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입주 여성 수백장 '도촬'..성범죄는 무혐의?

김수연 2015. 11. 10.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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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쉬지 않고 공부하다, 밤늦게 3.3제곱미터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고시원의 작지만 아늑한 내 방에 들어서니 비로소 하루가 끝난 기분이었죠. 씻으려는 순간, 택배를 두고 온 게 생각났습니다. 택배는 주로 아래층에 있는 고시원 총무실에서 맡아 두고 있었습니다. 총무실로 계단을 내려가는데 마침 총무님이 보였습니다. 택배를 가지러 왔느냐며, 얼른 오라고 하시더군요. 계단을 한 발짝 내려가는데, 총무님 안경에 무언가 비친 게 보였어요. 모두가 자는 늦은 밤이라 불이 거의 꺼져 있었는데, 총무님께서 보고 계신 스마트폰 화면이 안경에 비친 거였죠. 스마트폰을 저를 향해 들고 계셨거든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안경에 사람이 비치더라고요. 이상해서 손을 올려 보니 안경에 비친 사람도 손을 올렸습니다…."

■ 사건의 시작

지난달 13일 밤 11시경, 서울의 한 고시원 여성 입주민이 겪었던 일을 진술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여성은 고시원 관리 직원(총무) A 씨가 자신을 찍고 있다고 판단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은 A 씨의 스마트폰을 뒤졌고, 여성 입주민들의 얼굴과 속옷 등을 찍은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곧장 A 씨와 함께 인근 지구대로 향한 입주 여성 10여 명은 A 씨의 스마트폰에서 자신들의 사진을 확인했습니다.
지구대에서 사건을 넘겨받아 수사를 시작한 경찰은 A 씨의 범행과 관련해 성범죄 혐의 적용이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어차피 방실침입죄(주거침입죄)만 적용될 것 같다. 사진의 수위가 낮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결국, 경찰은 A 씨를 '방실침입죄는 기소 의견, 성폭력처벌법은 무혐의를 전제로 한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성범죄는 사실상 무혐의로 판단한 겁니다.

■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약칭: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처벌의 조건

경찰은 법에 따라 판단했다는 입장입니다. 현행 성폭력처벌법 제14조는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하여' 촬영하거나 촬영물을 배포할 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성적 수치심이나 욕망을 유발한다'고 판단되는 정도의 2)'타인의 신체'를 촬영해야만 이 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A 씨는 상당 부분, '속옷을 입고 있는 여성의 몸'이 아닌 '속옷' 자체를 찍었습니다. 속옷은 당연히 '신체'가 아니므로 성폭력처벌법의 조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경찰은 A 씨가 (속옷을 촬영하기 위해) 여성들의 방에 무단으로 들어간 방실침입죄에 대해서만 혐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경찰은 또, A 씨가 찍은 여성들의 모습이 '성적 수치심이나 욕망을 유발할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빨래하는 일상적인 모습이나 얼굴을 찍었기 때문에, 예컨대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확대해서 찍은 경우와는 다르다는 거죠. 초상권 침해가 될 순 있겠지만, 성범죄는 아니란 겁니다.
경찰의 이런 판단을 뒷받침하는 판례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5월에는 '스키니진'이나 '레깅스'를 입은 여성들의 다리를 수개월씩 촬영한 20대 남성에게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 남성이 찍은 사진들은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월에는, 허리 부위가 조금 노출된 옷을 입고 앉아 있던 20대 여성을 몰래 촬영한 남성에게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1심에서 법원은 남성이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여성의 전체 모습을 촬영했고, 여성의 자세가 특별히 성욕을 불러일으키거나 과도한 노출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는데요. 대법원도 같이 판결한 겁니다.

■ ‘성적 수치심’?

물론 일부 피해자들은 반발합니다. 아무리 일상적인 사진이어도 본인은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는 거죠. 한 피해자는, "A 씨가 내 전신을 찍은 다음 다리만 확대해서 간직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게 성범죄가 아니냐"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여성 단체의 한 활동가는 주관적인 개념인 '성적 수치심'을 사진의 이른바 '수위'만으로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몰래 찍힌 사진이 가슴이나 엉덩이 등 '성적'이라고 여겨지는 부위와 가까울수록 재판부가 죄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누군가에겐 다리를 찍힌 게 아주 수치스러울 수 있다는 거죠.
물론 성범죄를 무조건 확대해서 해석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사건을 다각도에서 종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촬영된 사진만을 기계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어떤 의도로 행동했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취재 후

경찰청과 법무부 통계를 보면, 도촬 행위 적발 건수는 2년 새 3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몰카 범죄의 양상도 다양해지고 있는데요. 이에 따라 일부 의원들은 몰카 범죄의 처벌 수위를 강화하는 법안, 몰카의 유통 자체를 총포류처럼 엄격하게 관리하는 법안 등을 발의해 놓은 상태입니다.
취재를 마치며, 무엇보다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피해자는 "별거 아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후유증이 크다. 다른 곳으로 옮기긴 했지만 지금도 고시원에 거주하고 있고, 총무도 남성이다. 자꾸만 두려운 생각이 든다."며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이제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됩니다.

[연관 기사] ☞ [단독] 고시원 직원, 여성 방 드나들며 ‘도촬’(2015년 10월 15일)

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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