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업'으로 마련한 창당자금과 개인자산, 뻔뻔한 JP
[김종필에게 묻는다 ⓷] 4대의혹사건 “욕 좀 먹으면 어때, 살점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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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허업(虛業)’이다. ‘허업’은 서비스업과 같이 생산하는 게 없는, 즉 ‘실업(實業)’이 아닌 직업을 말한다. 지난 2월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부인 故 박영옥 여사 빈소에서 “정치는 허업”이라며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게 정치인의 희생정신이지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면 교도소밖에 갈 데가 없다”고 말했다.
‘허업’이라던 정치를 통해 JP가 만진 ‘떡고물’은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떡고물’은 대통령비서실장, 중앙정보부(중정)장 등을 했던 JP의 라이벌 이후락이 박정희 암살 이후 194억원을 부정축재한 것으로 밝혀지자 “떡을 주무르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고 해 유명해진 표현이다. 당시 JP의 ‘떡고물’은 이후락의 그것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1980년 6월18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신군부가 몰수한 JP의 부정축재 금액은 213억4648만원으로 ‘일요신문’을 발간한 61억원 규모의 현대경제일보사, 28억원에 이르는 12만평의 제주 감귤농장, 79억원에 상당하는 640만평 서산 소재 삼화축산, 300돈의 순금제 칼, 50돈의 순금제 황소, 각종 고서화와 골동품 1억3000만원 등이다.
1974년 JP가 부정축재자라는 사회적 여론이 일어나자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장학회’를 설립해 감귤농장과 서산목장 등을 기증해 관리했다. JP는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제주도 황무지를 개척해 감귤나무를 심고 거기서 재원을 얻어 한국에서 영국의 ‘이튼스쿨’같은 학교를 만들려했다고 밝혔다. 사학과 재단은 70년대부터 최적의 재테크 수단 중 하나였다.
신군부에 의해 213억원을 뺏기고 잠시 쫓겨났던 JP는 노태우 정권 이후 3김정치(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한축을 담당하며 정치인생을 이어갔다. 김영삼 정부 초기인 1993년 함승희 검사 등 수사팀은 안영모 전 동화은행장이 이원조 전 의원, 이현우 전 청와대경호실장에 뇌물을 건낸 혐의를 포착하며 JP의 계좌도 발견했다.
함승희 전 검사는 1995년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 전 의원은 수백억원을 은닉했고, JP의 계좌에도 100억원대가 발견됐다”며 “당시 수사과정에서 검찰지휘부로부터 사건을 축소하라는 회유와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DJP(김대중+김종필)연합으로 JP가 실세가 되자 1999년 함승희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더이상 그 문제에 관해 언급하기 싫다”고 밝혔다. 권력은 허물을 덮는 능력이다.
권력자가 법의 칼날을 피하거나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는 편의주의식 사고방식은 이제 국민에게 익숙하다. 이는 군사독재의 유산이다. 5·16쿠데타 이전 자유당, 민주당 간부들은 정치자금을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며 최소한의 도덕성을 유지하려 했다. 신익희 민주당 전 최고위원이나 조병옥 전 내무장관이 개인적으로 가난했던 것은 유명한 얘기다.
‘구악’을 뺨친 ‘신악’
‘신악(5·16쿠데타세력)’이 독재와 부정선거로 물러났던 ‘구악(이승만 정권)’을 ‘뺨친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은 4대의혹사건 이후였다. 5·16 쿠데타세력이 공권력을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취한 정황이 뚜렷하지만 JP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고, 중앙일보는 증언록을 작성하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4대의혹사건이란 증권파동, 워커힐 호텔, 새나라자동차, 빠징꼬 등 네 가지 문제에 JP가 수장으로 있던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거액의 돈을 챙겼고 이를 민주공화당(공화당) 창당 자금으로 썼다는 의혹이다. 이 사건들은 모두 쿠데타 직후인 1961년 가을부터 벌어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JP는 이 사건을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1963년 2월25일 해외여행을 떠났을 뿐이다.
