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가능해?" 놀라운 '라이브 드로잉'의 세계

지난 8월 22일 토요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미술 전시장. 100명이 넘는 관람객들이 모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시장 한 쪽 벽에는 A4 용지 크기의 캔버스 50개가 두 줄로 붙어 있었지요. 기다리는 관람객들은 주로 10대와 20대 젊은 층이었지만, 어린 자녀들을 데려온 부모와 외국인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다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더군요. 토요일 오후의 지옥 같은 교통 정체 때문에 정말 헐레벌떡 달려온 그날의 주인공이 전시장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너무 많이 늦은 게 미안했던지 잠깐 쉴 틈도 없이 바로 관람객들 앞에 섭니다. 그리곤 묻습니다. “뭐부터 그릴까요?” 젊은 관람객 중 하나가 “바이크요!”라고 말합니다. 오토바이 타는 장면을 그려달라는 거였죠. 우리의 주인공은 “그럴까요?”하며 아무 머뭇거림도 없이 곧바로 캔버스에 선을 긋기 시작합니다. 미술 전시장에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이 전대미문의 퍼포먼스는 우리의 주인공만의 독보적인 ‘라이브 드로잉 쇼’입니다. 숨 죽여 지켜보는 관람객들 앞에서 우리 주인공의 손은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텅 빈 캔버스에 근사한 그림들이 하나 둘 채워지기 시작했죠.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각각의 캔버스를 연결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감탄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관람객들은 탄성을 쏟아냈습니다.

▲ 전시장 전경
주인공은 바로 드로잉 아티스트 김정기 작가입니다. 아마 작가의 라이브 드로잉 장면을 이미 한 번쯤 직접 보신 분도 있을 겁니다. 저는 지난 4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아트 토이 컬쳐 2015’ 행사장에서 김정기 작가의 라이브 드로잉 장면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시장 한 가운데 커다란 캔버스를 세워 놓고 세계적인 스마트폰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을 주제로 즉석 드로잉 쇼를 선보이는 자리였는데, 그날도 정말 많은 사람이 주변을 에워싼 채 이 신기한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밑그림도 없고, 그렇다고 뭘 보고 그리는 것도 아닌데, 일반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속도로 부단히 선을 긋고 형상을 만들어나가다니 놀라고 감탄할 수밖에요. 이 장면을 화면에 담아 그날 9시 뉴스에 보도했습니다. 나중에 작가에게 얘기를 했더니 본인도 알고 있더군요. 그런데 이번엔 그보다 더 야심 찬 계획이었습니다. 작가 자신도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않았던, 캔버스 50개를 스토리 있는 그림으로 채우겠다는, 그것도 즉석에서 라이브로 보여주겠다는 것이었으니 그 주말 오후 무더위를 뚫고 금쪽같은 시간을 내서 사람들이 전시장에 모인 까닭이 이해될 만도 합니다.

▲ 라이브 드로잉 장면
김정기 작가는 사실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유명한 작가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유명 만화 페스티벌에 거의 빠짐없이 초청될 뿐 아니라, 전시도 라이브 드로잉 쇼도 해외에서 더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가 국내에서 여는 첫 번째 개인전이라고 하더군요. 1년 중 해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김정기 작가는 이미 내년까지 해외 전시 일정이 꽉 찼을 정도로 해외에서는 이미 상당한 유명 인사입니다. 단적으로,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이자 국내에도 상당한 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김정기 작가의 그림에 반해 자신의 소설 삽화를 그려달라고 의뢰했을 정도라는데요. 실제로 지금도 서점에서 만날 수 있는 베르베르의 소설 <파라다이스>를 펼쳐보면 김정기 작가의 삽화가 여러 컷 들어가 있습니다. 또, 국내 번역본에선 아쉽게도 볼 수 없지만 김정기 작가는 베르베르의 또 다른 소설 <제3인류>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김정기 작가는 국내 TV 광고도 이미 여러 편을 만들었습니다. 아래 주소를 누르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 있는 김정기 작가의 드로잉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 LG유플러스 콜라보 영상
▲ 김포풍무 푸르지오 센트레빌 광고 영상
김정기 작가의 드로잉 장면을 본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건 “어떻게 그렇게 그릴 수 있지?” 하는 겁니다. 이런저런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 이번 라이브 드로잉 쇼가 열리기 전에 전시장에서 김정기 작가를 만났습니다. 인터뷰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해 봤습니다.
“뭔가 바탕이 되는 걸 전혀 보지 않고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어떻게 저게 가능한가, 많은 분이 궁금해 하시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가요?”
