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19년만에 제 발로 돌아온 살인범.. 공소시효, 살았나 죽었나
최근 대구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20년 전 내연녀의 남편을 살해하고 중국으로 밀항했던 40대 남자와 그 내연녀를 구속했다. 통상 범인이 출국하면 공소시효가 정지되지만, 이들처럼 밀항을 했다면 출국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공소시효가 그대로 흘러간다. 이들은 현지 변호사의 조언을 받아 5년 전인 2011년 공소시효가 만료됐다고 생각하고 한국 영사관에 자수하는 등 제 발로 국내에 들어왔다. 하지만 수사 당국과 법원은 아직 '공소시효'가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양궁 선수, 내연녀의 남편 살해하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96년 12월 8일이었다. 실업팀 소속 양궁 선수였던 주모(당시 22세)씨는 대구 달서구 기숙사에서 합숙 훈련을 했다. 주씨는 기숙사 주변 수퍼마켓을 자주 드나들다 여주인 유모(당시 29세)씨와 가까워졌다. 둘은 불륜 관계로 이어졌고 남편 박모(당시34세)씨가 이를 눈치챘다. 남편은 아내를 추궁하며 폭행했고, 아내는 내연남 주씨에게 이를 알렸다.
주씨는 대구 달성군 현풍면 한 공용주차장으로 박씨를 불러냈다. 박씨에게 아내와 이혼할 것을 요구하던 주씨는 몸싸움 끝에 박씨를 목 졸라 살해했다. 그리고 박씨 시신을 살해 현장에서 11㎞ 떨어진 대구 달성군 옥포면 구마고속도로변 수로에 유기했다. 주씨는 박씨의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하기 위해 시신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시신은 7개월 뒤인 1997년 6월 수로 주변을 지나던 등산객에게 발견됐고, 경찰 수사도 비로소 시작됐다.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주씨와 박씨 아내 유씨를 지목했지만 이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경찰은 달아난 내연 남녀를 전국에 지명수배하고 두 달 뒤엔 TV 프로그램 '경찰청 사람들'을 통해 공개 수배했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두 남녀의 가족들도 "우리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15년이 흘러 2011년 12월 7일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만료됐다. 이젠 잡혀도 살인 혐의로 처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작년 8월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 자체가 폐지됐으나, 이 사건 당시에는 살인죄 시효가 15년이었다.
그런데 작년 11월 두 남녀가 중국 상하이에 나타났다. 19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한국 총영사관을 찾아온 이들은 한국에서 밀항해 온 불법체류자이니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총영사관 측은 현지 법에 따라 이들을 상하이 공안 당국에 넘겼다. 중국 공안은 간단한 조사를 통해 이들을 단순 불법체류자로 봤고, 강제 추방을 위해 구류 처분을 내렸다. 공안 조사에서 이들은 살인 사건 관련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내연남 주씨는 지난달 30일, 유씨는 이달 6일 각각 한국으로 추방됐다. 인천공항에서 밀항 단속법 위반 혐의로 이들을 체포했던 대구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유씨의 남편이 19년 전 피살된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유씨가 장기 실종에 따른 사망자로 처리돼 있는 것도 수상했다.
이를 단서로 경찰은 20년 전 사건을 담당했던 퇴직 경찰관과 피해자 가족,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을 찾아다니며 재조사를 벌였다. 이미 폐기된 과거 수사 기록까지 찾아낸 경찰은 두 남녀를 다시 추궁했고 살인 관련 내용 일체를 자백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살인 사건 현장을 재구성하며 현장 검증까지 마쳤다.