4대의혹사건이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부에서 문제가 되자 당시 중정부장이자 육군 대령이었던 JP는 준장으로 승진하면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중정부장에서 물러났다. 그때가1963년 1월5일이다. JP는 당시 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도 맡고 있었는데 따가운 시선이 지속되자 당직도 사퇴한 뒤 ‘외유’를 떠난 것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JP는 증언록(34회)에서 “이들 의혹은 비밀 창당 작업을 둘러싸고 번지는 루머들 때문에 실체 이상으로 증폭됐다”며 “겉은 권력비리 사건처럼 포장됐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반(反)JP 권력투쟁이었다”고 밝혔다. 승진과 외유로 훈훈하게 마무리된 사건에서도 JP는 자신을 비판한 이들만 탓하는 모습이다.
JP는 증언록에서 빠찡코 사건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고, 나머지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이 기획했지만 정치자금과는 무관하며 국가 발전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단 잡아떼기 “빠찡꼬는 민주당 정권 때”
빠찡꼬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60년 8월 장면 정부 때였다. 당시 500대가 들어왔지만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여론이 일자 금지됐다. 쿠데타 세력은 1961년 ‘유기장법’을 제정했다. 빠찡코 사건이란 중정이 일본에서 빠찡코 2527대를 들여왔는데 일본 시세보다 고가로 들여와 이를 허가해주며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아 4000만원이라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혐의다.
한국정치문제연구소가 펴낸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은 “실제로 강성원, 정지원, 이영근 등이 수입업무를 주관했는데 이 세 사람은 JP의 특명으로 민주공화당 사전조직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빠찡꼬 사건으로 얻은 자금은 그대로 공화당 사전조직(재건동지회) 자금으로 전용됐으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처벌받은 이가 없는 사건이라 그랬을까, JP는 증언록에서 “빠찡꼬는 5·16이전 민주당 정권에서 발생한 일로 처음부터 나나 중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헛소문”이라고 선을 그었다. JP는 4대의혹사건을 해명하며 “욕 좀 먹으면 어떠냐”며 “내 살점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죽기를 각오한 병사만큼이나 욕먹기를 각오한 정치인은 섬뜩하다.
새나라자동차, 투자자가 도망갔다?
4대의혹사건 중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은 새나라자동차 사건이다. 1961년 12월부터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라는 회사를 차렸다. JP는 “일제 자동차 부품을 수입해 조립·시판하기로 했다”며 “우선 완제품 250대를 면세로 도입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일본 닛산 자동차 수입을 2000대까지 늘려 국내에 있던 ‘시발택시’까지 밀려나 국내자동차 산업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1대당 수입가격이 13만원이었던 자동차를 25만원씩 시중에 판매해 중정은 약 2억5000만원의 부당이득을 얻었다.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 자본금 1억원 중 3000만원은 재일교포 사업가 박노정, 나머지는 JP의 형 김종락이 상무로 있는 한일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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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년 8월 부평 새나라자동차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사진=국가기록원 | ||
JP는 증언록에서 “63년 5월 회사가 망했다”며 “돈을 대던 사람(박노정)이 미국으로 도망간 판에 어떻게 수십억원을 빼돌릴 수 있겠는가”라며 횡령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에 따르면 최초 이익금 1200만원의 분배를 두고 JP가 이익을 독점해 박노정이 불만을 품고 진정서를 각계에 보냈다. 그러자 JP는 박노정의 체포를 지시했다.
박노정은 이를 눈치 채고 파자마 바람으로 숙소 반도호텔에서 나와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새나라자동차 건으로 JP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고, 투자금을 떼인 박노정 사건이 화제가 돼 일본에서도 JP의 악명이 드높아졌다. 이 사건은 중정 제2국장 석정선이 책임지고 1963년 구속됐다. 석정선은 워커힐호텔 건설에도 깊이 개입했다.
