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큰아들 하늘 보낸 다음날 원전대책 직접 발표.. 가장 아팠던 순간"

기자 2015. 3. 2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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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신화' 前 국무조정실장 김동연 아주대 신임 총장

김동연(58) 아주대 총장이 지난해 7월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 직을 훌훌 던져 버렸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귀를 의심했다. 적수공권에서 신화를 일군 이, 경제관료들의 우상, 거칠 것 없는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설마… 하던 기억이 점차 사라지고 있을 때 김 총장은 상아탑으로 돌아왔다. 기자의 짐작으로는 그의 갑작스러운 공직 사퇴는 '꿈과 현실의 미스 매치(불일치)'에 의한 결과였다. 그럼 그는 대학에서 그 불일치를 해소하고 있을까. 김 총장은 인생의 모든 굽이에서 고비를 겪을 때마다 꿈을 꾸었다. 광야를 전전하며 노숙하던 야곱이 고난의 돌베개를 베고 꿈을 꾸듯. 꿈은 언제나 그를 오늘에서 내일로 밀어냈다. 그건 꿈꾸는 자의 특권이다. 꿈속에 녹아 있는 궁극적 낙관론적 열정은 시련기의 그를 강철로 만들어냈다. 초봄의 추위가 물러나고 봄볕이 내리쬔 지난 17일 오후 아주대 수원캠퍼스 집무실에서 김 총장을 만났다. 김 총장은 흔치 않은 정독(精讀)가 겸 다독(多讀)가다. 그의 책상에는 읽고 있던 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삶을 바꾼 책이 있습니까.

"삶을 바꿨다기보다는 생각을 바꾼 책이 있어요. 무엇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죠. 이건 사회혁명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성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장발장이 자신을 평생 쫓아다니며 괴롭힌 자베르 경감을 살려 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처벌하는 게 아니라 용서하는 장면인데, 그 에피소드 제목이 '장발장의 복수'입니다. 용서가 복수라뇨. 얼마나 큰 교훈입니까. 조은 교수의 '사당동 더하기 25'는 사회적 이동성에 대한 영감을 줍니다. 우리 사회가 계층 간 이동이 원활해야 건강하게 되는 거예요.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도 좋아하는 책입니다. 사회적 자본에 관한 얘기입니다."

―기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요.

"단연 '걸리버여행기'죠. 모험소설로 알려졌지만 풍자소설이에요. 소인국 여행은 영국 정치를 풍자한 거예요. 소인국 왕국에 불이 나는데 오줌으로 끕니다. 영국 정치에 오줌을 누는 거죠. 성인군자의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싫어하는 사람 모습의 짐승이 나옵니다. 그 이름이 야후죠. 지금 포털 사이트 '야후닷컴'이 여기서 유래합니다."

그는 기자에게 '걸리버여행기' 완역본을 선물했다.

―인생에서 고비가 몇 번이나 있었나요. 큰 고비라고 한다면.

"수도 없이 많았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울 청계천의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기 시작한 게 만 11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망해도 이렇게 망하나 싶을 정도로 망했어요. 판잣집은 송판으로 막고 공중화장실에서 아침에 30분씩 줄 서고…. 그런데 몇 년 살지 못하고 강제 철거돼 경기 광주단지로 강제 이주당합니다. 1970년대 초에 거기서 강제 이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킬 정도로 험악하던 시대고, 삶이었습니다."

김 총장은 1972년 고입 당시 집안 형편 때문에 상고를 택했다. 고3 때인 1974년 말에 은행에 취직한 것이 만 17세. 소년가장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미래에 대한 '갈증'은 그를 야간대학에 다니게 한다. 어느 날 독신자숙소에서 버려진 책 10여 권을 발견한다. '고시' 잡지를 쥐어 든 그는 새 인생을 설계했다. 낮에는 은행에 다니고 밤에는 대학에 다니며 더 깊은 밤에는 고시공부를 하는 삶을 이어 갔다. 모든 시간 계획은 15분 단위로 짜여졌다. '이 세상 누구도 나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매진한 결과 행정고시와 입법고시 양과 합격이란 쾌거를 이뤘다.

