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률의 S담쓰談] 레너드·헤글러 이후 28년 만의 복싱 '심쿵 매치'

8-90년대 복싱에 미치지 않았던 사내들이 있었던가. 아니 그 전부터도 펀치의 향연에 열광하지 않았다면 남자, 아니 수컷이 아니었다. (물론 권투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남자, 복싱에 매료된 여성들도 분명 있었을 터. 다만 일반적인 경우에 그랬다는 것이다.)

어릴 적 베개를 양손에 끼우고 형, 동생, 친구들과 펀치를 겨루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가. 때리면 손에 느껴지는 상대 피부, 근육, 살의 질감과 맞으면 전해지는 상대 펀치의 육중한 힘. 때문에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으면 맞는 대로 찾아왔던 쾌감의 기억.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무기가 아닌, 온전히 주먹으로만 승부를 내는 투쟁, 그 원초적인 싸움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구석기 이전부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삶을 살아온 투지의 DNA는 어디 가지 않았다.

복싱은 그런 인간의 내재된 본능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한 스포츠다. 주먹으로 상대를 가격해 눕히는, 어쩌면 단순한 게임의 법칙. 그러나 여기에는 인간 본연의 투지가 오롯이 담겨 있다. 다만 주먹에 글러브를 씌워 일반 싸움과 구분짓고 체급을 구분해 스포츠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럼에도 선혈이 낭자하는 격전이 펼쳐진다. 불상사도 일어나지만 그것은 가끔씩이다.

그때의 아련한 전율과 흥분의 추억을 실로 오랜만에 떠올릴 빅매치가 다가온다. 현존 최고의 복서라 불리는 매니 파퀴아오(37 · 필리핀)와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38 · 미국)가 드디어 격돌한다.

오는 5월 3일 낮 12시(한국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 MGM 그랜드가든 아레나에서 세계복싱평의회(WBC) · 세계복싱협회(WBA) · 국제복싱기구(WBO) 웰터급(66.7kg) 통합 타이틀 매치다.

파퀴아오는 아시아가 낳은 전설의 파이터다. 57승(38KO) 2무 5패, 복싱 역사상 최초로 8체급을 석권했다. 38KO에서 보듯 인파이터로 화끈하게 경기를 달군다. 메이웨더는 47전 47승(26KO)의 무패 복서다. 빠른 스텝으로 방어와 역습에 능한 아웃복서로 5체급을 정복했다.

대전료만 3000억 원이 넘는 세기의 대결이다. 메이웨더가 1900억, 파퀴아오가 1270억 원을 받는다. 티켓 판매 예상 수입은 7200만 달러(약 769억 원)이다. 미국내 이 경기의 중계 유료 시청료는 100달러(약 10만 원)로 총 매출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전료 등을 뺀 수익이 2000만 달러, 역대 최고액을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 자료제공 = 황현철, 한국권투위원회 홍보이사 >

세계는 물론 국내에서도 이렇게까지 주목받는 복싱 대결은 실로 오랜만이다. 황현철 한국권투위원회(KBC) 홍보이사는 "사실 복싱 팬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관심을 갖는 대결은 거의 20년 만이다"고 흥분한 목소리였다. 황 부장은 경기 장내 아나운서와 전문잡지 '펀치라인' 발행인을 거쳐온 한국 복싱 전문가다.

황 이사가 말한 마지막 세기의 대결은 1996년이다.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44)과 에반더 홀리필드(53)가 11월 9일 펼친 WBA 헤비급 타이틀 매치(홀리필드 11회 TKO승)다. 이후에도 빅매치가 있었으나 일반인까지 집중했던 경기는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물론 이듬해 타이슨이 재대결에서 홀리필드의 귀를 깨문 이른바 '핵이빨' 사건도 화제가 됐지만 권투 역사에 남을 만한 매치는 아니었다.)

황 이사는 "메이웨더와 오스카 델 라 호야(42)의 대결도 있었지만 복싱팬 외에 일반인들까지 큰 관심을 갖지는 못했다"면서 "타이슨이라는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니는 선수가 있었기에 전국민적 관심을 받았다"고 말했다. 메이웨더는 호야와 2007년 5월 5일 WBC 슈퍼웰터급 타이틀매치를 벌였고, 12회 판정승했다.

메이웨더-파퀴아오의 대결이 1996년처럼 엄청난 주목을 받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동시대 최강자의 격돌과 천문학적인 대전료는 물론 둘의 대결이 5년 만에 성사되기까지 우여곡절 등 스토리텔링이 있다.

