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환의 눈] '플랜B'라는 말이 무색했던 수원

[스포탈코리아] "레오가 측면보다 중앙에서 더 좋은 모습을 발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정원 감독
복수만 빼고 모든 것을 보여준 경기였다. 서정원 감독이 플랜B가 소극적인 선택만은 아니었음을 14380명의 관중들 앞에서 증명해 보였다. 5월 5일 어린이날 오후 6시, AFC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G조 마지막 경기가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졌다. 지난 원정경기에서 나왔던 석연치 않은 퇴장 판정과 패배를 되갚을 절호의 기회였다. 수원은 전반 24분 데얀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2분 만에 터진 레오의 동점골에 힘입어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수원은 승자승 원칙에 따라 조2위로 AFC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진출하게 됐다.
비록 복수에는 실패했지만 소득이 더 많았던 경기였다. 이미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한 두 팀이 만나는 자리였지만 서정원 감독은 "순리대로 하겠다"며 승리를 다짐했다. 사실 경기를 앞두고 수원의 상승세는 제동이 걸린 상태였다. 슈퍼매치 승리의 기세를 몰아 우라와레즈 원정경기에서도 승점 3점을 획득하며 16강 진출을 확보했지만 그 뒤 흐름이 좋지 못했다. 홈에서 대전에게 일격을 당한 뒤 우승 경쟁 중인 전북과의 대결에서도 패배했다. 리그 2경기 연속 패배 중인 수원은 이번 베이징과의 경기를 통해 반등의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고민이 많았을 서정원 감독이었다. 상승세가 끊긴 팀 분위기도 문제지만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체력적인 문제를 간과할 수 없었다. 서정원 감독의 선택은 플랜B 가동이었다. 순리대로 가겠다는 서정원 감독의 말 속에는 승리는 물론 로테이션이 필요한 팀 사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많은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던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자신들의 경쟁력을 증명해냈다.
부상으로 빠진 김은선과 벤치에서 시작한 권창훈을 대신해 백지훈과 조지훈이 동시에 투입됐다. 기본적으로 4-2-3-1 또는 4-4-2 의 진형을 갖췄지만 상황에 따라 허리에서 삼각형 또는 사각형 형태를 통해 압박과 패스를 시도했다. 공격수로 출전한 카이오와 레오는 활발한 스위칭과 침투를 통해 상대 수비진을 괴롭혔다. 왼쪽 측면에서 경기를 시작한 이상호는 중원 가담은 물론 앞 선 공격수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빈자리를 메워줬다. 오른쪽 측면을 따라 움직이며 숱한 찬스를 만든 서정진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좌우 풀백으로 나온 최재수와 신세계는 공수에서 폭넓은 활동반경을 보여주며 경기를 이끌었다.

실점 빼고는 눈부셨던 센터백 라인
운이 따르지 않았다. 박스 안에서 애매한 높이로 공이 떴다. 공을 슛으로 연결하려는 베이징의 공격수가 멈칫 하는 찰나 다른 선수가 공을 앞으로 연결했다. 이전 상황에서 전진하려는 몸동작을 보였던 정성룡 키퍼와 수비진은 순간적으로 타이밍을 놓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데얀이 침착하게 선제골을 성공시켰다. 데얀의 집중력이 돋보인 순간이었다.
그토록 경계했던 데얀에게 골을 허용한 점은 아쉽지만 이 날 수원 중앙수비수들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주축 수비수들이 결장한 가운데 연제민과 구자룡은 안정된 호흡을 보여줬다. 두 센터백은 데얀을 번갈아가며 밀착 마크했다. 특히 연제민은 데얀으로 향하는 공중볼을 사전에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이로 인해 데얀은 경기가 진행될수록 공을 터치하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중원으로 내려가 패스를 받으려했지만 연제민은 그 뒤를 끝까지 쫓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데얀을 마크하는 것은 물론 후반 막판에는 코너킥 상황에 가담해 위협적인 헤딩을 날리는 등 경기 내내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줬다.
베이징 공격수들은 근접하는 수원 수비수들로 인해 공을 잡고 돌아서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2선에게 내주고 돌아들어가려는 움직임을 시도했다. 그러나 패스의 정확도는 낮았고 수원의 압박도 심했다. 이 날 경기에서 데얀은 선제골을 넣는 등 몇 차례 좋은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예상만큼 위협적이지는 못했다. 후반 종료 직전 팀 동료들에게 답답함을 표출한 데얀의 제스처는 이 날 경기가 얼마만큼이나 안 풀렸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좌우 풀백으로 나온 최재수와 신세계는 수비 전체 라인의 균형을 맞추며 적절한 타이밍에 오버래핑을 시도했다. 공격 전개 과정에서는 미드필더 한 명이 내려오거나 한 명의 풀백이 남아 스리백으로 변환한 형태를 유지했다. 상대 투톱의 역습에 대비한 전술적 움직임이었다. 공격 가담 상황에서도 날카로운 크로스를 통해 좋은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경기 초반 베이징은 오른쪽 측면을 공략했지만 최재수의 영리한 수비로 인해 별다른 찬스를 만들지 못했다. 오랜만에 선발 출전한 최재수가 보여준 활약은 수원으로서는 큰 소득이었다.