―최고 엘리트만 다니던 경제기획원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직장생활은 순탄했습니까.

"입사 동기가 4명이었습니다. 다들 내로라하던 학벌을 가졌죠. 어느 선배가 출신교를 묻더군요. 야간대를 나왔다고 했어요.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요즘은 희한한 대학 나와서 고시 붙어 여기까지 오네'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유학을 결심했군요.

"공부를 더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사회에서 명함을 내밀려면… 그런 생각…. 유학을 위해 이번엔 영어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고시공부보다 몇 배 더 열심히 했어요. 잠꼬대를 영어로 할 정도였죠. 그래서 국비 장학생 되고 미국 정부에서 주는 풀브라이트 장학생도 됐어요."

―네, 미시간(대) 앤아버(캠퍼스)라면 정말 좋은 대학이죠. 특히 사회과학 쪽은요. 자부심 가득한 유학생활이 됐겠네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유학생활 중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큰 고비가 와요. 전 과목 스트레이트 A를 받은 뒤 엄청난 회의에 빠져요. 공부도 안 되고, 왜 그럴까, 그 정체를 모르겠는 거예요. 두 가지 질문에 답이 있더군요. 첫째 질문은 '왜 공부하느냐', 둘째 질문은 '무엇을 공부하려 하느냐'. 그런데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인생을 돌아보게 됐죠. 그때가 30대 초반이었는데 내가 이제까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남이 했으면 하는 일, 주위에서 하고 싶어 하는 일, 우리 사회가 그렇게 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고 산 거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이제까지 제가 가졌던 회의 중 가장 큰 회의였죠. 너무 쇼킹했죠. 그게 제 인생의 가장 큰 전기 중 하나였어요."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결국은 이제까지 살아온 '틀'을 깨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돼요. 굉장히 어려운 겁니다. 이제껏 성공했던 방식을 버리는 거니까. 우직하게 정면돌파하는 것이었어요. 그런 식으로 가치관을 바꾸니 결국 '해피엔딩'이 됐습니다. 미시간 앤아버에서 보통 10년 걸려 박사학위를 따는데 저는 3년 9개월에 끝냈습니까. 버리니까 채워지더라고요."

그 뒤 닥친 더 큰 시련은 큰아들의 죽음이다. 벌써 2년 전의 일이 됐다. 2013년 10월 9일 장남의 발인날조차 그는 쉴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생중계가 예정된 원자력발전소 비리종합대책 준비 때문이었다. 당시 국무조정실장인 그는 발인일 오후 문안을 직접 가다듬고 다음 날 예정대로 발표를 강행했다. 그는 부고도 내지 않고 부의금도 받지 않았다. 뒤늦게 아들을 가슴에 묻은 사실을 알게 된 직원들과 지인들이 그를 위로했다. 그는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미루는 것은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고 했다. 아버지는 공을 앞세워 아들을 잃은 고통마저 삼켰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낙루(落淚)했다. "지하철 혜화역 3번 출구는 고통을 안고 걷는 길이 돼 버렸습니다. 평범한 이 길이 나에게는 이렇게 다를 수 있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김 총장은 잠시 목이 멨다. 혜화역 3번 출구는 서울대병원으로 나가는 길목이다. 병간호를 위해 그곳을 오갈 때마다 마음이 아렸을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 시련들을 극복한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희망'이라고 얘기합니다. 꿈이죠. '타는 갈증'이라고 해도 좋아요. 오늘의 꿈이 저를 내일로 밀어냅니다. 나를 밀어내는 동인은 첫째는 '다음의 꿈', 둘째는 '낙관적 태도', 셋째는 '열정'이에요. 전 지금도 꿈이 있어요. 앞으로도 꿈이 있을 거예요. 늘 나에게 던진 질문이 그거예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느냐.' 학생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꿈이 있느냐'입니다. 죽을 때까지 꿈을 꿀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과 열정을 얘기합니다. 뭐가 다르죠.

