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야 놀자] 비틀즈 해체 45년, '그들의 열흘'

뉴미디어뉴스국 2015. 10. 3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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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뮤지션, 비틀즈의 열흘

'20세기 음악의 키워드를 단 하나만 고른다면?'

많은 이들이 같은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2015년은 비틀즈란 이름으로 첫 공연을 한 지 55년,
'Let It Be' 앨범을 끝으로 해체한 지 45년,
존 레논이 세상을 떠난 지 35년이 되는 해이다.

문자로 기록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뮤지션,
'비틀즈'의 역사적인 열흘로 떠나보자.

하루 / 1957년 7월 6일
'완전히 다른' 두 천재의 첫 만남
17살 존 레논은 '쿼리맨'이라는 록 밴드를 이끌었다. 한 교회 축제에서 공연을 했는데, 이 때 15살 소년이 “밴드에 합류하고 싶다”며 다가왔다.

폴 매카트니였다. 훗날 20세기 최고의 작곡가가 된 두 소년의 첫 만남이었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1958년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을 만나고, 2년 뒤 밴드 이름을 ‘비틀즈’로 바꿨다. 그 해 12월, 고향인 영국 리버풀 캐번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이듬해 11월 9일, 작고 허름한 캐번 클럽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지역 음반사를 운영하고 있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었다. 그 날 처음 비틀즈의 공연을 본 그는, 4주 뒤 비틀즈와 매니저 계약을 체결했다. 비틀즈가 전국적인 스타, 나아가 세계적인 스타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었다.

“비틀즈의 첫 인상? 단정하거나 깔끔하지는 않았다. 연주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음식을 먹고 잡담을 하고 서로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관중은 대단히 흥분했다. 무엇인가 인간 자기력 같은 것을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그들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 브라이언 엡스타인

그는 비틀즈의 인기가 절정이던 1967년 갑자기 사망했다.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이었다. 훗날 미국 빌보드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비틀즈라는 가장 큰 파티를 열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초대하는 것을 잊고 살아간 남자”

사흘 / 1962년 10월 4일

비틀즈, 세상에 나오다
비틀즈의 첫 싱글 〈Love Me Do / P.S I Love You〉가 발표됐다. 차트 17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둔 뒤, 이듬해 3월 첫 정규 앨범 <Please Please Me>를 발매해 차트 1위에 오른다.

<Please Please Me>는 영국 톱10 차트에 62주 동안 머물렀다. 비틀즈 신드롬이 시작된 것이다.

나흘 / 1964년 2월 7일

The British Invasion ‘영국 록’의 미국 점령
“지금은 비틀즈 시간으로 오전 6시 30분입니다. 그들은 30분 전에 런던을 떠났습니다. 뉴욕을 향해 대서양을 건너오고 있는 중이군요. 비틀즈 주변의 온도는 32도입니다.”

비틀즈를 태운 비행기가 런던을 출발해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방송은 마치 마라톤 중계하듯 실시간으로 이 영국인 4인조 밴드가 입국하는 모습을 생중계했다. 이미 수만 명의 ‘비틀 마니아’가 뉴욕 공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British Invasion(영국 록의 점령)’의 시작이었다.

이틀 뒤에는 비틀즈가 출연한 TV프로그램 ‘에드 설리번쇼’ 가 방송됐다. 이날 방송은 당시 최고 기록인 시청률 45%를 기록했다. ‘범죄의 도시’로 악명 높았던 뉴욕이었지만, 방송 시간 내내 사소한 절도 사건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닷새 / 1964년 4월 4일

빌보드를 점령하다
미국 진출 뒤 한 달 만에 비틀즈는 싱글 〈Can't Buy Me Love〉를 미국에서 발표한다. 이 노래는 단숨에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달인 1964년 4월 4일, 빌보드 사상 초유의 대형 사건이 일어난다. 싱글차트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비틀즈의 노래로 채워진 것이다.

이 날을 시작으로 비틀즈는 7년 동안 총 20곡을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려놓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엿새 / 1967년 6월 1일

무대를 떠난 비틀즈, 음악을 완성하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발매된 날이다.

“예수보다도 유명하다”는 설화(舌禍)로 곤욕을 치른 비틀즈는 1966년 ‘더 이상 콘서트 무대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녹음실로 숨어 버렸다. 비틀즈를 대표하는 명반이 잇따라 발표된 시점은 바로 이때부터다. ‘공연용 음악’에서 해방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실험하고, 대중음악에서 사용하지 않은 악기들도 다양하게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이 앨범은 백미였다. 대중음악 최초로 5/4박자 음악이 탄생했고, ‘콘셉트 앨범’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도 생겨났다.

이레 / 1969년 1월 30일

The Rooftop Concert(옥상 콘서트)
3년 동안 콘서트를 하지 않던 비틀즈는 어느 날 자신들의 음반사인 애플 스튜디오에서 녹음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즉흥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점심시간, 갑작스럽게 런던 도심 한복판에 있는 건물 옥상에 나타난 비틀즈. 당연하게도 일대는 마비됐다. 주변 모든 건물 창문이 열렸고, 도로는 옥상을 올려다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소음 규정을 위반했다’며 경찰이 오기 전까지 42분 동안 공연은 계속됐다.

여드레 / 1969년 3월 20일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결혼식
존 레논은 첫 번째 부인 신시아와 이혼한 뒤, 1969년 일본의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와 재혼했다. 요코를 만나면서 존 레논은 본격적으로 ‘평화운동가’로 변신했다. 그 해 두 차례에 걸쳐 ‘반전·평화를 위한 침대 퍼포먼스(Bed-in)’를 벌였고, 싱글 <Give Peace a Chance>를 발매하기도 했다.

반면 존은 ‘영혼의 단짝’이었던 폴 매카트니, 그리고 비틀즈와 점점 멀어져갔다.

아흐레 / 1970년 4월 10일

굿바이, 비틀즈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갈등은 결국 봉합되지 않았다. 폴은 영국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비틀즈 해체를 공식 발표한다. 다음 달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 <Let It Be>가 발매된다.

10년간 세계를 뒤흔들었던 비틀즈는, <Let It Be>를 끝으로 음악사에서 ‘영구 결번’됐다.

열흘 /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 사망
존 레논은 뉴욕의 한 아파트 앞에서 총에 맞아 숨진다. 그의 열성적인 팬이자 사진사였던 마이클 채프먼이 저격했고, 부인 오노 요코가 곁에 있었다.

‘20세기 최고의 뮤지션’의 죽음에 유례없는 추모 열기가 이어졌다. 존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관계가 악화됐던 폴 매카트니는 이렇게 그를 추모했다.

“그가 예술과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는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존 레논은 유일한 나의 동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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