 앞으로 나왔다. 이어 큰딸 도라지씨가 같이 나왔다.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었다.

백민주화씨는 네덜란드에 살고 있다. 그는 1월28일부터 이달 7일까지 로테르담 중앙역에서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1인시위를 벌였다. 백민주화씨 페이스북 갈무리

이날 민주화씨는 네덜란드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주화씨는 네덜란드에 살고 있다. 네덜란드로 어학연수를 갔다가 그곳에 정착했다. 결혼도 그곳의 남성과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쓰러졌단 소식을 듣고 11월18일 급히 귀국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 두고 온 30개월 아이도 있고 해서 이제는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야 한다. 이날 오전 10시 아버지를 면회한 민주화씨는 아버지에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인사를 나눴다.

‘아빠. 제발 누워 계신 동안만큼은 편안히 계세요. 꿈을 꾸실 수 있다면 손주를 꼭 보세요. 언젠가는 하늘나라에 가시겠지만 부디 그때까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면 해요.’ 민주화씨는 눈물을 쏟았다. 울음은 시도 때도 없이 나온다.

“아빠가 살이 많이 빠졌어요. 혀와 입술이 바싹 말랐어요. 입을 벌리고 누워 계세요. 며칠 전부터는 기관지를 뚫어서 그곳으로 음식물을 넣고 있어요. 오늘 아빠 두 손을 꼭 잡아드렸어요. 아빠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꼭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신 것 같았어요.” 민주화씨의 페이스북에서 보이던 ‘아빠 백남기’의 모습은 막내딸과 전화할 때마다 “세상을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딸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상함이었다.

백남기씨의 뇌는 아직 부어 있다. 수술 뒤 두개골을 아직 닫지 않은 상태다. 피부를 꿰매어 그냥 덮어놓은 상태라고 한다. 의식은 없지만 분명 살아 계신다. 그게 가족들에겐 실낱같은 희망이다.

2015년 11월1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 15만명이 운집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학생과 교사들, 노동법 개정에 맞선 노동자들, 쌀값 폭락에 항의하는 농민들이 모였다. 백남기씨는 그중 한명이었다. 백씨는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 42기동대 1제대 기동버스 앞쪽에 있었다. 경찰버스는 버스가 아니라 광화문광장으로 통하는 길을 막는 ‘차벽’이었다. 시위대는 밧줄을 묶어 차벽을 잡아당겼다.

오후 7시1분께 시위대에 함께 있던 백남기씨가 경찰버스 앞으로 나타났다. 그 역시 밧줄을 당기려 했다. 경찰이 직사한 살수에 맞아 1m 정도 뒤로 넘어졌다. 살수차와 백씨 사이 거리는 20m 정도였다. 직사살수 시 수압은 2500~2800rpm(아르피엠·펌프 등의 1분간 회전 속도) 정도로 운용됐다고 경찰은 밝혔다. 직사로 맞을 경우 성인 남성이 가만히 서 있기 힘든 정도의 수압으로 알려져 있다. 시위대가 20m 거리에 있는 경우 2000rpm 내외로 살수하도록 한 경찰 내규 ‘살수차 운용 지침’과 어긋나는 수치다. 백씨는 병원에 실려갔다.

2015년 11월14일 오후 7시께
물공격 받고 쓰러진 백남기씨
85일째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큰딸 도라지씨가 곁을 지킨다
아빠는 의식 없지만 살아계신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쾌유만 기원
대통령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마치 지난해 없었던 사건처럼
큰딸 도라지씨는 오는 27일부터
‘도보순례’에 참여할 예정이다

백도라지씨가 2일 아버지 백남기씨 병실 앞에서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입고 있었던 옷을 매만지며 아버지의 쾌유를 빌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이젠 국가가 느껴져요”

경찰 책임론이 일자 강신명 경찰청장은 11월23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 출석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쾌유를 기원드린다”는 말만 할 뿐 사과를 하지 않았다. 강 청장은 야당 의원들의 추궁에 “결과가 중한 것만 가지고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성적이지 못하다”며 버텼다.

