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손가락'의 요리명장(名匠) 박효남 세종호텔 총주방장 "아버지의 검은 땀방울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중졸 학력과 사고로 손가락 하나를 잃은 장애를 갖고 있는 박효남 세종호텔 총주방장. 그는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성공신화를 만들어낸 입지전적 인물로 불린다. 실제로 만나본 그는 '작은 거인'처럼 느껴졌다. 아담한 체구와 작은 손을 가지고 있었지만 차돌맹이처럼 단단해 보이는 그의 눈빛에는 열정이 가득했다. 키만큼이나 높다란 '토그 브란슈(하얗고 긴 요리사의 모자)'를 쓰고서, 약속시간에 맞춰 그는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나요"라는 첫인사에 "제가 호텔 주방에서 일하니까 주방에서 뭐 맛있는 거 먹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은데 직원식당에서 똑같이 먹어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식은 한국음식인데 삼계탕도 먹으러 가고 쭈꾸미집도 가고 그러죠"라며 '허허' 웃음을 보인다.
박효남 총주방장은 하얏트호텔을 거쳐 힐튼호텔에서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업계 최연소 이사가 됐다. 또한 본사 파견 외국인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총주방장에 임명돼 전 세계 힐튼호텔 체인 사상 최초로 현지인 출신 총주방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고속승진과 성공신화를 일궈온 그는 특별한 배경도, 남들보다 나은 조건도 없이 오로지 의지와 노력 하나로 지금껏 성공담을 써왔다.

- 박효남 총주방장은 2014년 '대한민국 요리명장'에 선정됐다. 올해 2월 세종호텔 총주방장 겸 전무이사로 자리를 옮기고, 세종사이버대 조리산업경영학과 교수를 겸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소에게 줄 여물 자르다가 손가락 잃어남들은 '장애'라고 말하지만, 그 자신은 '고마움'이라고 표현하는 오른손 둘째손가락 두 마디를 그는 초등학교 3학년인 10살에 사고로 잃었다.
"학교 끝나고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그날 친구는 소에게 줄 여물을 썰어야 했어요. 나도 친구를 도와 여물을 썰어보려고 했죠. 우리는 역할을 나누어 내가 여물을 들이대면 친구가 작두로 여물을 자르기로 했습니다. 요령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나는 왼손으로 여물을 쥐고 무심코 오른손을 그 위에 놓은 상태로 여물을 칼날 밑에 들이댄 겁니다. 결국 사고가 났죠. 손을 들어보니 잘린 손가락에서 엄청난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강원도 고성 시골마을에 제대로 된 병원이 없어 급한 마음에 군 의무대에 달려갔다. 군의관이 접합수술을 빨리 하면 회생이 가능하니 절단된 부분을 찾아오라고 했다. 그런데 같이 여물을 썰던 친구는 그만 겁이나 그걸 산에 묻어버렸다고 했다. 어린 나이였으니 그저 어른에게 혼나는 게 가장 무서웠던 것. "당시엔 손이 아픈 줄도 몰랐고, 어떤 상황이 된 건지조차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오신 어머니가 펑펑 우시는 걸 보고 그제야 이게 보통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눈물이 났어요."
10살에 그런 큰일을 겪은 이후의 삶은 몸과 마음 모두 평탄하지 않았을 텐데, 박효남 총주방장은 무덤덤하게 이렇게 말했다. "더구나 제가 요리사이니 손가락 때문에 불편하지 않느냐고들 물으시는데요. 하지만 저는 나머지 손가락 아홉 개가 멀쩡하다고 말합니다. 단지 한 개를 다친 것뿐이라고요. 어찌 보면 그때 손가락 하나가 아니라 손 전체를 다치지 않은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이죠. 또 친구하고 놀다가 그런 일이니, 그 친구를 원망해본 적도 없어요. 오히려 고맙다고 했죠. 그 친구 지금도 강원도에 살고 있어서 자주 보진 못하지만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냅니다.(웃음)"
박효남 총주방장의 인생에선 중요한 몇 가지 순간이 있었다. 그 중 첫 번째는 '연탄'과 관련된 것이다. 평안남도가 고향인 그의 아버지의 삶은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젊은 시절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다시 북파공작원에 차출돼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런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야채와 과일, 연탄 장사까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고 철이 일찍 들었다는 박 총주방장은 "부모님은 나의 뿌리다. 부모님이 살면서 내게 정말로 많은 교훈과 희망을 주셨다"고 말했다.
