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에 익숙한 501번째 아이

'그 많은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나요?' 찰스 슐츠에게 독자가 물었다. 찰리 브라운과 그의 개 스누피가 등장하는 코믹 스트립 <피너츠>를 75개국 2600여 신문에 50년 동안 연재한 그다. 스토리 작가나 어시스턴트의 도움 없이 1만7897개 코믹 스트립(Comic Strip)을 그리며 그만큼의 마감을 넘긴 것이다.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슐츠가 대답했다. 어디서 그 짧은 문장이 오는지, 왜 어떤 날은 하루에 아이디어 열 가지도 떠올리는데 어떤 날은 하나도 떠올릴 수 없는지 수수께끼라고. 다만 아이디어 중 일부는 과거의 기억에 기대고 있는데, 이를테면 토요일 오후 연속 상영 영화를 보기 위해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극장 앞에 길게 줄을 섰던 기억 같은 것이다.
하루는 극장에서 선착순 500명에게 캔디바를 주겠다고 광고했다. 길게 늘어선 줄. 마침내 어린 슐츠의 차례가 되자 매표원이 그에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캔디바가 떨어졌단다.' 슐츠는 501번째로 줄을 선 아이였고 40년 후 그 자리는 찰리 브라운의 것이 된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만화가 중 한 명인 찰스 슐츠와 달리 찰리 브라운은 어린 패배자다. 그는 럭비공을 꼭 붙들고 있겠다는 페퍼민트 패티의 말에 속아 번번이 뒤로 자빠지고, 그가 투수로 뛰는 야구팀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의 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둥근 머리의 아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익히 아는 슐츠의 캐릭터들이 채 완성되기 전인 초기의 연재분에서부터 찰리 브라운(최근 출간된 <피너츠 완전판>을 보면 그때 그는 어설픈 어린 건달이었다)은 바이올렛에게 수천 개의 구슬을 잃고 루시에게 연속 1만 패를 당하며 체커 게임의 역사에 새 장을 연다. <피너츠>의 주제를 묻는 독자에게 슐츠는 이렇게 말했다. '굳이 찾아보자면 찰리 브라운이 항상 패배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게 주제 아닐까요?'

어린 내가 <피너츠>의 세계에 빠져든 건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이기는 건 근사하지만 그만큼 힘이 드는 일이다. 지나치게 노력하거나 상심하는 대신 패배에 익숙한 찰리 브라운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건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던 셈이다. 찰리 브라운은 매일 한숨을 쉬며 말한다. '못 참겠어.' 그리고 그는 참는다. 찰리 브라운, 참 좋은 녀석이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건 그런 태도만으로는 삶을 꾸려나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고 코믹 스트립의 주인공도 아니다. 심지어 개도 없다. 대신 우리에게는 직업이 있고 가정이 있으며 매달 납부해야 하는 고지서가 있다. 도대체 누가 그런 걸 생각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일을 위해 고군분투한 ‘성숙한’ 사람
슐츠는 만화가의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끝나지 않고 매일 연속되는 마감 일정 속에서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많은 문제를 껴안은 채 자기 만화의 수준을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수준을 끊임없이 향상시켜야 했다.
'내게는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던 시기가 있었다. 몇 주에 걸쳐 나쁜 꿈이 불규칙하게 나를 찾아왔는데, 걷잡을 수 없이 엉엉 우는 꿈을 꾸고 난 뒤 잠에서 깨면 끔찍하게 우울했다. 이런 일을 무시하는 것, 그리고 모든 일을 떨쳐버리고 재미있는 만화를 생각하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다. 매일의 압박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이따금, 그저 조간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 좌절하게 되는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자기 자신에게, 가족에게, 동료에게, 가게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물론 우리나라 정부에도 화가 미친다. 이 모든 분노를 뒤로하고 매일의 일과를 계속해 나가려면 상당히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찰리 브라운과 함께한 내 인생>에서 볼 수 있는 건 창작의 비밀이 아니다. 숨겨진 뒷이야기도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기 위해 평생 고군분투한 한 만화가의 모습이다. 그는 성숙한 사람이었고 성숙한 만화를 그렸다. 고마워요, 찰스 슐츠!
금정연 (서평가)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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