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걷는 선비> 조주희 작가, 이런 크리에이티브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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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소녀를 설레게 했으니 작가의 삶도 순정 만화 같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담백했다. 현실을 살면서 판타지를 그리는 여자,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의 원작자 조주희 작가를 만났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충북 단양의 고수동굴 앞을 지나 10분쯤 더 달렸을까.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을 법한 좁은 길을 지나자 동화 속에서나 본 듯한 단독주택 한 채가 나타났다. '꽃피는 집'이라 쓰인 팻말에선 집주인이 꽤나 감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잡초 하나 없는 초록 잔디밭 위로 반짝이는 돌길을 따라 몇 걸음 들어서자 서글서글한 눈매의 조주희 작가가 맞아주었다.

조 작가는 만화 <밤을 걷는 선비>(이하 <밤선비>) <키친> <쿠키런 시리즈>의 스토리 작가다. 얼마 전 작가가 집필한 <밤선비>가 MBC 드라마로 탄생했고, 최근 그녀는 <밤선비>의 소설 버전도 쓰는 중이다. 작가를 만난 곳은 그녀의 친정 부모님 댁. 프로 작가 데뷔작인 <키친>을 처음 구상한 곳이다. 중학교 국어 교사로 평범하게 살던 그녀를 프로 작가로 재탄생시킨, 상상력의 원천지인 셈이다.
작가의 친정 부모님은 8년 전까지 서울 목동의 아파트촌에서 생활했다. 두 분은 꽃을 키우며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대로 은퇴 후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터를 잡았다. 4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 '꽃피는 집'이란다. 모르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산골 마을, 집 뒤로는 찾는 이가 없는 시냇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처음 부모님이 이곳에 정착하셨을 때 저도 아이들을 데리고 1년 정도 부모님과 함께 이곳에서 지냈어요. 저는 그때 둘째를 낳고 얼마 안 됐을 때라 휴직 상태였죠. 그때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리게 됐어요. 만화가로서 지지부진한 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 이 기회에 좀 더 밀어붙여 내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욕심이 생겼거든요."
'꽃피는 집'은 그야말로 한적한 시골집이다. 사람들이 오가는 도로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어 들리는 소리라고는 새소리, 물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뿐이다. 작가의 부모는 변변한 길도 나지 않은 곳에 집을 지었고 집에서 도로로 이어지는 작은 길도 손수 만들었다. 2층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빨간 머리 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다락방이 나타난다. 방엔 작가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책들이 빼곡하다. 유명 작가의 소설집부터 아이들이 좋아할 만화책까지. 창밖 풍경을 보다가 이곳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저문다.

"만화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려왔어요. 저도 이 지역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부모님과 나들이를 갈 때 스케치북과 물감을 꼭 챙겨 가곤 했죠. 고3 때와 임용고시를 공부할 때 빼고는 쉰 적이 없었어요.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퇴근 후엔 틈틈이 스토리를 만들고 만화를 그렸어요."
선생님 몰래 책상 밑에 만화책을 펴놓고 읽다가 혼났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만화를 그리는 선생님'은 쉽게 떠올리기 어려울 것이다. 작가의 본업이 중학교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놀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문학 작품을 가르칠 때 만화를 활용하곤 했어요. 단락별로 주요 내용을 만화로 그려서 쉽게 설명하는 식이었죠. 집중력이 부족한 아이들도 만화를 보여주며 가르치니 훨씬 잘 따라오더라고요. 사실 제가 만화가라는 사실을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에게 알리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제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다들 알게 됐어요. '선생님 만화가셨어요?' 하며 학생들이 많이 신기해하더라고요. 저조차 드라마로는 어떻게 그려졌을지 궁금해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이면 늘 TV 앞에 앉아 '본방 사수'를 하곤 해요.(웃음)"
조 작가의 작품 <밤선비>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을 그린 순정 만화다. <밤선비>는 출간 직후 한국콘텐츠진흥원 선정 '우수 만화 글로벌 프로젝트 작품'으로 선정됐고, 여러 드라마와 영화 제작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만화 판권이 드라마 제작사에 팔리는 일이 많아진 시대라지만, 그것이 실제로 제작될 확률은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밤선비>는 조 작가 본인뿐 아니라 만화계에서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대작인 셈이다.

