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t.knowledge: 축구 역사상 최고 '넘버텐' 10인
[포포투]
축구 역사상 최고 '넘버텐' 10인
세르히오 아구에로의 등번호가 바뀌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 지금까지 16번을 달았던 아구에로는 에딘 제코가 떠나자 10번을 잽싸게 가로챘다.
축구에서 '10번'은 상징적 등번호이자 역할이다.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설계자, 그리고 지배자다.월드 No.1 풋볼매거진 <포포투>의 루이스 마사렐라가 축구 역사상 최고의 '넘버텐' 10인을 소개한다.

#10. 엔조 프란체스콜리 (우루과이)
'황태자(El Principe; 프린치페)'라고 불리는 선수가 있었다. 엔조 프란체스콜리다. 10번 계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수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리그 시절에는 '라프랑스(La Prince)'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조국인 우루과이에선 어땠을까? 그는 몬테비디오를 연고로 하는 페냐롤 입단에 실패했다. 아픈 기억을 안고 우루과이를 떠났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아르헨티나였다. 프란체스콜리의 경력은 여기서 시작한다. 리베르 플라테에서 리그 우승 5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1회를 해냈고, 득점왕도 세 차례 이뤘다.
유벤투스로부터 미셸 플라티니 대체자 제안을 거절하고 프랑스로 향했다. 마르세유에서 1년 동안 10번으로 활약했다. 누군가의 우상이기도 했다. 엔조 지단이라고 들어보았는가? 지네딘 지단의 아들이다. 지단은 아들에게 자기 우상 이름을 지어줬다.

지주(Zizou; 지단의 애칭)와 프란체스콜리는 공을 양발로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잔디를 미끄러지듯이 달린다. 프란체스콜리는 골대 앞에서 그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줬다. 특히 오버헤드킥과 데드볼(dead ball - 프리킥, 코너킥)을 좋아했다. 그는 두 차례 월드컵에 출전했다.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컵을 두 번이나 들어 올렸다. 그리고 1995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9. 미카엘 라우드럽 (덴마크)
글렌 호들, 엔조 시포부터 뤼트 훌리트, 데니스 베르캄프까지 북유럽은 10번 풍년을 이었다. 개중 단연 최고는 라우드럽이다. 1994년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라우드럽은 예외였다. 분노는커녕 두 팀에서 모두 사랑받았다.
누캄프에서 그는 요한 크루이프의 드림팀의 주역이었다. 그가 호마리우에게 보지도 않고 패스하는 모습이 전설이다. 당시 레알의 호르헤 발다노 감독은 "그의 눈은 사방에 달렸다"라고 극찬했다. 1982년 덴마크 국가대표팀에 승선해 능력을 제대로 터뜨렸다. 자신감을 얻은 덴마크도 더욱 대담해졌다. 라우드럽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우루과이전에서 엄청난 솔로골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의 행보는 아쉽게도 감독에 의해 삐걱거렸다. 1992년 덴마크의 유로 우승 당시 리차드 몰러-닐슨과 불화로 대표팀 경력을 마감했다. 크루이프는 1994년 UEFA 챔피언스리그 밀란과의 결승전에서 라우드럽을 제외했다. 바르셀로나는 밀란에 0-4로 패했다.
#8. 리오넬 메시 (아르헨티나)
메시는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19번으로 뛰었다. 2008년 호나우지뉴가 바르셀로나를 떠나며 메시에게 10번을 물려줬다. 그러나 전형적인 10번은 아니다. 그 위치에서 서지만 출발 지점이 조금 다르다. 스트라이커 뒤가 아닌 오른쪽 측면에서 시작해 '가짜 9번(false nine)'으로 기능한다.

메시는 힘, 속도, 드리블 기술, 시야, 왼발 슈팅을 모두 갖췄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르헨티나에선 자신의 '슈퍼휴먼' 면모를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6시즌 연속 평균 경기당 1골 이상 같은 기록 말이다.
#7. 지쿠 (브라질)
월드컵에 입 맞추지 못한 최고의 스타가 바로 브라질의 '하얀 펠레' 지쿠다. '아르투르 안투네스 코임브라'라는 본명 대신에 '지쿠(Zico)'라는 애칭으로 알려진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후 영국 축구계에서도 그를 흉내 내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케니 달글리시와 케빈 키건이 갑자기 평범해 보였다.
지쿠의 몸은 연약했다. 그러나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풋살로 연마한 몸놀림으로 플라멩구 역사상 최고 레전드가 됐다. 브라질 가수 조르지 벤 조르는 '카미사 10 다 가비아(Camisa 10 da Gavea; 최고의 10번)'라는 곡을 지쿠에게 헌정했다. 1983년 지쿠는 우디네세로 이적해 유럽 생활의 정점을 찍었다. 세리에A 득점 순위에서 미셸 플라티니와 한 골 차이로 2위로 올랐다. 플라티니보다 네 경기를 덜 뛰었다.

