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자를 향한 기도 "저들을 용서하소서"

2015. 11. 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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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주여, 이 죄인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이 겨레, 이 나라를 가난과 재앙에서 건져주시옵고, ‘한얼’을 축복해주시옵소서. 이제 이 죄인은 주의 뜻을 받들어 주의 품에 육신과 혼을 기탁하오니….” ‘아멘’ 소리와 함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이 튀었다.

수산교 아래 학살 현장, 이제는 학살자도 없고 학살당한 이도 없다. 무심하게 흐르는 낙동강 곁으로 소슬한 늦가을 바람에 갈꽃이 뒤척일 뿐이다. 귀 기울이면 들릴까.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희가 하는 짓을 모릅니다.’

군용 트럭은 창원군 마산리를 지나 일동리로 가고 있었다. 8월1일 자정을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물결이 보였다. 낙동강이었다. 학살자들은 수산교 밑 나루터에 차를 댔다. 카빈총을 멘 군경에 등을 떠밀려 모래밭에 섰다. 음력 열여드레, 붉게 충혈된 달빛에 군인과 경찰의 얼굴이 보였다. 총구가 그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목사이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 담담하게 부탁했다. 인솔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여, 이 죄인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이 겨레, 이 나라를 가난과 재앙에서 건져주시옵고, ‘한얼’을 축복해주시옵소서. 이제 이 죄인은 주의 뜻을 받들어 주의 품에 육신과 혼을 기탁하오니…, 주여 남기고 가는 저들을 보호하옵소서.” ‘아멘’ 소리와 함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이 튀었다.

선교사들이 ‘한국의 페스탈로치’로까지 칭송했고, 교육학계의 원로 심진구 명예교수가 1968년 쓴 논문에서 ‘한국 교육의 성자’로 칭송했던, 경남 김해 진양읍 한얼중학교 교장 강성갑 목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마을 유지와 군인과 경찰이 공모해 그를 죽인 이유는 단지 ‘공산주의자’라는 것 하나였다.

그러나 요즘 ‘빨갱이 잡기’에 앞장서는 김동길씨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한국인 강성갑의 가슴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고 믿는다.”(한 인터넷매체에 기고한 ‘내가 가장 존경한 사람’이라는 글에서). 박형규 목사에게도 그는 “해방 후 사회적 사상적 혼란 속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강 목사를 부산의 대형 교회(초량교회)에서 보잘것없는 김해 진영교회로 초빙하는 데 앞장섰다. 요청을 받은 강 목사는 다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농촌운동을 해도 좋겠습니까?”

고 조향록 목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6·25사변에서 귀한 인재들을 무수히 잃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별이 강 목사님.” 조 목사는 민주화운동의 길을 걷다가 전두환 체제에서 국보위 입법회의에 참여했다. 그는 강 목사가 학살당한 이듬해 스승인 장공 김재준 목사의 설득으로 한얼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강 목사는 1912년 경남 의령 지정면 오천리 웅곡마을에서 태어났다. 13살에 초등학교 4학년으로 들어갔고, 3년 뒤 마산상업학교를 마쳤으며, 인근 장유에서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하다가 뒤늦게 1937년 연희전문 신학과에 들어갔다. 일본 도시샤대학 신학부에 유학한 후 1943년 귀국해 초량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온갖 고초를 겪은 강무갑 선생은 그의 동생. 1945년 11월 경상남도 교사 양성소에서 4기생까지 배출했고, 1946년 9월엔 국립부산대학교의 전신인 부산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유학 시절, 그는 덴마크 중흥의 할아버지로 추앙받는 니콜라이 그룬트비의 신학과 사상과 실천에 심취했다. 덴마크가 비옥한 땅을 프로이센에 빼앗기고 척박한 유틀란트로 밀려났을 때 그는 애토(愛土), 애린(愛隣), 애천(愛天) 등 3애 정신 아래 절망한 민중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재기의 의지를 끌어냈다. 그룬트비는 목회자에 머물지 않고, 정치가가 되어 모든 국민이 고등교육을 받고, 모든 농부가 농지를 가질 수 있는 제도를 정초했다.

강 목사는 1946년 복음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면서 3애 정신을 교훈으로 삼았다. 애토란 조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전통을 존중하자는 것이고, 애린이란 이웃, 곧 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자는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기에 공동선을 끝까지 추구하기 어려우므로 신앙, 곧 하나님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게 애천이었다.