필리핀의 국민영웅 파퀴아오라서 더 관심을 끈다. 200억 원 가까운 대전료를 자국 태풍 피해를 위해 쾌척한 파퀴아오는 정치인으로도 나서는 등 권투팬이 아니라도 이목을 집중시킨다. 특히 같은 아시아인이 역사적인 매치에 나서는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한 이슈가 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메이웨더의 전승 가도를 파퀴아오가 화끈한 KO로 끊어내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승부는 냉정하다. 파퀴아오 못지 않게 철저한 자기 관리와 훈련을 하는 메이웨더는 여우처럼 경기를 운영한다. 저돌적인 파퀴아오를 영리하게 피하면서 점수를 쌓을 가능성이 적잖다. 세계 챔피언 출신 홍수환(KBC 회장), 장정구, 박종팔 등 국내 복싱 전문가 100명 중 62%가 메이웨더의 승리를 점쳤다.(그래서 더 파퀴아오를 응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시대의 복싱 영웅은 슈가 레이 레너드(59)와 마빈 헤글러(61), 토마스 헌즈(57), 로베르토 듀란(64)이었다. 적어도 30대 후반부터는 이른바 'F4'(Fabulous 4)에 열광했을 것이다. 무하마드 알리(73)의 헤비급이 지배했던 복싱계에 화려한 스텝과 기술로 중심에 섰던 인물들이었다.

< 전설의 천재복서, 슈가 레이 레너드(왼쪽)와 마빈 헤글러러(오른쪽). (자료사진 = 엠파이트) >

사실 레너드와 헤글러가 펼친 WBC 미들급 타이틀매치(1987년 4월6일)는 이번 메이웨더-파퀴아오의 매치 못지 않은 세기의 대결이었다. 저돌적인 헤글러와 천재 복서 레너드의 격돌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매치와 비슷한 면이 있다. 28년, 30년 가까운 세월을 넘어 역사에 남을 매치가 펼쳐지는 것이다.(다만 당시는 레너드의 12회 판정승이었다.)

당시는 무엇보다 우리 선수들이 당당히 복싱 열기의 중심이었다. 8, 90년대 '짱구' 장정구(52 · WBC 라이트플라이급 15차 방어)를 비롯해 '들소' 유명우(51 · WBA 주니어플라이급 17차 방어), 박종팔(57 ·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 등의 경기는 그야말로 구름 관중과 엄청난 시청률의 보증 수표였다.

(재미있는 것은 장정구 챔프는 메이웨더의 판정승을, 유명우 챔프는 파퀴아오의 KO승을, 박종팔 챔프는 예측불가라는 의견을 보인 점이다. 특히 유명우 챔프는 2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뉴스쇼'에 출연해 "파퀴아오의 왼주먹에 메이웨더가 7, 8회 KO패를 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 면에서 파퀴아오-메이웨더의 매치는 한편으로 침체된 국내 복싱의 한 단면을 보는 듯 싶어 다소 씁쓸하기도 하다. 세계 챔프가 단 1명도 없는 게 한국 권투의 현실이다. 한 권투인은 "여자 챔프는 있지만 선수층이 적은 가운데 얻은 타이틀이라 다소 민망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2007년 WBC 페더급 벨트를 반납했던 지인진(42)이 마지막 세계 챔프였다. 이후 8년 동안 한국은 세계 챔프가 없었다. 그 사이 한국 복싱은 종합격투기의 인기에도 밀리는 등 이중고를 겪었다. WBA 슈퍼페더급 챔피언 최용수(43)가 종합격투기로 외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종합격투기의 득세가 다행이라는 시각도 있다. 황 이사는 "사실 전 세계적으로 종합격투기가 복싱보다 인기가 있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할 정도로 이례적"이라면서 "UFC의 인기가 높은 미국에서도 대전료나 시청률 등을 보면 복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한국에서도 종합격투기가 있어 팬들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면서 "어쨌든 격투에 대한 애정이 끊기지 않았고 복싱의 잠재적인 팬층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이번 세기의 대결이 한국 복싱의 부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크다. 황 이사는 "유소년들에게도 복싱을 잘 하면 저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구나 하는 인식을 줄 수 있을 것"이라면서 "권투에 대한 위상을 더 높이는 경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선수 중에서도 조만간 세계 챔프가 나올 것이니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모처럼 8각이 아닌 4각의 링에서 가슴을 펄떡거리게 할 만한 경기가 펼쳐진다. 심정적으로는 응원할 선수가 있겠지만 누가 이기든 관계 없다. 둘이 맞붙는 것만으로도 이미 베개 권투를 하던 예전의 흥분과 투지를 불러일으켜줬기 때문이다. 고맙다, 파퀴아오. 감사한다, 메이웨더. 도대체 이게 얼마만이냐, 심장이 떨리는 복싱 매치가.

글=CBS노컷뉴스 체육팀장 임종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