- 머릿속에 배경지식을 많이 갖고 있어요. 많은 자료를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는 편이에요. 그러니까 만약 오늘 아침부터 지금 전시장까지 왔던 과정을 그리라고 해도 그릴 수 있어요. 봤던 것들, 이미지들, 차타고 오면서 창밖으로 봤던 다른 차라든지 주변 환경, 이미지들을 머릿속으로 계속 모으고 있다고 해야 하나. 중학교 때부터 영화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만약에 영화 <로보캅>을 봤다고 하면, 영화 속에서 봤던 이미지를 수업 시간에 그려보는 거예요. 훈련이라고 생각 안 했어요. 그땐 워낙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으니까. 거기 나오는 로보캅, 상대 편 로봇, 주인공, 악당들… 그래서 그림 그릴 때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해가 바뀌고 오래 쌓이다 보니까 어떤 이미지를 잡아내는 능력도 많이 생겼고, 오래 기억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이 생긴 것 같아요. 토끼를 그릴 때 귀만 크고 뒷다리만 길게 그려도 60억 인구 누구나 토끼라고 말해요. 그런 것처럼 어떤 사물의 특징을 잡아내고, 그 특징을 오래 기억하고, 그러려면 이해해야 하는 것들이 있죠. 자기가 그 동물의 이미지를 완전히 소화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꺼내 쓸 수 있어요. 어떤 각도든지 말이죠. 그래서 만약 고양이를 잘 그리게 되면 고양이 과 동물은 다 그릴 수 있게 돼요. 호랑이나 사자, 표범, 치타까지. 그런 식으로 공부해 왔어요.
“드로잉 쇼를 하실 때 즉석에서 소재가 던져지는 경우도 많잖아요?”
- 거의 다 그렇죠. 저 같은 경우는 라이브 드로잉을 할 때 준비를 하고 간 적이 없어요. 언제나 말 그대로 생 라이브에요. 가서 물어봐요. 어떤 것부터 시작할까요? 그러면 코끼리 그려주세요, 미국 같으면 좀비 그려주세요. 그럼 그걸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거죠.
“못 그리시는 건 없나요?”
- 운이 좋은지 아직까지 막힌 적은 없어요. 라이브 드로잉 하는 과정 안에서는 못 그려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동물이 됐든, 형체가 없어도 상관없어요. 뭐 구름을 그려달라고 해도 상관없고. 제가 스쳐지나가면서 봤던 거라도 조합해서 만들 수 있는 것들은 웬만한 건 다 그려요.
“그게 가능했던 원동력은 뭔가요?”
- 워낙 많이 그렸어요. 진짜로. 어릴 때부터. 제가 집에서 장남이라서 부모님께서 그림 그리는 걸 안 좋아 하셨어요. 그래도 그림은 계속 그렸어요. 깍두기공책 여백이라든지 교과서라든지 아버지께서 달력을 찢으시면 달력 뒷장은 언제나 제 것이었어요. 그 종이가 워낙 좋았으니까 가득 채워서 다 썼죠. 학교 통지표에도 언제나 그림에 소질 있습니다, 키워주십시오, 이런 게 많았거든요. 학원을 안 보내주시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학원에 보내주셨어요. 그때부터 전통적인 아카데미 수업, 석고 소묘라든지 이런 것들을 배웠는데, 배운 것도 배운 거지만 일단은 엄청난 습작이었어요. 진짜로 엄청나게 그려댔어요. 훈련이라 생각 안 하고. 워낙 좋아하니까. 옛말대로 즐기는 사람한테 못 이긴다고 하잖아요. 즐기듯이 그렸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관찰도 마찬가지인가요?”
- 예를 들어서 옷 주름에 한참 미쳐있을 때는 버스나 교실에서 계속 사람 옷 주름만 보는 거예요. 앉아 있을 때 옷 주름이 생기는가, 팔을 들어 올렸을 때는 옷 주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두꺼운 옷 얇은 옷은 어떻게 생기는가, 온전히 옷 주름에 미쳐 있은 적도 있었고요. 어떤 게 막힌다 싶으면 그 부분을 좀 더 집요하게 많이 파고든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 드로잉 작품
“국내에서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더 독보적이라는 인정을 받고 계신데?”