효율적인 공격을 선택하다
실점 이후 곧바로 터진 동점골 과정은 이 날 수원이 90분 내내 시도하던 전형적인 공격 패턴이었다. 전반 26분 수비라인에서 전방으로 긴 패스를 시도했다. 상대 수비진의 배후를 노린 패스였다. 서정진의 헤딩이 수비 배후 침투를 시도한 레오에게 연결됐다. 레오는 가슴 트래핑 후 전진해 들어가 왼발 슛을 날리며 득점을 올렸다. 이후에도 비슷한 장면이 자주 연출됐다.
전반 30분 카이오와 서정진이 연결해준 공을 가슴트래핑 후 슈팅까지 만들어냈다. 2분 뒤에는 레오와 카이오가 연속으로 골대를 맞추며 베이징 골문을 위협했다. 레오는 중앙공격수 자리로 출전하자 한결 가벼운 몸놀림을 선보였다. 수비에도 적극가담하며 공을 탈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대 수비수를 등지고 공을 소유한 뒤 연결해주는 역할에도 충실하며 공격을 이끌었다.
서정진의 위치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경기였다. 서정진은 상대 왼쪽 풀백의 위치까지 올라가 순간적으로 스리톱의 형태를 보이다가도 어느새 수비수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움직임을 보였다. 서정진의 공격적인 침투와 드리블 돌파로 인해 상대 풀백은 공을 소유한 상태에서도 쉽게 라인을 올리지 못했다. 베이징의 투톱이 고립되고 중원에서 수원이 수적 우위를 갖게 된 원인이었다.
이 날 시합에서는 유독 베이징 키퍼가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공을 걷어내는 상황이 많이 나왔다. 배후침투 패스를 자주 시도한 수원의 공격 전개로 인해 발생한 장면이었다. 수원 공격수들과의 공중볼 경합에서 밀린 베이징 수비수들은 적극적으로 라인을 올리지 못했다. 카이오와 레오의 위 아래로 움직이는 활동반경과 제공권이 효과를 보는 순간들이었다.
수원은 위험 지역에서도 패스를 통해 상대의 압박을 벗어났다. 전방 선수의 움직임에 따라 적극적인 전진패스도 자주 시도했다. 전방에서 한 명의 선수가 헤딩 경합을 하면 한 명의 선수는 낙하지점을 예측해 상대의 골문 방향으로 침투를 했다. 이에 2선의 선수들은 세컨드 볼에 대비해 주변으로 근접하며 다음 상황을 대비했다. 좌우 풀백은 2선이 공을 소유하면 패스를 주고 받고 측면으로 넓게 벌리며 올라가 힘을 보탰다. 중앙 수비수들 역시 상대 공격수의 위치에 따라 라인의 높낮이를 조절하며 안정감을 더했다.

수원, 자신들의 스타일을 찾아오다
이 날 경기에서 수원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끌고나갔다. 공을 소유하거나 압박을 하는 장면 뿐 아니라 수차례의 프리킥 상황에서도 빠르게 공을 전개했다. 드로잉 상황에서조차 경기의 속도감을 늦추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경기의 흐름이 빠른 템포로 흘러가자 베이징 선수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수원 선수들을 마크하는데 급급한 모습이었다. 역전골이 나오지는 않은 점은 아쉽지만 수원으로서는 자신들의 경기 운영 방식을 회복했다는 점에 의미를 둘 필요가 있다. 이전 두 경기의 실망스러운 결과를 반전시킬 수 있는 좋은 흐름도 찾았다. 소모적인 움직임이 아닌 팀 전체가 조직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오랜만에 출전한 선수들의 경기력을 확인한 것과 교체 출전하며 첫 선을 보인 한성규의 가능성도 기대되는 부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골이 없었던 레오의 득점과 중앙공격수 위치에서의 재발견은 수원의 로테이션과 플랜B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수원이 다음 광주와의 원정경기에서 리그 연패를 끊고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된다.

글=<내 인생의 킥오프> 조경환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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