워커힐호텔 “자부심을 느낀다”
부정한 돈은 또 다른 부정의 씨앗이 된다. 태평양점령군 총사령부 교육국 과장 출신의 언론인 D.W.콘데는 저서 ‘남한-그 불행한 역사’에서 워커힐호텔 건설자금이 그동안 중정이 압수한 ‘북한 스파이들의 자금’과 중정이 받은 뇌물, 밀수로 생긴 자금, 한국군의 부정이용 등에서 나왔다고 단정하고 있다. 워커힐사건은 건설 자재를 면세로 들여온 횡령의혹사건이다.
워커힐 사건은 비밀투성이다. ‘워커힐 30년사’에 의하면 사업 기공식은 1962년 1월5일에 거행됐는데 일반에게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기공 전부터 강제노역은 진행 중이었다. 4대의혹사건 관련 국회 내무위원회가 중정을 감사한 결과 1961년 9월부터 연인원 2만4000여명이 무상으로 노역에 동원돼 공사가 진행됐다.
JP는 “비용과 공기(工期)를 줄이기 위해 육군과 죄수를 동원하고 군의 트럭도 지원받았다”며 “이 과정에서 적절한 행정절차를 밟지 못한 부분은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작은 흠을 드러내는 것은 모든 혐의를 부인하는 것보다 신뢰감을 준다. 또한 행정절차‘쯤’은 무시해도 된다는 도덕불감증은 박정희 정권이 남긴 악습 중 하나다.
JP는 “총 공사비 220만 달러를 투입해 10개월 만인 12월에 완공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워커힐 30년사’에 따르면 총 공사비는 6억4000만원인데 그 중 외화가 약 220만 달러였다. 손정목 전 서울시사편찬위원장은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서 “6억4000만원이면 당시 환율에 따라 493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며 “이 금액으로 엄청난 시설을 할 수 있을까”라며 공사비 축소 의혹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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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커힐호텔 하비니쇼. 사진=손정목 전 서울시사편찬위원장 | ||
워커힐호텔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였던 당시 ‘엄청난 시설’이었다. 설계에 참여한 강명구 회고에 따르면 호텔 모든 건물 안의 어느 곳에서나 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아차산 기슭 19만 평 터에 26개 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부지 중 약 10만평은 JP가 대한전선 창업주 설경동를 부정축재자로 몰아 그의 땅을 헐값에 사들였고, 나머지 땅도 토착민 14명에게 시가의 5분의 1쯤 되는 가격으로 사들였다.
JP는 “워커힐호텔은 내가 직접 지휘한 국가적 작품으로 지금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중정부장 JP(육사 8기), 중정 제2국장 석정선(육사 8기), 제2국 1과장 임병주(육군 중령)가 워커힐 공사를 주도했고 임병주는 건설사무소장을 맡았다. 건설 자재 중 나이트클럽 회전무대, 전기장치 심지어 시멘트까지 모두 일본제품이었는데 중정에서 무관세로 들여와 15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마련했다고 알려졌다.
JP는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월턴 워커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워커힐호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등의 이야기로 증언록을 할애했다. JP에 따르면 미군이 일본으로 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워커힐호텔을 짓고, 건물 이름은 역대 유엔군 사령관 이름으로 붙였다.
1962년 AP통신이 이곳을 “매춘굴·카지노·주사위판·룰렛장·슬럿 머신 그리고 미인 호스티스를 완비한 시설”이라고 하는 등 일본과 미국에서 이 비밀사업을 감지하고 비판하자 중정이 독단적으로 사업을 끌고 갈 수 없게 됐다. 부랴부랴 ‘국제관광공사법’을 제정해 ‘국제관광공사’를 만든 사실 등에 대해 JP는 말하지 않았다.