"편집부와 작화를 담당하신 한승희 작가님과 함께 사극을 기획하면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잡았어요. 시대 자료를 찾던 중 왕이 직접 세자를 좌절시킨 '인조-소현세자'와 '영조-사도세자'에 주목하게 된 거죠. 두 시대를 연결할 수 있는 고리로 '뱀파이어'라는 장치를 사용한 거고요. 시작은 그저 지극히 만화적인 상상력이었죠."
엉뚱하다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상상도 만화가를 만나면 하나의 작품이 된다. 현실과 가상을 연결 짓는 고리가 되는 것. 그것이 조 작가가 생각하는 만화가의 소임이자 만화가라는 직업의 매력이다.
"저라고 뭐 다르겠어요? 재테크나 자녀 교육처럼 초등학생 남매를 키우는 여느 주부들과 같은 고민을 하면서 살죠.(웃음) 그런데 생활에서 우러나는 그런 고민이 창작에 꼭 필요해요. 만화는 상상에 그칠 수도 있는 것을 현실성 있게 그리는 거예요.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없죠. 그래서 전 만화를 집필하기 전에 신문도 보고 역사, 과학, 사회, 심리, 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읽어요. <밤선비>를 구상할 때도 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많이 읽었어요."

오히려 담백했다. 순정 만화 작가라면 응당 간질간질한 말 몇 마디쯤 건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소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로맨스물을 만들지만, 작가의 사랑 역시 우리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단다. 비슷한 점이 있다면 <밤선비>의 남자 주인공 '성열'처럼 올곧은 성품의 선비 같은 남자라는 것.
"조용한 사람이라 제가 그린 만화를 보고도 별 말이 없어요. 저 역시 굳이 의견을 묻지 않고요. 원래 순정 만화는 여성들이 보는 로맨스 판타지라 남자의 의견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이잖아요.(웃음) 남편이 군인이라 요즘은 주말부부로 지내요. 그마저도 제가 주말에 만화를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챙겨주고 밥도 하고, 청소도 해주죠. 말로만 응원하는 것보다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고마운 남편이에요."
불같은 로맨스는 없는 거냐고 재차 묻자, 작가는 "현실과 만화는 다른 법이잖아요" 하며 멋쩍게 웃는다. 만화는 극적 재미를 위해 연인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고 사랑을 끊임없이 시험하게 만든다면, 현실의 사랑은 서로에게 편안함을 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작가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뜨거운 동지애를 나누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그녀의 오빠를 꼽을 수 있다. 그녀와 한 살 터울인 오빠는 그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재작년 <어메이징 그래비티>라는 과학 만화를 출간하고 한국출판문화상까지 수상한 만화가 조진호씨가 바로 그녀의 오빠. 그의 직업 역시 민족사관고등학교 과학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사실 오빠는 그냥 과학책을 쓰려고 했는데, 제가 오빠에게 만화책을 내보라고 권했어요. 오빠가 마흔이 다 되어 만화계에 입문한 계기가 됐죠.(웃음) 어려서부터 오빠의 그림 실력과 이야기 구성 능력을 봐왔던 터라 잘 알고 있었거든요. 출간 전에 오빠의 작품을 보고 '오빠,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아' 하고 응원해줬는데, 그걸로 큰 상까지 수상하더라고요. 이제는 서로의 작업을 응원하는 좋은 동료예요. 제 작품에 대한 피드백은 받았느냐고요?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순정 만화라서 마흔이 넘은 오빠는 아직 읽지 않은 것 같아요.(웃음)"