“정부가 사과를 안 하는 게 앞으로 너희들 시위하면 이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하는 거 같아요.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거죠? 이건 독재예요!” 민주화씨는 한국 사회를 네덜란드와 비교하게 된다. 네덜란드에서는 6~7년 전 훌리건들이 경찰서를 습격해 한 경찰관을 위협했다. 경찰이 방어를 하다 총을 쏴서 훌리건 한명이 숨졌다. 경찰의 행동은 정당방위로 인정받았지만 로테르담 경찰청장이 사임했다. 경찰이 더 잘 대처하지 못한 것에 책임을 진 것이다. 민주화씨는 우리 정부의 대응이 왜 네덜란드와 달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대통령이 사과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정부로서도 상황을 파악하는 단계일 수도 있다. 언니 백도라지씨는 10년 전 노무현 정부 때 벌어진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대통령이 사과를 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2005년 11월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전국 농민대회가 있었다. 농민들은 쌀 개방 반대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강경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 전용철·홍덕표씨가 경찰 방패에 맞거나 밀려 넘어지며 숨졌다. 당시 여야 정당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모두 정부를 질타했다. 청문회도 열렸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사고 42일 만인 2005년 12월27일 대국민 사과를 했다. 허준영 당시 경찰청장은 사퇴했다.

2015년 12월21일. 백남기씨가 쓰러진 날로부터 37일이 지났다. 백씨 가족들은 노무현 정부 때처럼 대통령의 사과를 기다렸다. 며칠 전 세월호 희생자 가족 ‘유민 아빠’ 김영오(48)씨가 백씨 가족을 만나고 돌아갔다고 민주화씨가 전했다. “이 나라와 싸움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하셨어요. 놀러 가다 사고 났는데 국가에 뭘 원하느냐는 비아냥을 듣는 게 힘들대요.” 백남기씨 가족도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까. 시위하다 다친 건데 뭘 원하는 것이냐고. “여기는 북한이 아니에요. 시위는 죄가 아니죠!” 민주화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해가 바뀌었다. 백민주화씨는 네덜란드로 떠났고, 동생 백두산씨는 주로 보성 집을 지켰다. 경기도 파주에서 출판 편집일을 하는 백도라지씨가 아버지 곁을 지켰다. 1월4일 오후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도라지씨를 다시 만났다. 이날까지도 대통령의 사과는 없었다. “복면 시위는 못 하도록 해야 한다. 아이에스(IS·테러 집단 이슬람국가)도 그렇게 지금 하고 있다”는 11월25일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이 민중총궐기 시위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었다.

“(아버지 입원 이후) 경찰이 다녀가긴 했어요. 혜화경찰서 정보관이 찾아오고 며칠 뒤 서울경찰청 정보관이 찾아오더라고요. ‘위에서 찾아오고 싶어 한다’면서. 저는 사과하러 오는 거 아니면 올 필요 없다고 했어요.” 이후 경찰은 계속 찾아왔지만 더이상의 제안은 없었다. 찾아오는 목적은 ‘피해자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피해자의 동향 파악’인 듯했다.

대통령의 방문 대신 문재인 의원 등 야권 정치인들의 발길만 이어졌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12월25일 오셨어요. 제가 피해 가족으로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박근혜 정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참 많다’고 말하고 돌아갔어요. 서울시 인권담당 조사관에게 조사를 시키겠다고는 하셨는데 아직 따로 연락받은 건 없어요.”

안철수 의원도 12월31일 조용히 다녀갔다고 한다. 국회에서 책임지고 진상을 밝혀내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고 도라지씨는 전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 등도 다녀갔다. 아직까지 새누리당에서는 누구도 백씨 가족들을 위로하고 돌아간 의원은 없다.

아버지의 상태는 여전히 그대로다. 외상성 경막하 출혈. 뇌를 싸고 있는 막 밑에 출혈이 있단 뜻이라고 한다. 이게 아버지의 진단명이다. 생명이 위독한 상태는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인공호흡기를 뗄 수도 없는 그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얼마 전 폐렴 증상을 보여 추가 치료가 이어졌다. 도라지씨의 표정이 어둡다.