"학교가 끝나면 서둘러 집에 돌아가 아버지가 하시는 연탄 배달을 도왔습니다. 가정용 연탄 무게가 보통 한 장에 3.6kg 정도 되거든요. 한번 나를 때마다 연탄집게로 두 장을 한꺼번에 집어 양손에 들면 넉 장을 들고 가야 되는데, 이것만 해도 14kg이 훌쩍 넘습니다. 아버지 혼자 그 무거운 것을 수천 장씩 나르실 생각을 하면 다른 친구들처럼 한가하게 떡볶이도 사먹고, 만화책도 보고 그럴 수가 없었어요. 사실 연탄은 겨울보다 한여름에 더 많이 나갑니다. 이런 얘길 들으면 의아해하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겨울엔 워낙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니 돈 있는 집들은 미리 연탄을 사서 광에 쟁여 놓곤 했죠. 그럴 때면 보통 한 집 당 몇 천 장씩 쌓아놓았어요. 탈진할 것 같이 헉헉거리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묵묵히 연탄을 나르고 계셨어요. 그때 전 철없게도 '어른이 되면 더위에 무뎌지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의 이마에는 비 오듯 검은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어요. 수도 없이 연탄가루를 맞다보니 땀방울이 아예 검은 액체가 되어 흘러내린 거였죠."
그렇게 연탄 배달을 도우면서 아버지의 '검은 땀방울'을 본 후 그는 힘들 때마다 아버지의 땀방울을 떠올렸다. 박 총주방장은 "정신적인 힘 외에도 요리 솜씨가 꽤 좋으셨던 어머니와 김치찌개를 유난히 맛있게 끓여주시던 아버지 모두 내게 '요리 DNA'를 물려주셨다"고 말했다.

-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고 철이 일찍 들었다는 박 총주방장은 "부모님은 나의 뿌리다. 부모님이 살면서 내게 정말로 많은 교훈과 희망을 주셨다"고 말했다.
"감자 돌려깎기 기술 익힌 것이 큰 보탬 됐죠"강연 등의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그는 언제나 연탄과 함께 '감자'를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고향인 강원도 고성에서 너무나 친숙하게 접했던 감자는 그가 요리사로서 일하는 동안 중요한 순간마다 해답을 주었다.
중학교 졸업 후 부모님을 위해 빨리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하숙정 원장이 운영하던 수도요리학원에 등록해 조리사면허증을 땄다. 조리사면허증 번호 12273번, 그가 늘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번호다. 면허를 딴 뒤 하 원장의 추천으로 하얏트호텔에 면접을 보고 합격하게 된다. 박 총주방장은 "그때 내가 쓴 최초의 이력서는 초등학교, 중학교, 조리사면허증 획득, 그렇게 단 세 줄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초등학교나 중학교는 이력서에 쓰지 않을 거고, 학력을 쓴다 해도 고등학교부터 쓰는 게 일반적지만 나이도 학력도 단지 그게 전부였던 난 이력서에 더 쓸래야 쓸 게 없었죠"라며 웃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바로 감자를 깎는 일이었다.
