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1조 2항을 돌려드립니다

2015. 12. 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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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더 나은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드는 개발자들’ 모임 참가해보니 ‘빠흐띠’ ‘카누’ 등 쉽고 재미있게 정치에 참여하는 서비스 꿈틀

이것은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가는 프로젝트다. 그럼 망한 것 아니냐고? 아니다. 지금은 사공이 많다고 일을 그르치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사공이 많아서 서로 도우면 배가 산으로 가는 ‘기적’이 일어난단다.

권오현 UFO팩토리(재미있고 착한 개발을 목표로 하는 웹·앱 개발 전문 스타트업) 대표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 플랫폼’을 개발하기 위해 직원 협동조합 형태로 정치 플랫폼 개발 유한회사 ‘빠흐띠’를 지난 10월 세웠다. 프랑스어인 ‘빠흐띠’(partie)는 사람들이 모이는 파티, 사람들이 모여 정치를 하는 정당이라는 뜻과 함께 ‘시작하다’ ‘참여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해 즐겁고 재미있게 정치를 할 수 있게 돕는 정치 플랫폼을 만들어보자는 의미다.

일상의 ‘정치’는 즐겁다

12월1일 저녁 7시 서울 명동 UFO팩토리 건물 2층에서 권오현 대표가 제안한 ‘더 나은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드는 개발자들’ 두 번째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은 말 그대로 좀더 민주적인 방식으로 일상생활을 구현할 수 있게 돕는 온라인 플랫폼을 개발하려는 한국의 개발자들 모임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공정하게 표출되고, 그렇게 표출된 목소리가 실제 사회적 시스템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목적을 지닌 서로의 작업을 소개하고 조언하고 협업도 하면서 한국의 ‘정치 플랫폼 개발자들’ 간에 다리를 놓는다.

이날 모임에서 이미 꽤 여러 종류의 ‘정치 플랫폼’들이 꿈틀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건 ‘빠흐띠’의 ‘빠흐띠’다. 빠흐띠는 애플리케이션(앱)이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와서 놀고 떠드는 ‘플랫폼’을 지향한다.

빠흐띠는 한국형 ‘데모크라시 OS’ 혹은 ‘루미오’처럼 의사결정을 돕는 기능, 서로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합리적이고 건강한 토론을 유도하는 기능, 뉴스를 공유하고 피드백을 주고 받는 기능, 무엇보다 헌법 제1조 2항이 규정하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조항을 실현할 수 있는 국민 법안 발의 기능 등을 포함할 계획이다.

프로토타입(가설 검증 테스트 버전)들은 웹 기반 호스팅 서비스 ‘깃허브’(GitHub)에 공개돼 있다. “우리만의 카누를 타고 산으로 갑시다”라는 소개말을 갖고 있는 ‘카누’는 한국형 의사결정 플랫폼이라고 볼 수 있다. UFO팩토리 직원들이 ‘테스트용’으로 이용한 페이지를 들여다보면 기능을 쉽게 알 수 있다.

누군가 이슈를 생성한다. “스탠드업 시간(서서 하는 약식 업무 점검 회의) 언제가 좋을까요?” 이 이슈 왼쪽에는 언제가 좋을지 구성원이 생각하는 옵션이 하나씩 채워진다. “매일 오전 11시30분이오.” 그 밑에는 간단하게 이유도 쓸 수 있다. “오전 작업하고, 간단히 스탠드업하고 바로 점심 먹으러!!” “11시도 괜찮지 않나요?”라는 제안도 있다. “가끔 점심을 일찍 먹으러 갈 때도 있으니 11시30분보다 11시를 제안해봅니다.” 오후 6시를 옵션으로 제안한 사람도 있다. “오후 6시에 스탠드업 미팅하면서 작업일지 동시에 작성하는 건 어떨까요?” 오후 3시도 있다. “밥 먹고 졸릴 때쯤.”

“우리만의 카누를 타고 산으로 갑시다”

이 각각의 옵션에 ‘좋아요’와 ‘싫어요’를 누를 수 있다. ‘좋아요’ 수가 가장 많은 옵션이 맨 위로 올라간다. 오른쪽 칼럼에는 이와 관련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된다. 이 토론을 보면서 투표에 참여해 가장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른 스탠드업 시간이 채택된다. 왜 11시인지, 왜 11시30분인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회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그냥 일방적으로 ‘몇 시’라고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다. 일상에서의 민주주의인 셈이다.

이지헌 블루스파이럴 개발팀장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기반한 정치 플랫폼을 구축했다. 페이스북을 사용하면서 특정 정치 의제에 대한 토론, 토론에서 이어지는 행동 제안 등이 제대로 되기 어렵다는 단점을 발견하고 이를 보완해서 만들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회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그냥 일방적으로 ‘몇 시’라고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다. 일상에서의 민주주의인 셈이다.

이 팀장이 만든 정치 플랫폼은 크게 3개의 페이지를 갖고 있다. 페이스북처럼 흘러가는 뉴스피드로 구성되는 ‘퍼블릭’ 페이지와 개인이 보고 싶은 기능들을 저장할 수 있는 ‘프라이빗’ 페이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를 담아놓고 친구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액티베이트’ 페이지다. 이 팀장은 “실제로 창당을 준비하려는 모임들이 있어서 그 모임에 이 플랫폼을 제공하고 하나의 도메인에 홈페이지를 열어 사람들이 정치적 토론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개발자 이희원씨도 더 합리적으로 온라인에서 투표할 수 있는 서비스(가칭 Do Balance)를 특허 출원한 상태로 12월 안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중앙에서 통제하거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없도록 웹을 분산시켜 서버를 특정할 수 없게 만드는, 완전히 탈중앙화된 새로운 운영체제 블록체인을 국내에 보급하려는 (주)블록체인OS도 이미 출범한 상태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지만 아무도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현실에 분개해 6개월 전부터 코딩을 배우기 시작한 변형준(28)씨는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유입시키는 비장의 앱 ‘정치사이다’를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개발자들은 다양한 ‘단기 전략’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내 친구 중에 투표를 안 한 사람은 누구인가’를 찾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때요? 일단 투표하게 만드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세금 도둑 감시하는 앱도 필요할 것 같아요.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내 생활에 피해가 가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가입자가 자기 지역구를 입력하면 해당 지역구 소속 국회의원, 지방의회 의원이 세금을 사용하는 내역을 매일 업데이트하는 앱이 있다면 제대로 된 감시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헬조선’을 구하려는 IT 개발자들

12월18일에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는 대안학교 꿈이룸학교에서 ‘한국을 해킹해’(Hack Korea)라는 행사도 열린다. IT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와 기술로 ‘헬조선’이라고 불리는 희망 없는 한국의 현실을 변화시켜보려고 ‘무언가’를 도모하는 모임이다. 무엇을 도모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이 행사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빈부 격차, 청년실업, 노동문제, 각종 부조리,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협, 편향된 언론, 공교육 붕괴, 식물인간 수준의 정치, 부실 외교, 그리고 세월호 침몰과 같은 각종 사고 등 수많은 문제가 복합적으로 벌어져 ‘헬조선’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바꾼다는 기치 아래 강호의 선수들이 모여 IT 기술로 헬조선을 구하기 위한 쿨한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여러 문제와 대책에 관한 데이터와 의견을 모아서 분석하고 시각화하면서, 의사결정을 도와주는 소프트웨어나 서비스 게임 등을 2박3일 동안 팀 단위로 모여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2박3일 동안 잠 안 자고 헬조선을 바꿀 무언가를 해보자는 IT 종사자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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