“예전에 제게 국가는 공기 같은 존재였어요. 공기는 가장 필요한 건데 사실 잘 느끼지는 못하잖아요. 소리 없이 제 역할을 하는 존재죠. 국가도 제게는 그런 거였어요. 그런데 이제는 국가가 느껴져요. 뭔가 잘못된 방식으로요. 대통령이 시위에 나온 국민을 테러범처럼 지칭하고 국민을 국민과 비국민으로 가른다는 느낌이 들어요. 우리 가족은 더이상 국민 취급을 못 받는 것 같아요.” 백씨는 팔짱을 낀 채 풀지 않았다.

80년 5월 알린 독일 기자처럼

도라지씨는 <허핑턴 포스트> 미국판 기자와 온라인 화상 인터뷰를 했다고 전했다. <허핑턴 포스트> 기자는 도라지씨에게 이것저것 물은 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물었다. 도라지씨는 대통령의 사과를 아직 못 받아 속상하다고 말했다.

“기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진짜 사과 못 받은 것 맞는지’ 연거푸 물었어요. 당연히 대통령의 사과는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서 기자가 애초에 물어보지 않은 것 같았어요.” 독일의 한 방송사 기자도 도라지씨를 인터뷰했다. 독일 기자는 한국의 방송사가 탄압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한국에서는 백씨 가족의 이야기가 방송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독일 기자가 대신 해외에 알리겠대요. 1980년 광주항쟁의 진실을 세계에 처음 전한 것도 독일인(위르겐 힌츠페터)이었다면서.”

백남기씨 가족은 강신명 경찰청장, 구은수 전 서울지방경찰청장(12월28일 퇴임), 제4기동단장, 제4기동단 경비계장, 제4기동단 중대장과 물대포를 직접 조종한 경찰관 2명(경장)을 살인미수죄와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으로 검찰에 형사고발했다. 살수차 폐회로텔레비전 영상에 대해 법원에 증거보전신청을 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아버지를 쓰러뜨린 살수차는 홍성에서 지원 나온 차량이었다. 1월12일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에서 도라지씨는 변호인과 함께 영상을 볼 예정이었다.

12일 오전 10시 도라지씨를 다시 만났다. 서울 마포구 도라지씨의 집 앞에서 도라지씨를 차에 태우고 충남 홍성으로 출발했다. 곧 대통령 새해 기자회견이 있을 예정이지만 도라지씨는 대통령의 사과는 거의 포기한 듯 보였다. “요즘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엄마랑 그냥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뿐. 희망이 안 보여요. 대통령이 우리 가족 얘기는 어떤 언급도 없고 그냥 너싱(nothing)이잖아요. 야권도 분열해서 당 추스르느라 바쁜지 이제 국회에서 아버지 문제는 다뤄지지도 않아요. 언론 보도도 끊겼고요.”

점점 여론의 관심도 떨어지고 국가 폭력의 피해를 입은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딱히 없다. 정치권의 입에서도 이제 더이상 농민 백남기 사건은 희미해져 간다. 백남기씨 가족들은 그저 누가 병원에 찾아오면 같이 우는 게 하는 일의 전부다. “네덜란드로 간 동생이 1인시위를 계획하고 있어요. 한국대사관 앞에서 하는 게 좋을지 로테르담역에서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해요. 하지만 한국대사관은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백민주화씨는 실제 1인시위를 벌였다. 1월28일부터 이달 7일까지 로테르담 중앙역 등에서 아버지가 쓰러지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붙인 손팻말을 들고 섰다. 민주화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정말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일어난 일이냐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손팻말 문구를) 읽으면서도 믿지 못했다”고 썼다. 민주화씨의 시위를 지켜보던 한 네덜란드 경찰은 전단지 내용을 천천히 읽은 뒤 ‘같은 경찰로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홍성지원에 도착했다. 오후 2시 홍성지원 212호 법정으로 도라지씨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찾아온 조영선·박주민 변호사 등과 함께 들어갔다. 이중구 경찰청 경비국장은 국회 안행위 현안보고에서 “살수조작요원은 살수차 모니터를 통해 현장을 조망했으나 물보라가 화면을 가린데다 시위대가 주변에 몰려들어 농민이 넘어진 걸 보지 못했고 몰려온 사람들이 줄을 당기는 걸로 알고 살수했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이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212호 법정에서 진행됐다.