남매는 평일엔 교사로 살다 주말이면 만화가가 된다. 사는 동네도 같아 매주 주말이면 집 앞 카페에서 오빠와 나란히 앉아 만화를 만든다. 만화계를 주름잡는 남매 만화가의 등장은 조 작가의 부모에게도 큰 기쁨이다. 이를 방증하듯 꽃피는 집의 집 안 곳곳에는 남매가 수상한 상패가 여럿 눈에 띄었다. <밤선비>가 드라마로 방영됐을 땐 '꽃피는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잔치를 벌이기도 했단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 했던가. 가만 보면 남매는 부모님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작가가 스토리를 만들 때 아버지는 꽃피는 집을 만들었고, 어머니는 꽃피는 집의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블로그를 개설했다. 뭔가 만들지 않으면 못 배기는 가족인 것처럼 말이다.

- 조성민(조 작가의 아버지)"우리 세대는 앞만 보고 살아왔잖아요. 그저 돈 벌어서 아이들 키우는 것밖에 모르고 살았죠. 서울 살림 정리하고 내려오고 나서야 내가 이런 것들을 뚝딱뚝딱 만드는 데 흥미와 소질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게 퍼즐 놀이랑 똑같아요. 우리가 사는 집을 하나둘씩 꾸미는 거죠. 산에 있는 나무를 주워다가 나무 위에 트리 하우스를 만들고, 냇가에서 돌멩이를 주워다가 돌담길을 만들고요. 그러다 보면 1년이 후딱 가더라고요."
- 권오정(조 작가의 어머니)"처음엔 돌담을 일렬로 쌓다가 '이거 S자로 쌓으면 더 예쁠 것 같지 않수?' 하고 S라인 돌담길을 만들었어요. 훨씬 예쁘지 않아요? 꽃을 키우다 보니 새삼 자식 농사와 꽃 가꾸는 게 비슷한 게 많구나 하고 느껴요. 양지에서 자라야 하는 꽃은 음지에 두면 안 되고, 음지에서 자라야 하는 꽃은 뙤약볕에 두면 안 되는 법이잖아요. 자식들을 키울 때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키우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은 다 저희 하고 싶은 것 하며 즐겁게 사는 모습 보니 그것이 또 제 행복이지요."
노부부의 이야기를 듣다가 깜짝 놀란 대목을 꼽으라면 할머니가 자신의 블로그를 꽤 멋드러지게 운영한다는 것. 환갑이 넘은 할머니의 블로그 사랑은 웬만한 사람들의 블로그보다 멋지다.

- 권오정"저희 엄마가 올해로 99세이신데 요양원에 누워 계신 모습을 보면 '엄마는 내 나이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고 문득 궁금하더라고요. 딸인데도 내가 그 시절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영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블로그에 적어두면 내 딸이 훗날 그걸 뒤적여볼 수 있겠다' 싶어서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주희는 뒤적여보기는커녕 댓글도 안 읽는 것 같아요.(웃음)"
이런 감수성으로 노년을 보낼 수 있다면 청춘이 부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흔하나인 조 작가가 10대의 감수성으로 살고 있는 것도 모두 부모님을 닮아서인 듯 했다. 감성도 감성이지만 근성 역시 판박이다. 10년 가까이 하나씩 만들며 집을 가꿔온 노부부와 한 작품에 5년이라는 시간을 잡고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조 작가의 모습은 많이 비슷하다.
"30대 초반에 만화가로서의 도전은 여기서 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사 생활이 점점 능숙해지고 보람도 있던 터라 '이런 인생도 참 좋구나' 하면서 안주하려고 했거든요. 꽃피는 집을 구상하고 새 인생을 준비하는 부모님을 보니 문득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샘솟기 시작한 거죠. 결국 '마지막으로 도전해보자'라는 결심이 지금의 저를 만들게 된 것 같아요."
"바람 소리인가 물소리인가 했더니 세월 가는 소리네."
할아버지가 만든 서각 작품 뒷면에 새겨진 글귀다. 제아무리 세월이 야속하다 해도 꽃피는 집의 시간만큼은 느리게 흘러갈 것만 같다.
취재: 정희순 기자 | 사진: 박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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