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도'에 제대로 나오지 않은 5가지 역사

2015. 10. 5.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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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OC=이담비 객원 에디터]  영화<사도>는 이준익 감독의 연출, 송강호와 유아인의 연기 그리고 뛰어난 역사적 고증을 기반으로 많은 이들에게 입소문을 타고 있는 영화다.

 

고증에 집착한 나머지 심심한 연출이 나온 것 같다는 불평도 간혹 있지만많은 조미료가 가미된 사극에 비해 담백하고 담담한 연출이 <사도>흥행의 키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사랑하는 역사 덕후들은 역사와 영화를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소한 장면 하나하나 까지 열정적인 고증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세손(정조)가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에게 물을 가져다 주는 장면에서 그를 가로막는 병사에게 이름이 무어냐, 내 너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했던 장면은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일이다. 후에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 병사에게 벌을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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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고증이 얼마나 제대로 되었는 지, <사도>속실제 역사를 비교하려고 했으나, 일일이 정리하기에는 너무 그 양이 방대했다. 그래서 차라리 고증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 5가지를 알아보려고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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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세자는 뒤주에 갇힌 뒤 8일만에 죽었다

 영조는 사도를 뒤주에 가둬 놓고 매일 신하들에게 보고를 받았다. 3일째 되던 날 사도가 도망가자 뒤주를 꽁꽁 묶은 것 역시 실제 역사와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8일째 되던 날 훗날의 역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뒤주에 아들을 가둬야만 했던 영조의 부정이 느껴지던 장면이다. 영조는 7일 째 되던 날 신하들에게 사도가 죽은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확실하지 않으니 하루 더 지켜보라고 명한다. 실제로 야사에 영조가 사도의 죽음을 확인했다는 장면이 있으나, 애틋함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o:p></o:p>

또한 정말화가 나서 뒤주에 갇히라는 명령을 내렸는 가에 대해서도 불분명하다. 영화에서 영조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지만 신하에게 눌려 사는 왕으로 그려졌다. 실제 영조는 매우 치밀하고 계산적인 왕이다. 사도세자가 자결하지 않고 사약을 내리거나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 사도의 아들인 정조는 왕위에 오를 수 없게 된다. (오른다하더라도 정통성에서 책을 잡히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사도세자의 죄 명은 반역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세자가 자결하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영조가 홧김이 아닌 뒤주를 미리 준비해 놓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이 나오고 있다. (자택감금 역시 경국 대전에 나와있는 형벌이다. 경국대전을 피해서 세자를 제거할 수 있었던 방법은 뒤주밖에 없었다. 왜 하필 뒤주이냐가 아닌, 뒤주 일 수 밖에 없다가 더 옳은 표현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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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삼정승은 사도가 폐위되자 자결했다


사실 삼정승의 자결에 대한 부분은 야사로도 역사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자결했다는 주장과 함께 암살당했다 혹은 도망갔다 등 여러 설이 나오고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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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세자가 갇히던 날, 영조를 만나러 갈 때 정조와 함께 동행하려 했다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를 데려가려 한 것 외에도 어린 세손의 모자를 쓰고 가려고 했다. 큰일을 예감한 사도가 죄를 덜 물기 위해 미친 것 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를 재빨리 눈치 채지 못한 혜경궁은 사도에게 빨리 가라며 등을 떠밀었고, 사도는 혜경궁에게 자네 참 흉한 사람이구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후에 이 뜻을 알아차린 혜경궁이 급히 모자를 찾아 왔지만 세자는 거절했고, 그는 그날 뒤주에 갇혔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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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의대증에 시달리던 세자는 옷을 입혀 주던 내관 김한채를 칼로 그어 죽였다

 

문안 인사를 드리러가던 중, 의대증으로 인하여 옷을 여러 번 찢고, 화를 이기지못하여 김한채를 죽인 것은 실제 역사와 동일하다. 다만 영화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것은 김한채 뿐만아니라 자신의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죽인 사람이 100여명이 넘는 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화와 비, 궁들이 쉬쉬하여 영조는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는 이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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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시기, 신하들의 눈치를 보던 영조와 달리 오군영을 개편하라고 명령한다

 

이 부분은 고증이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균역법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에 진행된 법안은 옳으나, 영조가 세자에게 일임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진행한 법안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사도세자는 개혁적인 성향을 많이 보였고, 사도세자와 영조의 정치적 성향은 극과 극을 달렸다고 한다. 또한 대리청정을 하면서 사도세자를 윽박지르고 비꼬았던 영조의 모습은 100% 사실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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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사실 사도세자와 영조와의 관계에서는 많은 정치적 이야기가 오가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사실은 그대로 데리고 오나, 초점을 달리 했다. 현대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코드인 부자간의 내면적 이야기를 녹여낸 것이다. 앞서 본문에서는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를 적었지만, 야사와 부합하거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충분히 추측 가능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즉 진실은 아니나, 있음직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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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에필로그가 아쉽지만 에필로그 마저 철저한 고증으로 이루어진 이준익 감독의 <사도>는 의상부터 OST까지, 역사를 좋아하는 역덕후들에게는 단비 같은 영화다.

 

뮤지컬 <명성황후>, 사극 <선덕여왕>같은 컨텐츠는 흥행은 했더라도 좋은 컨텐츠가 될 순 없다. 이준익 영화의 성공은 제대로 된 고증으로 흥행 가능한 컨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증거가 되어 줄 것이다.

 


russa_@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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