19년 만에 상하이에 나타난 살인범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이들은 살인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밀항 시점에 대해선 "2014년 4월"이라고 주장했다. 공소시효 기간엔 국내에 있었고, 공소시효가 끝난 뒤 외국에 나갔으니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만일 이들이 공소시효가 끝난 2011년 12월 7일 이전엔 국내에 있다가 그 이후 외국에 나갔다면 처벌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두 사람이 구체적인 밀항 방법과 시점 등에 대해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입증할 책임은 수사 기관에 있다. 때문에 법정 공방이 치열해지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하지만 수사 당국은 살인죄 처벌을 자신하고 있다. 국내에 머무른 흔적이 없고 마지막 발견 장소가 국외였던 점 등 각종 입증 자료를 통해 '범인이 형사 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는 경우 그 기간 동안 공소시효는 정지된다'는 형사소송법 제253조 3항을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남녀는 살인 사건이 벌어진 이후 국내에서 금융거래를 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고, 전기·가스·상수도 요금을 납부한 기록도 없었다. 국내에서 이들을 봤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은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1997년부터 2014년까지 국내에 살았다면, 단 한 사람의 목격자나 증거물이라도 제시할 수 있을 텐데 이들은 그런 자료를 내놓지 못한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둘이 밭 갈고 살았다면 그 밭의 위치라도 대야 하는데 두 남녀는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이다.
법원 역시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해외로 도망간 범인에 대해선 엄격한 편이다. 서울중앙지법 한 부장판사는 "검경에서 정확한 밀항 시점까진 밝히지 못하더라도 국내에 없었던 정황을 최대한 제시하고, 반대로 두 피의자가 국내에 있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외국으로 도피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피의자들의 묵비권 행사로 수사기관이 구체적 밀항 시점을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한국에 없었다는 점을 충분히 제시했다면 입증 책임을 다한 것으로 보며, 그다음부터는 두 남녀가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구지법은 살인 혐의가 포함된 주씨의 구속영장도 발부한 상황이다.
물론 이들이 공소시효 기간 내내 한국에 머물렀다는 결정적 증거를 내놓고 검경이 이를 반박하지 못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 경찰은 만일에 대비해 인터폴을 통해 중국 당국에 두 명의 행적 파악을 의뢰해 놓았다.
검경은 주씨와 유씨가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모든 과거를 스스로 털어놓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현재 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는 내연남인 주씨에게 적용됐고 내연녀 유씨에겐 밀항단속법 혐의만 적용된 상태다. 주씨가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하며 유씨를 보호하려 하지만, 경찰은 유씨도 살인과 사체유기의 공범일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이 경우 유씨는 자신의 혐의를 덜어내기 위해서라도 수사에 협조할 개연성이 있다. 그래서인지 유씨의 최근 진술 태도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밀항과 관련해 "2014년"이라고 내연남과 똑같은 주장을 반복했던 유씨가 수일 전부터 "나한테 묻지 마라. 남자에게 물어보라"고 말하는 등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자충수 돼버린 중국에서의 자수
만일 이들이 중국에서 자수하지 않고 밀항선을 타고 국내에 들어왔다면 이 사건은 상당히 꼬일 가능성이 높았다. 국내에 살았던 것처럼 위장해놓고 "계속 한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수사기관으로서도 해외에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에서의 자수는 '자충수'였던 셈이다. 이들은 상하이에서 조선족 변호사를 구해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경찰에 따르면, 과거와 달리 요즘은 밀항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밀항선을 구하기도 어렵고 금액도 비싸다는 것이다. 세월호 선주(船主)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도 밀항을 위해 전남 순천 지역으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국 밀항엔 실패했다. 유 전 회장은 산속 별장에서 숨어 지내다 도로 주변 밭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조직과 자금이 있어도 밀항선 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으로의 밀항은 중국 밀항보다 더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밀항 성공 케이스도 있다. 희대의 다단계 사기꾼으로 중국에서 숨진 것으로 알려진 조희팔씨다. 그는 수사망이 좁혀져 오자 2008년 12월 중국으로 밀항했다. 하지만 그의 밀항이 간단했던 것은 아니다. 측근들을 대거 대동하고 충남 태안군 마검포항에 들른 그는 양식업자가 마련한 모터보트를 타고 공해상으로 나갔고, 조카가 준비해 온 30t급 중국 어선으로 갈아타고 국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어선이 제때 도착하지 않아 애를 먹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는 밀항을 도운 측근들에게 수십억원을 뿌렸고, 그의 밀항을 해양경찰이 방조하지 않았느냐는 의혹까지 제기됐었다. 검찰 관계자는 "중국에서 별다른 직업 없이 숨어 살아온 남녀가 국내로 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며 "그 정도 돈이 있었다면 중국에 더 있거나 제3국으로 가지 한국에 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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