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호선 도촬남'은 과잉고발 피해자였다

박용하 기자 입력 2015. 12. 25.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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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녹화버튼 실수에 주변 '싸늘'..무혐의 처분인터넷 신상털기 등 피해 회사 홈페이지에 댓글도

두 아이의 아빠 ㄱ씨(46)는 요즘 스마트폰으로 아이들 영상을 찍는 게 일과가 됐다. 3교대 근무를 하느라 아이들을 보기 힘든 아내를 위해 생각한 궁여지책이었다. 아내도 집에 있을 때면 아이들을 찍어 보냈고, ㄱ씨의 스마트폰에는 영상이 하나둘씩 쌓여갔다. ㄱ씨는 영상을 모아 나중에 아이들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지난달 2일 저녁 퇴근하고 술을 마신 다음 탄 지하철에서도 ㄱ씨는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이들 영상을 보려고 스마트폰을 켜뒀지만 술기운 때문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분간을 정신없이 가는데 옆에서 큰소리가 났다. 한 남성이 그에게 “앞에 앉아있는 여성을 몰래 촬영했다”며 항의한 것이다. 다시 보니 ㄱ씨의 스마트폰은 촬영 모드로 바뀐 채 무작위로 녹화하고 있었다. ㄱ씨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주변 분위기는 금세 험악해졌다. 실랑이를 벌이던 ㄱ씨는 경찰에 붙들려가 조사를 받았고, 스마트폰도 제출해야 했다.

경찰 조사를 마친 뒤가 더 문제였다. ㄱ씨는 어느새 ‘지하철 9호선 도촬남’으로 불리며 인터넷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지하철에 있던 한 탑승자가 휴대폰으로 그의 얼굴을 촬영해 트위터에 유포한 것이다.

일부 누리꾼들은 ㄱ씨가 매고 있던 사원증을 단서로 그의 신상까지 털었다. 누리꾼들은 ㄱ씨의 회사 홈페이지까지 찾아가 “범죄자를 고용하지 말라”, “반드시 처벌하라”며 악성 댓글을 달았다.

수사결과는 특별한 게 없었다. 경찰은 삭제된 파일을 포함해 ㄱ씨의 스마트폰과 외장메모리에 담긴 모든 파일을 조사했으나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에 찍힌 영상은 지하철 속 여성이 아닌, 근처 사람들의 뒷모습을 마구잡이로 찍은 영상이었다.

검찰과 경찰은 ㄱ씨를 무혐의 처리했다. 담당 경찰은 “스마트폰에서 나온 사진과 영상이 수백 기가였는데, 99%가 아이들의 사진과 동영상이었다”라고 말했다.

ㄱ씨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사진과 신상을 유포한 이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낼 생각이다. 사건을 담당한 김동현 변호사(법률사무소 메리츠)는 “최근 확인되지 않은 허위 사실을 성급하게 유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소셜미디어의 특성상 정보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유포돼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ㄱ씨는 “사건 이후 가족이 많이 시달렸다”면서 “앞으로는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면 인터넷에 퍼진 정보를 삭제해 주는 등 구체적인 구제책이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용하 기자 yong14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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