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 제거·금융실명제로 '명예혁명'.. IMF 사태는 '불명예'

이동훈 기자 2015. 11. 23.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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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1927~2015] [YS가 걸어온 길] 文民정부 출범.. 그후 3당 합당 승부수로 집권.. '역사 바로세우기' 내세워 전두환·노태우 구속시켜.. 차남 현철씨 구속 아픔도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은 정치 인생 전반기를 '야당 투사'로서 보냈다면, 후반기에는 대한민국 보수 정당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가 1993년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이름 붙여진 '문민(文民)정부'는 민주화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말처럼 쓰였다.

◇3당 합당 통해 집권 성공

김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 내내 군사 정권과 싸웠다. 그런 그가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는 결단을 내렸다. 당시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이른바 '3당 합당'이었다. 그리고 평생의 숙적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경제 신화의 주인공 정주영 후보와 맞붙은 3파전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193만표 차로 꺾고 대통령이 된다.

1993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 YS는 취임 당일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개방하는 조치를 시작으로 이틀 뒤엔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17억7822만원)을 전격 공개했다. "이것은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도 추진했다. 집권 전까진 '골프 애호가'였지만 막상 청와대에 입성하자 "임기 중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골프 금지령'의 기원이 됐다. 곧이어 청와대와 당·내각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운 뒤 취임 1주일이 지나서는 '금융실명제' 계획도 발표했다.

취임 9일 만인 3월 6일에는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등 군부의 핵심인 하나회 세력을 일거에 축출하는 인사를 단행한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에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문민화'를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치기도 했다. 금융실명제는 1993년 8월 대통령 특별담화 형식으로 단행됐다. 그의 재임 초기 개혁 조치는 부동산 거래 실명제, 지방자치 선거 실시 등으로 이어지면서 취임 초 국정 지지도가 90%를 넘어서는 등 국민적 인기가 크게 올라갔다.

임기 중반인 1995년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을 세상에 드러내고 곧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이어가면서 전직 대통령 두 명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으로 구속시켰다. 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1980년 쿠데타에 가담했던 신군부 인사들을 검찰이 기소하지 않자,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해 전원을 법정에 세웠다. '4·19의거'를 '4·19혁명'으로 격상했고, '12·12'에 대해서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러고는 3당 합당에서 시작됐던 군사정권과의 관계를 끊기 위해 1996년 2월에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경복궁 앞에 일제가 세웠던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을 내세워 허물었다. 한국을 선진국 클럽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시켰다.

◇북한 문제와 임기 말 외환위기

내정에서는 연이은 개혁 조치로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냈지만 대외 문제는 그리 잘 풀리지 않았다. 북한 핵 문제가 터지면서 한·미 관계는 삐걱댔다. 클린턴은 북한과 직접 대화를 통해 핵 문제를 풀려고 했고, 김 전 대통령은 "핵을 가진 집단과 대화할 수 없다"고 했다.

1993년 취임 초 김 전 대통령은 김일성과 남북 정상회담을 약속하고, 남북 고위급회담과 적십자회담을 통해 이를 준비했다. 그러나 회담을 목전에 두고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죽으면서 남북 관계는 임기 내내 풀리지 않았다. 1994년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는 상황도 연출됐고, 1996년에는 강릉 무장공비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임기 4년차인 1996년까지만 해도 비교적 탄탄하게 정권을 유지했던 그는 1997년 초 아들 김현철씨가 구속되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위축됐다. 경제적으로도 기아차 사태 등 대기업 연쇄 부도가 이어졌다. 결국 외환위기로 그해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상태에서 김영삼 정부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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