대표팀에선 클럽에서만큼 빛나지 못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3위에 올랐다. 득점력과 양발 모두 사용하는 재주는 대단했지만,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지 못했다. 4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6. 게오르게 하지 (루마니아)
하지는 '카르파티아의 마라도나'라고 불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중심적이며 화를 잘 냈다. 그리고 주로 왼발을 사용했다. 하지는 1980년 후반 슈테아우어 부쿠레슈티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철의 장막이 걷힌 후 뒤늦게 서유럽으로 향했다. 그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모두 몸담았다.
라리가에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갈라타사라이로 이적했다. 성공적이었다. 갈라타사라이의 유일한 UEFA컵 우승에 공헌했다. 하지는 지성과 실력을 모두 갖췄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3골을 넣으며 루마니아의 8강 돌풍을 이끌었다. 콜롬비아전에서 나온 36m 장거리슛이 하이라이트였다.
#5. 미셸 플라티니 (프랑스)
지단은 레전드다. 프랑스 대표팀에서 10번으로 뛰었다. 그러나 엄밀히 그는 '진짜' 10번이 아니었다. 유벤투스에선 21번으로, 마드리드에선 5번으로 뛰었다. 지단은 미드필더로 뛰며 전성기의 나날을 보냈다. 자유롭게 공수전환을 하며 두 역할을 모두 해냈다. 그의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반면 플라티니는 "다소 피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플라티니 정도라면 굳이 많이 뛸 필요가 없다. 그의 득점력은 엄청났다.

플라티니는 양발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패스와 득점 장면에서 나오는 드리블은 언제나 대단했다. 프리킥도 천재적이었다. 힘을 빼고 툭 차면 공은 정확히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1980년 중반 3년 동안 유벤투스와 프랑스 대표팀에서 플라티니는 절대적이었다. 당시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대체 불가능'이다. <포포투> 인터뷰에서 플라티니는 "나는 세계 최고였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곤 "듣고 싶은 대답이 그거죠?"라고 되묻는다. 겸손한 사람 같다.
#4. 로베르토 바조 (이탈리아)
유니폼 등번호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선수들이 있다. 메시는 올여름 신입생으로 들어온 아르다 투란에게 자기 등번호 10번을 권유했다. 그러나 바조는 예외였다. 1998년 인테르나치오날레에 입단하자 당시 최고 골잡이였던 호나우두가 등번호를 9번으로 바꿔야 했다. 그는 기꺼이 10번을 바조에게 양보했다. 플라티니는 바조를 "9.5번 선수"라고 정의했다.
바조는 골을 넣는 타입이 아니었다. 단, 최고의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원더골로 자신을 알렸다. 바조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선수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전술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뛰는 보기 드문 선수이기도 했다.

옥에 티는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에서 나온 승부차기 실축과 무릎 부상이었다. 브레시아에서 은퇴했을 때도 등번호 10번을 달았다. 2004년 스페인전에서 바조는 미콜리와 교체되며 아주리 팬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탈리아 팬들은 바조의 이름이 새겨진 대형 유니폼을 내걸어 레전드를 축복했다. 그는 주장 완장을 차고 있었고, 37세였다.
#3. 펠레 (브라질)
가장 유명한 10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두 가지 사실을 소개한다. 펠레는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10번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브라질축구협회가 등번호 제출을 깜빡 잊었다. FIFA가 임의대로 브라질 선수단의 등번호를 정했는데, 펠레에게 우연히 10번이 배정되었다. 당시 펠레는 17세에 불과했다. 부상으로 첫 두 경기를 뛰지 못했지만, 복귀 후 역사를 썼다.

축구 황제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10번의 대명사이면서도 사실 플레이스타일은 10번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 그는 센터포워드였다. 하지만 기량이 워낙 뛰어나 경기 중 눈길을 사로잡는 패스와 드리블, 발기술을 선보여 '플레이메이커'처럼 보였을 뿐이다. 영광의 1970년 월드컵에서도 펠레의 포지션은 토스타우보다 앞이었고, 리벨리누와 자일징요의 사이 지점이었다. 우연한 10번이 가장 유명한 10번이 된 셈이다.
#2. 페렌츠 푸스카스 (헝가리)
10번 포지션과 역할 개념이 자리 잡아갈 때 등장했던 최초의 10번 스타였다. 1928년 아스널이 처음 도입한 등번호는 푸스카스 시절까지만 해도 비교적 새로운 개념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푸스카스는 헝가리 국가대표팀으로 처음 출전했다.
펠레처럼 그는 득점 기계였다. 경기당 평균 1골을 기록했다. 소속팀에서든 대표팀에서든 기복이 없었다. 항상 엄청난 골잡이와 함께 뛰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푸스카스의 득점력은 더 대단해 보인다. 부다페스트 혼베드에서는 코츠시스와, 레알에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함께 뛰었다.

그는 작은 키에 통통한 체형을 가졌다. 게다가 한쪽 발만 사용했다. 문제는 없었다. 푸스카스는 "누구든 한번에 한쪽 발밖에 못 쓰잖아"라는 어록을 남겼다. 그는 완벽에 가까운 기술과 경기에 대한 높은 이해력을 보이며 최고의 10번으로 올랐다. 또한, 푸스카스는 토털 풋볼의 조상 격인 '매직 마자르(헝가리 대표팀)'의 핵심으로서 경기를 뒤집는 '조커' 역할도 했다.
#1.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나)
그는 최고의 골잡이가 아니었다. 우승 경력이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디에고 마라도나는 누구보다 위대했다. 마라도나의 별명은 '엘디에스(El Diez)'였다. '10번'이라는 뜻이다. 별명이 '10번'이라니.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오지 아르디예스(플레이메이커)가 달았던 1번 유니폼을 기억하는가? 아르헨티나가 알파벳 순으로 등번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마라도나는 예외였다. 스물한 살 마라도나는 이미 천재였다.

그는 경기장을 미친 듯이 누비며 평범한 동료들을 최고 선수로 만들어줬다. '그저 그런' 팀들을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때부터 10번을 꿈꾸는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르테가, 사비올라 그리고 리켈메다. 그러나 누구도 마라도나를 대체하지 못했다. 메시가 그의 10번을 물려받은 유일한 후계자다.
에디트=홍재민, 글=Louis Massarella, 번역=정재은, 사진=Gettyimages/멀티비츠, 포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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