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뉴스] 이름만 빌렸거나, 숨겼거나..국정교과서 집필진 미스터리

김현수 입력 2015. 11. 27. 08:00 수정 2015. 11. 2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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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난 10월 11일 국회에서 열린 역사교과서 정상화 추진을 위한 당정협의 모습.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정부의 일방통행식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에 대한 비판여론이 거센 가운데, 지난 23일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집필진 구성 결과를 놓고 또 한번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2페이지 분량의 보도자료에는 ▦총원 47명, ▦공모와 초빙자수 ▦중학교와 고등학교 담당자수 이외에 집필진과 관련한 어떤 정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밀실 편찬’ 우려가 현실화된 것입니다.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의 사퇴로 공석이 된 상고사 대표집필 후임자, 각 시대별 집필자수, 정치ㆍ경제ㆍ헌법 등 인접 분야 학자 포함여부 등 여론의 관심이 집중된 사안에 대해서는 ‘집필에 전념할 환경 조성’을 이유로 비공개 입장을 밝혔습니다. 오히려 예정에도 없던 ‘현행 검정교과서별 집필진 수’를 자료에 담고 “기존보다 2배 이상 많은 인력을 투입해 역사적 통설을 충분히 검토ㆍ반영 할 수 있게 됐다”는 자화자찬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그간 국정화 추진 과정에서 “모든 절차를 투명하게 하겠다”던 당초 입장을 불과한 달여 만에 뒤집고 ‘깜깜이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를 감안하면 과연 집필진 구성이 제대로 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떠나질 않습니다.

▦ 석연찮은 2시간

먼저 발표 당일 국편이 보도자료를 예정보다 2시간이나 늦게 기자단에 배포한 정황에 눈이 갑니다. 당초 자료는 오후 2시에 배포하기로 예정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배포가 미뤄졌고 오후 4시가 넘어서야 겨우 받아볼 수 있었는데요. ‘왜 늦어졌는지’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박덕호 국편 역사교과서편수실장은 “자료에 통계 수치 확인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보도자료를 받아본 결과 통계수치라고 볼만한 것은 ▦국정교과서 전체 집필진 및 구성 ▦현 검정교과서별 집필진 숫자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이 중 ‘현 검정교과서별 집필진 수’가 교과서가 나온 2013년부터 이미 공개됐던 점을 감안하면, 국편이 마지막까지 고심했던 것은 ‘전체 집필진 및 구성’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 추론일 겁니다. 이를 두고 한 역사학계 관계자는 “정부가 20일까지 구성을 완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발표 직전까지 확정되지 않아 애를 먹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 초빙이 공모의 두 배…김정배 인맥?

국편은 전체 집필진 47명 중 공모로 뽑힌 사람은 17명, 초빙으로 앉힌 사람은 30명이라고 밝혔습니다. 당초 공모로 25명을 뽑겠다고 예고 했지만 결국 최종 선발인원이 그에 못 미치자 남은 인력을 초빙으로 채운 것입니다. 역사학자와 현장 교사, 학생, 시민사회단체에 이르는 광범위한 반대 움직임에 집필진 구성이 난항을 겪을 거란 우려가 컸던 만큼, 이 같은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전체 집필진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초빙은 어떻게 이뤄졌을까요. 국편 고위관계자에 따르면 대표집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중견 필자는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직접 발로 뛰어 섭외했다고 합니다. 여기자 성추행 논란 끝에 자진 사퇴한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와 고대사 대표집필자인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대표적인데요. 이들 모두 김정배 위원장과 동시대에 고대사 연구를 함께 했던 원로학자 입니다.

이와 함께 김 위원장과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은 학자들이 적지 않게 포진돼 있다는 게 국편 관계자의 전언입니다. 진재관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은 집필진 확정을 하루 앞둔 지난 19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김 위원장이 직접 필진을 꾸리고 있어 내가 정확히 알 수도 없고 모르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국편 내에서 김 위원장 이외에 집필진 면면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 입니다.