증권파동, 중앙정보부의 ‘먹튀’와 민주공화당 창당
1962년 5월 한동안 치솟던 증권이 한순간에 폭락해 5242명의 투자자가 176억6000여만원의 손실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 중에는 30대 젊은 주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고, 수많은 가정들이 파산하거나 이혼을 했다. 증권파동은 중앙정보부로부터 시작됐다.
1961년 가을, JP는 공화당 창당자금 마련을 두고 고민 중이었다. JP는 같은해 9월말 공화당 사전조직인 ‘재건동지회’를 핵심으로 하는 ‘8·15계획서’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보고했다. 1962년 1월 충무로1가 카네기홀 2층에 아지트를 만들고 젊은 대학교수, 언론인, 금융인 등을 포섭해 중앙과 지방의 정당사무국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재건동지회 조직부장은 강성원 소령으로 그는 중정요원이었다. 강성원은 증권투기의 귀재로 소문난 윤응상을 접촉했다. 윤응상은 당시 김성곤(남로당 재정위원 출신, 훗날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운영하던 연합신문, 동양통신의 전무였는데 그는 ‘7억환(1원=10환)만 투자하면 3개월 만에 100억환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중정은 5억환을 윤응상에게 전달했다.
윤응상은 이 돈으로 통일·일홍·동명 세 증권사를 설립하게 해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의 70%까지 사들여 주가를 올렸고, 중정요원인 강성원은 농협이 보유하던 한국전력 주식 12만8000주를 ‘지정된 증권회사’에 팔라고 요구한 뒤 5% 싸게 사 주가가 4200% 오르자 되팔았다.
뒤늦게 투자한 이들에게 손해를 떠넘기는 주가조작사건의 원조였던 이 사건은 12명이 구속됐지만 윤응상, 강성원만 법정에 섰고, 1963년 육군보통군법회의는 전원 무죄판결을 내렸다. 증권파동으로 주식시장에 대한 불신과 망가진 경제가 회복되는데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 공규영 ‘김종필 허망론 그리고 그 종말’, 방원철 ‘김종필 정체’, 이동형 ‘김대중vs김영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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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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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5000명이 넘는데 가해자는 없었다. JP는 군정이 끝난 지 약 3년 후에 “나 혼자 한 것은 아니며 시작은 같이 해놓고 문제가 어렵게 되자 모두들 발뺌했다”며 억울해했다. 조갑제의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JP는 “새 정당을 조직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며 “정당을 만드는 데 국고금을 쓸 수는 없지 않느냐? 그래서 증권시장에서 조달하여 쓴 것인데 재미보는 사람도 있고 손해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만행’은 업적으로 둔갑했다. JP는 증언록에서 “증권시장에 관여한 건 사실인데 경제개발을 위해 자본시장을 활성화해 보자는 게 관여한 이유”라며 “나는 몰랐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1963년 사건송치서에 따르면 4대 의혹 사건을 수사한 김재춘의 중정이 JP가 증권 파동을 주도한 사실을 밝혀냈지만, JP를 외국에 보낸 뒤 은밀히 기소 중지 처분을 했다.
사건 당시 쿠데타 정부는 지하경제를 키우는 데도 한몫했다. 1961년 제정된 금융실명 거래에 관한 법률은 경제단체와 쿠데타 주체들이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축적의 필요라는 명분하에 엄청난 규모의 가명 금융거래를 허용했고, 이에 대한 추적을 제한(영장없이는 원칙적 불가)해 이중의 보호막을 쳐줬다.
기존 정치인들은 정치활동을 못하게 하는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고는 쿠데타 세력은 중정에서 자금, ‘재건동지회’에서 인력을 동원해 1963년 2월26일 공화당을 창당했다. 공화당은 이전 정당과 달리 꽤 발전된 형태의 조직이었다. 그 뒤에는 대한민국 첫 간첩조작사건 피해자인 황태성이 있었다.
* <김종필에게 묻는다> 연재목차
1. 증언록 다시보는 이유와 5·16
2. 한일회담
3. 4대의혹사건과 공화당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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