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 마지막까지 평화롭게] (1) "당신에게 중요한 게 뭐냐"..환자의 연명보다 평온을 선물
[경향신문] ㆍ‘죽음의 질’ 1위 영국
영국 호스피스기관협회 ‘호스피스 UK’의 마리 쿠퍼 임상개발팀장은 큰 개를 끌어안은 채 병상에 누워 있는 한 남자의 사진을 보여줬다. 남자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 암환자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시한부 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몸은 수척했지만 눈빛이 밝았고, 의료기기와 연결되는 튜브나 전선도 보이지 않았다.
쿠퍼 팀장은 이 남자가 개와 함께 거리에서 생활하던 노숙자였다고 말했다. 남자의 소원은 자신의 소중한 친구인 개를 계속 돌보는 것이었다. 남자가 누워 있던 곳이 병원이라면 ‘동물 반입’은 절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호스피스 기관이었고, 남자는 삶의 마지막 날까지 개와 지내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쿠퍼 팀장은 “호스피스는 삶에 대한 통제권과 의사결정권을 의사가 아닌 환자 본인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이라며 “늙고 병든 사람들도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안을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전역에 퍼져 있는 220여개 호스피스 기관을 이용하는 환자는 연간 약 12만명이다. 이들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포함하면 연간 36만명이 호스피스의 혜택을 받고 있다. 한국보다 호스피스 이용 문화가 활성화돼 있지만 영국인들도 호스피스와 죽음을 연결시켜 생각하긴 마찬가지다.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먼 마틴은 부인이 호스피스에 가자는 제안을 조심스레 꺼냈을 때 ‘그곳은 죽으러 가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버크햄스테드에 있는 ‘세인트 프란시스 호스피스’에 입원한 후 마틴의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병원에서 매일같이 듣던 다른 환자들의 흐느낌과 울부짖는 소리가 그곳엔 없었다. 그 자신도 효과적인 통증 관리를 받은 덕분에 가슴을 조여오던 통증에서 해방됐다. 병원에선 의사와의 상담시간이 하루 12분에 불과했지만 이곳에선 2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했다. 호스피스의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들은 마틴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왔고,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쿠퍼 팀장은 “병원에선 의료진이 ‘당신의 문제는 무엇이냐(What is the matter with you?)’고 묻지만 호스피스에선 ‘당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What matters to you?)’고 묻는다”며 “환자에게 묻는 질문의 강조점을 변화시킨 것이 호스피스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 최근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긴 했지만, 2018년 시행 전까지는 말기 암환자들만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이 법은 암 외에 후천성면역결핍증과 만성 폐쇄성폐질환, 만성 간경화의 말기환자 등으로 호스피스 대상자 범위를 넓혔다.
반면 영국에선 회생 가능성이 없는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라면 누구든 호스피스에 들어갈 수 있다. 소아·청소년 환자를 위한 아동 호스피스 기관들도 별도로 있다. 1982년 세계 최초의 아동 호스피스인 ‘헬렌 앤드 더글러스 하우스’가 문을 연 곳도 영국이다.
영국 호스피스 기관들은 재정의 32%가량을 한국의 국민건강보험 격인 국가보건서비스(NHS)로부터 지원받는다. 나머지는 시민들과 기업이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모금팀을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모금 행사를 열어야 하지만, 환자와 그 가족에겐 비용을 받지 않는다. 호스피스 서비스는 모두 무료 제공된다.
호스피스 전문가들은 기대수명이 늘고 노인 인구가 급증하면서 호스피스에 대한 수요도 커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려는 욕구도 커지고, 치매를 포함한 노인성 질환에 시달리는 인구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치매노인 인구는 2010년 47만4000명(노인 인구의 8.7%)에서 2030년 127만2000명(10%), 2050년엔 271만명(15.1%)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호스피스 UK’의 멜라니 허드슨은 “30년 전만 해도 호스피스 이용자의 평균 연령은 50~60대였지만 지금은 80대”라며 “노인 인구 증가라는 인구학적 도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런던 | 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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