▦ 참여 권유 받은 학자들 접촉해보니

이렇게 군사작전 하듯 국정화를 추진하면서 졸속제작과 편향성에 대한 우려도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본보는 지난달 국정화 고시 행정예고 이후 한달 넘게 나머지 필진을 찾기 위해 시대별 주요 학자 20여 명을 상대로 취재에 나섰습니다. 물론 아직 집필진이 추가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김정배 위원장과 직ㆍ간접적인 인연을 이유로 참여 권유를 받은 학자 몇 사람과 접촉해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국사편찬위원회 비상임위원을 지낸 고대사 전공자 A 교수입니다. 그는 “지난 9월 김정배 위원장으로부터 권유를 받았지만, 개인적인 일로 불참의사를 밝혔다”며 “하지만 일이 마무리 되면 또 모르겠다”고 여운을 남겼습니다. 김 위원장과 ROTC선후배 관계이자 고려대에서 함께 강단에 섰던 고려사 전공자 B교수의 경우 “몇 달 전 권유를 받았고 당시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며 “(집필 참여 여부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근대사를 전공한 원로학자 C교수 역시 “지금 건강이 좋지 않다”면서도 “참여여부는 잘 모르겠다”고 언급했습니다. 또 한 학회를 이끌고 있는 D교수는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여지를 두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대답은 집필 또는 이후 심의ㆍ검토 작업에 참여할 가능성을 어느 정도 열어두고 있다는 짐작을 가능케 합니다.

▦ 이름만 빌렸거나, 숨겼거나

그러나 이들 대부분 원로학자인 만큼, 설사 참여한다 해도 실제 집필에 나설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또 일부 중견학자들의 경우 “참여의사가 없다” 또는 “거절했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학계에선 실제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는 ‘명망 있는’ 교수들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국편이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등 국책연구기관 소속 연구원들도 집필진에서 배제하지 않는다는 방침(본보 18일자 10면 보도)을 밝힌 만큼 사실상 관변학자들이 다수일 거란 관측도 나옵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집필진 구성과 관련해 두 가지 가설을 제기하는데요. 첫 번째는 집필진에 이름만 빌려준 학자들이 존재할 가능성입니다. 일부 교수들이 김정배 위원장과의 관계나 집필 거부 시 불이익 등을 고려해 이름만 올려놓는 경우입니다. 한 역사학자는 “저자 명단에는 이름을 올렸지만, 실제 집필엔 참여하지 않고 국책연구원 소속 연구원 10여 명 정도가 책을 쓸 가능성도 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전체 집필진이 꾸려졌지만 저명한 역사학자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가설입니다. 명단 및 구성원 비율을 공개하면 전문성 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어 비공개를 유지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물론 국편이 밝힌대로 ‘명망 있는 학계인사’들이 집필진에 다수 포함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정 교과서의 내용오류 및 편향성에 대한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는 점, 정부의 당초 투명공개 원칙이 훼손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집필진 면면을 밝히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킬 유일한 방법이란 점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역사는 역사학자의 몫”이라던 대통령

정부의 방침이 유지된다면 결국 교과서는 내년 말쯤 공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무렵에는 사실상 완성단계인 만큼 큰 폭의 내용 수정은 불가능할 겁니다.

정부는 국정교과서를 가리켜 ‘올바른 교과서’라고 칭합니다. 현재 ‘90%가 좌파’인 역사학계가 내놓은 검정교과서이므로 올바르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국정이든 검정이든 올바르게 만들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검증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지금처럼 극소수 정부 인사들만 정보를 공유하고 국민들에게 등을 돌린 채 집필ㆍ심의ㆍ검토가 이뤄진다면 최소한의 개선 기회조차 갖지 못한 교과서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11년 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역사는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말에 이 같이 답했습니다. “역사는 정말 역사학자들과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들이 역사를 재단하려고 하면 다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될 리가 없습니다. 나중에 항상 문제가 될 거거든요, 그게 정권 바뀌면 또 새로 해야 하고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자신의 발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진정 역사를 역사학자와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의 국정화는 시작부터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시작하는 셈입니다. 아마 현재 집필진 공개 논란은 다소 부차적인 문제일지 모릅니다.

김현수기자 ddacku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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