"저에게 아무런 미래도 보장도 없을 것으로 보였던 시절, 저는 '다음 꿈'을 꿨고, '낙관적'이었어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눈먼 열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남이 원하는 일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서 인생관과 철학이 바뀌었습니다. '눈 뜬 열정'으로 바뀐 거예요. 저에게 언제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저는 '눈 뜬 열정'으로 산 하루하루가 행복했다고 답합니다."

―그렇군요. 오래 공직생활을 했습니다. 바람직한 공직자의 상은 무엇인가요.

"왜 공직을 하느냐고 자신에게 묻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 그에 대한 생각이 공직생활을 지탱하는 힘이었습니다."

―공직자가 사회 변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관료사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는 다르네요. 관료들은 흔히 변화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까.

"공무원도 이제는 좀 튀어야 해요. 어렸을 때는 사회 변화에 대한 욕구가 있었어요. 봄에 소 쟁기로 밭을 갈듯이 뒤집고 싶었어요. 그게 공직사회 진출 이후 사회 기여로 바뀐 겁니다. 이는 제가 (공직생활을) 그만둔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30년 동안 기획재정부의 '메인 스트림(주류)'에 있었어요. 거기서 사회화하면서 만들어진 제 틀이 과연 얼마나 실력이 있는 거냐, 바깥세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거냐 하는 질문을 던졌고, 내 실력이 짧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저는 메인 스트림에서 얻은 지식과 철학으로 모든 걸 재단했습니다. 예를 들어 청년실업을 논하면서 실제로 청년들의 생각을 알았느냐, 전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공직자의 진정한 사회 기여는 좋은 정책보다 성공한 정책을 만드는 겁니다."

이제야 김 총장이 장관직을 훌훌 벗어던진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에 대한 기여다. 지금의 공직 환경은 아마도 그에게 그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김 총장에게는 좀 더 다른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꿈과 현실의 매칭을 위해….

―58년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인생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대단히 아름다운 게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천상병 시인이 '소풍'에 비유했는데, 소풍을 나온 거죠. 저는 인생은 '풀 오브 뷰티', 가득 찬 아름다움, 즐거운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살다 보면 힘든 것, 어려운 것도 있지만 그것조차 '위장된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당시는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면 뒤에 올 더 큰 보람과 성취를 위한 축복이었던 거죠. 다만 사람들이 모르는 거죠. 저는 인생은 대단히 아름답고 아름다움과 경이로 가득 차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위장된 축복'이라, 성공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결과론적 해석 아닐까요.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어느 시점에 힘든 상황이 오면 그다음에 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걸 믿어야 합니다. 생에 대한 믿음이죠."

―공직에 있을 때 아랫사람에게 너무 깐깐하게 대해서 직원들이 힘들어 했다는 평가가 있었다는데.

"맞는 평가입니다. 제가 요구 수준이 높아요. 직원들이 힘들어 했을 겁니다. 제가 원했던 것은 자기계발이에요. 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직원들이 그런 거를 통해 훈련받기를 원했어요."

김 총장은 현재 다음 꿈이 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꿈은 되고자 하는 무엇, 즉 '명사'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다, 즉 '동사'입니다. 누구를 시켜도 할 것 같은 그런 자리에 연연하는 것은 꿈이 아닙니다.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고 거기에 가서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거죠. 제가 32년간 공무원을 했어요. 국가를 운영하는 정책을 수없이 만들었어요. 기재부 예산실장을 하면서 정부사업 의사결정을 한 건수가 약 8500개 됩니다. 그런 거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어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여기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것을 좇는 게 지금 저의 꿈입니다."

인터뷰 = 허민 정치부장 minsk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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