"주방에 들어가 보니 감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많은 양의 감자를 보니, 혹시 예전에 고향에서 내가 친구들과 서리해 먹던 감자밭 주인이 나를 야단이라도 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분도 들었어요.(웃음) 어쨌든 저는 그 많은 감자를 빠른 시간 안에 깎아야 했어요. 빨리 하지 않으면 계속 감자만 깎으며 시간을 다 보낼 것 같아 마음이 급했죠. 날마다 수백 킬로그램쯤 감자를 깎았던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감자만 깎다보니 어느새 요리사로서는 가장 기본적인 돌려깎기 하는 법을 그 감자를 통해 배울 수 있게 됐습니다. 돌려깎기를 배우고 나니 더 빨리 깎을 수 있게 됐어요.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깨끗하게 감자를 깎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집에서는 감자를 많이 살 수 없으니 달걀을 가지고 연습했어요. 주머니에 늘 달걀 하나를 삶아서 넣고 다니면서 시도 때도 없이 연습했어요. 버스 안에서도 오른손에 주방용 칼을 쥐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달걀을 쥐고 손을 놀렸습니다. 결국 저는 남들이 3개 깎을 시간에 10개를 깎을 수 있게 됐어요."
훗날 1986년 힐튼호텔에서 프랑스로 연수를 보내주었을 때 '감자 돌려깎기' 기술은 큰 보탬이 됐다고 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에서 온 이방인에게 거리감을 두던 그들은, 신기한 손재주로 감자를 깎아내는 박 총주방장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그는 "그들은 요즘 가정에서도 많이 쓰는 필나이프로 감자를 깠는데, 그 방법은 속살이 많이 깎여나가고 시간도 더 많이 들어 비효율적이었다. 내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것을 보고 '내가 감자 깎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 대신 당신들은 나한테 요리를 가르쳐 주는 겁니다'하고 일종의 딜을 했다"며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감자 깎는 기술이 계기가 돼 프랑스 요리의 기술을 배워올 수 있었던 겁니다. 만약 제가 초년병 시절 그렇게 열심히 감자 깎는 기술을 연습해 내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프랑스 본토 요리를 제대로 배워올 수 있었을까요, 허허."
요리사들의 직급은 보통 보조요리사인 쿡 헬퍼, 서드 쿡, 세컨드 쿡, 퍼스트 쿡, 부주방장, 주방장, 총주방장 순으로 올라간다. 하얏트호텔에서 평균 10년이 걸려야 오를 수 있는 퍼스트 쿡에 그는 5년 만에 승진한다. 그것도 뒤늦게 방송통신고에 들어가 학업을 병행하면서 이룬 성과였다. 그 즈음 새로 문을 열게 된 힐튼호텔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다. 그렇게 1983년 8월15일 힐튼호텔 창립멤버로 들어가 이후 30년이 넘는 요리 인생의 대부분을 힐튼호텔에서 보냈다.

1. 박효남 총주방장이 후배 요리사들과 주방에서 포즈를 취했다.
2. 박 총주방장은 프랑스 요리에 대해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평했다. 음식을 접시에 올리기 전에 그는 미리 스케치를 한다.
김우중 前 회장 두어 번 겹치는 식사 약속에도 늘 성의 보여기억에 남는 손님들도 적지 않다. 특히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보며 느낀 점이 많았다고 한다. "제가 입사했을 당시 힐튼호텔은 대우의 계열사였는데, 김우중 회장님은 주로 우리 시즌즈 레스토랑에서 식사 미팅을 하셨어요. 저는 지금도 그분을 떠올리면 안쓰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항간에는 그분이 식사를 워낙 빠른 시간에 끝내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거기엔 속사정이 있었어요. 비즈니스 미팅을 위한 식사가 대부분이어서, 점심이건 저녁이건 겹치는 스케줄을 마다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약속을 잡으셨어요. 자연히 처음 손님들과 함께 했던 똑같은 식사를 두 번째, 세 번째 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미팅 직전에 식사를 끝냈다고 양해를 구할 법도 한데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해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손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죠. 대충 드시는 흉내만 내는 것도 아니고 성의껏 식사를 하셨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게 고역이었을 텐데, 그분을 보면서 저는 늘 숙연해지곤 했습니다."