- 해외 사이트나 이런 데 보면 ‘마스터’라고 하거든요. 이탈리아에서는 모자를 들어서 경의를 표한다고 해요. 높은 칭찬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 칭찬을 제가 누구한테 들었냐 하면, 제가 대학교 다닐 때 <헤비메탈>이라는 프랑스 잡지가 있었어요. 굉장히 유명한 잡지인데, 그걸 보면서 유럽 만화를 처음 접했거든요. 그 전까지는 일본 만화나 미국 만화만 보다가 유럽 만화를 봤는데 충격이었어요. 와, 만화를 어떻게 이렇게 예술처럼 그리는가. 한 컷 한 컷이 하나의 일러스트였으니까요. 그런데 거기서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가 있었는데 그 작가를 2년 전에 앙굴렘(프랑스 앙굴렘에서 열리는 국제만화페스티벌)이라는 만화축제에서 봤어요. 거기서 그 작가님이 제 그림과 제가 사인하는 모습을 보고는 모자를 들어 주셨어요. 나중에 통역하는 분에게 들어보니 칭찬 중에서도 최고의 칭찬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좋아하고 또 유명한 작가한테 그런 칭찬을 받았을 땐 내가 진짜 조금 그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뿌듯했어요. 특히 해외에서는 일반인들보다는 작가들이 굉장히 좋아하세요. 제가 대학 때 그림 그리는 목표 중 하나가, 그때는 좀 건방진 목표였지만, 일반인들보다는 작가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거였는데, 지금 그걸 어느 정도 좀 이룬 거 같아요.
“만화에서 시작을 하셨지만 일러스트에도 걸쳐 있고 현대미술과의 경계에도 걸쳐 있는데,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뭔가요? 어떤 걸 해 보고 싶으신지요?”
- 그게 바로 최근에 제가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인데요. 올해 일본에서 무라카미 다카시라는 유명한 현대미술가 초청으로 5월에 일본에서 전시를 했었거든요. 그러면서 그분 작업실도 구경해보고, 현대미술이 어떤 느낌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알게 됐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밑바탕은 언제나 만화에요. 그런데 그 만화를 내가 어떻게 좀 더 좋아하는 쪽으로 바꿀 것인가, 만화를 하면 가장 좋겠지만 만화를 하면서도 하나의 일러스트,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도 재미있으니까. 우선은 가장 가까운 계획으론 내년 중반쯤에 라이브로 만화를 연재할 거예요. 보통 독자들은 완성된 만화책을 보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워낙 인터넷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유스트림(실시간 인터넷 방송)이나 유튜브 같은 데서 한 페이지가 완성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죠. 라이브로. 특정 시간대를 딱 정해서 전 세계인이 다 볼 수 있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스토리는 지금 베르나르 베르베르 쪽과 이야기가 오가고 있거든요. 올해 초에 베르베르 집에 초청받아서 갔었어요. 가서 이런 계획이 있다고 하니까 자기 이야기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렇게 해서 1주일에 사나흘 꾸준히 연재를 해서 분량이 차면 책으로 내고 동영상도 팔고.
“전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시는 거네요?”
- 아마 그런 건 저만 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아요. 라이브로 그렇게 그리기가 힘드니까요.
“좀 더 장기적으로 보면 작가로서의 욕심이나 목표도 있으실 텐데?”
- 진짜 장편을 한 번 해보고 싶고요. 미술 작품으로 생각했을 때는 진짜 좀 더 작품다운 작품, 거대한 작품, 주제가 있어서 길게 이어지는 큰 작품, 아니면 전시 같은 경우도 지금 이런 것처럼 그림이 걸려 있는 게 아니라 백지 놔두고 전시 기간에 다 채워버릴 수도 있어요. 그런 전시를 생각해보기도 하죠. 2주일이면 전시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그리는 거예요. (웃음)

▲ 드로잉 노트
만화를 라이브로 연재하겠다는 획기적인 발상이 내년엔 현실화될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성사된다면 세계 만화 역사상 처음 보는 일대 사건이 되겠지요. 김정기 작가는 이미 할리우드 영화사의 애니메이션 담당자들 앞에서 직접 강의를 한 적도 있고,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할리우드에 진출해 공상과학 영화의 비주얼 아티스트로 활동할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독보적인 솜씨와 역량을 할리우드도 인정한 겁니다. 그리고 이만큼 인정받기까지는 스스로 부단한 노력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죠. 오랜 관찰과 습작, 방대한 자료수집, 이런 것들이 뒷받침된 든든한 토대 위에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타고난 천성과 재능이 더해져서 지금의 김정기를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김정기 작가는 지금도 해외 어디를 가든 드로잉 노트를 반드시 가져가서 틈날 때마다 눈에 보이는 것, 예전에 봤던 것들을 그린답니다. 작가의 노트에 빼곡하게 담긴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뭐든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스스로 즐겁고 남들에게 인정까지 받는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 그래서 더더욱 김정기 작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김석기자 (stone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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