그가 학교를 세울 당시 김해엔 중학교가 없었다. 이듬해 부산대 교수직을 버렸다. 1948년 1월엔 학교재단 삼일학원과 한얼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낸 뒤 교직원과 학생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교실 짓기에 나섰다. 당시 장면을 김동길씨는 ‘그리운 사람 강성갑’이란 글에서 이렇게 전한다. “학생과 함께 흙벽돌을 빚어 담을 쌓고, 담이 네 번이나 무너져도 다시 세우셨다. 농가를 방문할 때면 꼭 감나무 한 그루씩 심어주며 장래를 기대하자고 당부했다. 미장이 토목공 이발사 모두가 그에게는 똑같은 선생님이었고, 월급도 똑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 중에는 이규호(전 문교부 장관), 최죽송(전 수원농대 교수) 등이 있었다. 이듬해 3월엔 진례, 10월엔 록산에 분교를 세웠다.

한얼중학교는 경향 각지에 소문이 났다. 연희전문 시절 스승이던 외솔 최현배 교수와 연희전문 총장 언더우드 2세(원한경), 문과대 학장 백낙준 박사, 유재기 흥사단 단장 등이 학교를 다녀갔다. 동향인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은 학교 이름 작명을 도왔다. ‘얼은 사람의 마음, 뜻, 혼을 나타내며, ‘한’은 우리 민족을 나타내고, 크다 혹은 하나라는 뜻도 갖고 있으니….’

당시 지역의 경찰과 관리들은 그가 몹시 불편했다. 대개 일제 때 관리를 하거나 부역했던 그들은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피난민 구호금품을 빼돌리기에 혈안이었다. 그런 그들을 강 목사는 면전에서 질타했다.

1950년 8월2일 학교장 앞으로 진영 지서에서 한 통의 공문이 왔다.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모집하겠으니, 아무 날 몇시까지 소집하라는 내용이었다. 강 목사는 두말하지 않고 공문을 찢어버렸다. 당시 학도병 대상은 고등학생이었다. 중학생은 대상이 아니었다. 지서장, 부읍장, 청년회 간부 등은 그에 대한 처리를 공모했다. 마침 특무대에서 지서에 회색분자 명단을 요구했다. 지서장은 강 교장과 학교재단 이사장인 최갑시의 명단을 건넸다. 군경은 그날 밤 강 목사를 체포해 수산교 밑으로 끌고 갔다.

그를 회색분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은 이유는 이렇다. 첫째, 그가 불온한 모임에서 자주 강연을 했다.(그를 부른 것은 농민들이었고 교회와 학교였다.) 둘째, 학교에 국기를 게양하지 않았다.(그때 학교는 짓는 중이었다.) 셋째, 학교재단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생산된 성냥곽에 소련 국기와 비슷한 괭이가 그려져 있었다. 넷째, ‘빨갱이’ 안창득 한얼중학교 이사의 선거운동을 도왔다.(안씨는 재판을 받고 복권돼 2대 총선에 출마했다.) 다섯째, 학생들이 행사 때 삽이나 괭이를 메고 시가행진을 했다. 여섯째, 졸업식을 밤에 하고, 학교에 써 붙인 표어가 모두 빨간 글씨였다!(표어란 성경 구절이었다.) 일곱째, 교직원과 가족이 공동생활을 했다.(가난한 교직원과 가족은 한 푼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공동생활을 해야 했다.) 여덟째, 학생들의 학도병 모집을 거부했다. 65년이 지난 요즘 부활하고 있는 ‘빨갱이 식별법’의 모델이었다.

1954년 5월, 진영에선 그의 장례식이 열렸다. 함태영 부통령을 비롯해 최현배, 백낙준 선생 등 정계 학계 교계 인사와 진영 인근 주민 2천~3천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그에게 찍힌 낙인이 씻긴 것은 아니었다.

전쟁 중 수많은 민간인 학살 주동자 가운데 유일하게 진영 지서장이 사형에 처해지긴 했다. 미국 교계가 들고일어나자 강 목사를 학살한 주범들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판부는 지서장 사형, 다른 공모자 징역 10년 등의 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전시 최종 처분권을 쥐고 있던 경상남도 계엄사령부(사령관 김종원 대령)는 지서장을 제외하고 모두 무죄방면했다.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강성갑은 공산주의자이니, 그를 죽였다 해도 무죄”라는 것이었다. 지서장은 마을 처녀 강간미수 및 살해 사실도 병과돼 있어 처형을 피하지 못했다.

수산교 아래 학살 현장, 이제는 학살자도 없고 학살당한 이도 없다. 무심하게 흐르는 낙동강 곁으로 소슬한 늦가을 바람에 갈꽃이 뒤척일 뿐이다. 귀 기울이면 들릴까.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희가 하는 짓을 모릅니다.’ 그 뜻을 따라 부인은 지서장에 대한 선처를 정부에 호소했다. 한얼중학교의 본래 터였던 현 진영여자중학교엔 그의 흉상이 보일 듯 말 듯 한 귀퉁이에 숨겨져 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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