백남기씨는 자식들에게 다정한 아버지였다. 또한 농민운동을 하는 동료들에게는 훌륭한 농민운동가이기도 했다. 백씨는 1989~91년 가톨릭농민회 광주·전남지역 회장을 맡았다. 백씨는 1970년대 중앙대학교 재학 도중 민주화운동을 하다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뒤 전남 보성 고향으로 돌아가 농업인이 되었다. 서울대병원 앞에는 백씨의 쾌유와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는 천막농성장이 있다. 농성장에 걸려 있는 아버지 사진과 그림 옆에 딸 백도라지(왼쪽)씨와 백민주화(오른쪽)씨가 서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사라진 경찰 지휘부의 명령

경찰이 법원에 제출한 영상은 기존 경찰의 해명과는 다른 지점이 있었다. 살수차에 달린 영상 기록상으로 백남기씨는 19시53분35초쯤(실제보다 54분 빠른 시각으로 기록됨) 파란 조끼를 입은 모습으로 또렷하게 등장했다. 53분48초께 살수가 시작됐고 백남기씨는 얼마 뒤 쓰러졌다. 54분15초께 쓰러진 백씨를 사람들이 데리고 돌아갔고 55분10초가 되어서야 살수차는 작동을 멈췄다.

살수를 하는 혼잡한 과정 속에 백씨가 등장해 어쩔 수 없이 백씨가 직사로 살수당한 것이 아니라 살수차는 평온한 가운데에서 백씨의 등장과 함께 살수를 시작했다. 경찰 쪽 변호인은 “요원이 차량 안에서 카메라 영상을 보면서 살수를 했는데 무전으로 지휘관의 지휘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지휘관은 시위대의 공격을 피해 버스 뒤쪽으로 물러나 있어서 백씨가 잘 안 보였다고 했다. 백씨를 조준해 쏘지 않았음을 설명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이는 또한 제대로 대상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살수를 지휘했다는 말이 된다. 애초부터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살수하는 게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설명이다.

오후 3시 도라지씨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굳은 표정으로 법정을 나왔다. “물보라 때문에 안 보인다더니 경찰 설명은 거짓말이었어요.” 도라지씨는 변호사와 상의해 경찰 무전기록을 확보해보기로 했다. 지휘관이 살수조작요원에게 정확히 뭐라고 명령했는지가 중요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영상에 아버지가 다 보여요. 명백하게 조준사격했어. 아빠 쏜 살수차 옆에 다른 살수차가 하나 더 있더라고. 그 살수차 영상도 입수해서 봐야 할 거 같아.”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증거자료를 확보한 듯해 도라지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는 살수차 경찰을 개인적 감정으로 처벌하려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가 공격당한 날(11월14일) 경찰이 갑호 비상령을 발령했다고 해요. 계엄이 선포되기 전 상황에서 내리는 최상위 비상령이라고 들었어요. 경찰은 이날 집회를 무슨 전쟁처럼 여겼을 거고 경찰의 우선순위가 국민 안전이 될 수 없었을 거예요. 저는 경찰 책임자가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녁 7시 서울로 올라가는 차량은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평택 인근을 달리고 있었다. 잘 뚫리던 도로가 갑자기 차들로 꽉 막혔다.

1월24일 오후 3시 도라지씨는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인근 커피숍에서 유엔에서 찾아온 마이나 키아이 특별보고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아이 보고관은 한국에서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온전히 지켜지고 있는지 조사하러 나왔다. 도라지씨와의 면담이 예정돼 있었다.