박효남 총주방장은 '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 요리를 잘하는 요리사'로 불린다. 프랑스 요리와의 첫만남은 하얏트호텔에 휴고라는 이름의 프렌치 레스토랑이 오픈하면서였다. 그리고 힐튼호텔의 프랑스 레스토랑 시즌즈에서 본격적으로 프랑스 요리의 참맛을 알게 된다. 그는 프랑스요리의 첫인상에 대해 "여성스런 멋이 있었다"고 말했다.
"처음 프랑스 요리가 담긴 접시를 보는데 나도 모르게 '와' 하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한 폭의 그림 같았죠. 아침에 호숫가에서 보면 물안개가 올라왔을 때의 그 느낌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미고 만드는 게 프랑스 음식의 특징인데 그 외양만큼 내실에도 끝없이 손길이 가는 요리입니다."
박효남 총주방장은 치열하게 요리를 배우면서 자신만의 요리를 만들어갔다. 그는 기존 요리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우리 고유의 재료와 프랑스 요리를 접목한 시도를 계속했다. 세계 3대 요리대회인 싱가포르 세계요리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5개 종목 금상 수상, 1999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호텔업계 최연소 조리이사 승진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2014년에는 '대한민국 요리명장'에 선정됐고 대통령 표창과 프랑스 정부로부터 농업공로훈장을 받기도 하는 등 그의 요리 인생에는 연이은 성공담이 이어졌다.
'요리의 스승' 요셉 하우스버거씨와의 만남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박효남 총주방장이 시즌즈의 주방장을 맡고 있던 1986년, 그가 힐튼호텔의 총주방장으로 부임해왔다. 박 총주방장은 "내가 아는 한 그는 최고의 프로 요리사"라고 존경을 표했다.
"그는 새 메뉴를 개발할 때도 내가 아는 다른 총주방장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며칠 밤이든 뜬눈으로 새우며 공부하고 고민했어요. 마음에 드는 요리가 완성될 때까지 끊임없는 실험과 시식을 거듭했습니다.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면 신이 나서 완성된 요리 사진을 붙여두고, 그 옆에 새로운 요리의 레시피와 만들 때의 주의사항을 꼼꼼히 적어 정리한 노트를 만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트를 우리들에게 나눠주며 새로운 기술을 공유하려 했죠. 이런 성의 있고 체계적인 전수 덕분에 저는 아직도 그분에게 배운 요리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훗날 요리사를 관두고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가 작은 레스토랑을 열었다. 꼭 그곳을 방문하리라 다짐했는데, 2009년 가을 어느 날 갑작스런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하우스버거씨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박 총주방장은 "내가 직접 만든 요리를 꼭 대접해드리고 싶었는데, 상실감이 너무나 컸다. 나중에 그분의 미망인이 우리 호텔로 찾아왔을 때 그분에게 드린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요리를 대접했다. 스승님이 하던 것과 동일한 마무리 장식을 곁들여 대접했는데, 그의 아내는 요리를 먹으며 한참 동안 눈시울을 붉혔다"고 말했다.
박효남 총주방장은 올해 2월 세종호텔 총주방장 겸 전무이사로 자리를 옮기고, 세종사이버대 조리산업경영학과 교수를 겸하며 요리를 배우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파워포인트'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요즘 요리를 배우려는 친구들이 정말 많아졌습니다. 1년에 2만명이 학교에서 배출된다고 해요. 그 친구들이 요리사의 화려한 면만 보고 뛰어들지 않길 바랍니다. 또 누구나 살다보면 결정적인 순간들과 마주치게 되고 그 시점을 계기로 인생은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터닝포인트보다 강력한 '파워포인트'인 셈입니다. 스스로 그런 파워포인트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의 힘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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