키아이 보고관을 만나기 직전 도라지씨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경찰이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에게 경찰 살수차 조작요원과 지휘관 사이 무전기록이 없다고 통보했다. 경찰은 112 신고로 출동하는 경찰의 무전만 기록으로 남기고 일반 작전에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2009년 용산참사가 있었을 때 경찰의 무전기록이 법원에 제출된 적 있었다. 경찰은 이것이 예외적인 경우이고 이 당시 무전 내용을 수기로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의원실에 전했다. 경찰 설명이 맞다면, 백남기씨를 공격한 경찰 지휘부의 명령은 어떻게 내려진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진짜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럼 경찰은 무슨 짓을 해도 책임을 면하게 되는 거잖아요. 저 어떡해요? 경찰청장실 앞에 가서 드러눕기라도 해야 하나요?” 도라지씨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하아아아아아아.’ 긴 한숨을 쉬었다. “대체 우리나라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된 거죠? 살수차 수압기록도 없고, 무전기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도라지씨는 키아이 보고관을 만났다. 보고관은 도라지씨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살수차 공격을 당하기 전 폭력 행위를 한 게 있나요?” 폭력 시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폭력이라고 정의해야 할까. 드러난 영상으로는 백남기씨는 경찰버스에 매달린 줄을 끌어당기려 시도한 게 전부다. 줄을 묶은 건 백씨가 아니다. 돌을 던진 것도 아니다. 각목을 든 것도 아니다. 경찰이 불허한 집회에 나온 것이 문제일까. 하지만 헌법상 집회는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이다. 헌재가 위헌 판정을 한 경찰 차벽에 저항한 것이 폭력일까. 국가가 폭력 시위를 부추겼는지, 폭력 시위가 국가의 과잉 대응을 낳은 것인지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의 논쟁처럼 난해하다. 그래도 명확한 답은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경찰이 불법 시위대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된다.

둘째딸 민주화씨는 네덜란드로
돌아가 로테르담 중앙역 등에서
손팻말을 들고 1인시위 했다
“정말 (북한 아닌) 남한에서
일어났냐”는 질문 많이 받았다

홍성지원에서 살수영상을 봤다
“물보라가 화면 가렸다”는
말과 달리 평온 상태서 살수했다
딸은 “조준사격 명백” 분노한다
무전기록 요청했지만 없다고 한다

27일부터 도보순례 시작

도라지씨는 보고관에게 호소했다. “저희 아버지는 칠순이 다 된 노인이에요. 설사 아버지가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해도 경찰이 체포를 하면 되지 때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키아이 보고관은 “동의한다”고 말했다.

이어 ‘공무원신문’의 김상호 기자가 키아이 보고관에게 증언했다. 김 기자는 백남기씨가 쓰러지기 전후의 과정을 지켜봤다. “농민들이 상여(시위 물품)를 가져왔어요. 물대포가 직사해서 상여를 부숴버렸어요. 경찰은 마치 슈팅게임(shooting game)을 하는 듯했어요. 목표물이 보이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하나하나 조준해서 쏘았어요. 물을 뿌린 게(spraying) 아니에요. 그날 현장에 살수차가 네 대 있었는데 백남기씨를 쏜 살수차는 유독 수압이 셌어요. 백남기씨의 얼굴을 향해 쐈어요.”

키아이 보고관은 귀 기울여 들었다. 그는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조사기간 동안 “한국의 평화로운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점진적으로 뒷걸음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키아이 보고관은 올해 6월 유엔 인권이사회에 한국의 집회·결사 자유 실태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한다. 올해 한국은 유엔 인권이사회 의장국이다.

지난 2일 오후 백도라지씨는 여전히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백남기씨 아내 박경숙(63)씨도 함께 있었다. 이날 병원에 손님이 찾아왔다. 백씨가 쓰러졌을 때 그를 부축해 구급차에 싣는 것을 도운 남성이었다. “백남기씨가 쓰러졌을 때 각혈을 세 번 했어요. 제가 그것을 씻겨드리는 와중에도 경찰이 계속 물대포를 쏘았어요.” 남성은 도라지씨의 두 손을 잡고 법정에서 증언을 해주겠노라 약속했다. 도라지씨가 눈물을 글썽였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1일 오전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유엔 보고관의 발표를 반박했다. 강 경찰청장은 “차벽은 신고된 적법한 집회에 사용한 적 없으며, 금지된 구역으로 물리적으로 진출하려고 해서 사용한 것이다. 물(대)포도 집회시위 대응 과정에서 사용한 게 아니라 폭력을 제지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그것 자체를 집회·시위의 자유, 기본권과 연계하는 것은 무리다”라고 주장했다.

국가에 대한 의심은 확신으로, 확신은 비관으로 이어진다. “어쩌면요. 경찰은 저게 진심인 것 같아요. 국제사회에서 곤란한 처지에 놓일까봐 변명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물대포로 사람을 공격한 게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게 더 절망적이에요.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사회에 살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어요.”

백남기씨가 쓰러진 지 석 달 가까이 지났다. 이들 가족의 시계는 2015년 11월14일에 멈추었다. 시간이 흘렀다면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한다. 경찰의 진상조사가 있어야 했고, 책임자는 사과를 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불행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논의를 시작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것도 진전된 게 없다. 대통령은 ‘농민 백남기’에 대해 아예 언급이 없다. 마치 지난해 없었던 사건처럼.

“새해가 됐어도 새해 같지가 않아요. 11월14일이 무한 반복되는 느낌이에요. 뭔가 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없고 계속 똑같은 상태예요. 아빠의 상태도 그렇고, 정부의 태도도 그렇고. 모든 일상의 평화로운 것들이 멈춰버렸어요. 이제 곧 설인데….”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삶은 불행하게도, 비슷하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75)씨가 지난달 21일 도라지씨를 찾아와 위로했다. 도라지씨는 배씨에게 29년간의 고통을 어떻게 견뎠는지 물었다. 배씨는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실이 있는) 창신동을 오가는 등 거리를 돌아다니며 버텼다”고 말해주었다. 2009년 용산참사 유족들이 그러했다. 2014년 세월호 유족들이 그러했다. 모두 거리에서 버텼다. 오는 27일 도라지씨는 ‘국가폭력 책임자 처벌 민주주의 회복 백남기 농민 살리는 도보순례’를 시작한다. 순례단은 전국 곳곳을 걸을 예정이다.

딸 백도라지씨가 쓴 편지

도라지씨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건넸다. 아버지는 딸의 편지를 언제쯤 눈에 담고 가슴에 품을 수 있을까. 이날 도라지씨는 중환자실 앞 의자에서 아버지가 병원에 실려오기 전까지 입고 있던 옷을 꼭 붙들고 있었다. 도라지씨가 지난해 10월 아버지 생신 선물로 건넨 옷이었다.

“사랑하는 아빠. 아빠가 누워 있은 지도 벌써 석 달이 다 됐네. 내가 맨날 면회 시간에 들어가서 허리 안 아프냐고, 그만 일어나라고 말하는 거 다 듣고 있지? 아빠는 그날 쓰러지고 나서부터 계속 의식이 없어. 선생님들 말씀으로는 아빠가 고통을 못 느낀대.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쓰러져 있는 것도 마음 아픈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까지 보게 된다면 엄마가 정말 힘드실 거 아냐. 의사 선생님들 말이, 아빠가 엄청 건강하대. 대뇌가 50퍼센트 이상 손상되어서 뇌신경들은 제 기능을 못 하지만 장기들이 튼튼하대. 그 말을 들으니까 더 속상한 거 있지. 안 다쳤으면 아빠가 사랑하는 지오랑 오래오래 잘 놀아주고 재미있게 지냈을 거 아냐. 지오는 이제 네 살이 되었고 위로하는 법을 배웠어. 민주화가 울고 있으면 ‘엄마,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우는 거야? 울지 마’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캐러멜과 판다 인형을 준대. 아빠 덕에 귀여운 손주도 철이 들었나봐. 아빠, 손주 엄청 보고 싶잖아. 어서 일어나서 지오랑 놀아줘야지. 칠순 기념 유럽 여행도 가고 말야. 아빠가 어서 일어나길 늘 기도할게. 세상을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아빠의 큰딸, 도라지 올림.”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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