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新 풍물기행'>울창한 숲 · 계곡 · 미술관.. 메마른 도심 속 '시간이 멈춘 곳'



33 작가 김진이 본 서울 부암동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십수 년 전이다. 인왕산은 살구꽃과 산벚꽃이 만개해 하나의 화엄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봄날이었다.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었다. 인왕산 정상에서 기차바위 너머로 하산을 하면서 늘 가던 길을 따라 가지 않고 작은 오솔길로 접어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쯤 내려가자 길이 뚝 끊기고 말았다. 깊은 산중도 아니고, 늘 다니던 산이라 별일 없으리라고 여겨 처음에는 가볍게 여겼는데, 길이 점점 험해지자 약간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일행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었다. 마치 거대한 사건이라도 되는 양 어떤 결연함마저 생겼다. 바위를 타기도 하고, 덤불을 헤치기도 하면서 발 밑에 신경을 집중하며 무조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숨이 멎을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치 꿈에서나 봄 직한 도원(桃園)의 풍경이었다. '울긋불긋 꽃대궐' 속에 사람의 집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 순간 두려움이 싹 가셨다. 그리고 그토록 아름다운 마을에 얼른 닿고 싶어 발걸음을 총총히 옮겼다.
그곳이 부암동이었다. 세상과 유리된 듯한 고요와 적막, 과거 어느 순간에 시간이 멈추어 있는 듯한 느낌. 문득 어릴 때 본 영화 '잃어버린 지평선'이 떠올랐다. 영화 속의 탐욕과 전쟁, 증오, 범죄가 없는 신비한 곳 '샹그릴라'가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50년대 천재 시인 김관식의 '자하문 밖'이라는 시에 묘사되어 있듯 부암동은 '청정히 수풀이 어우러진 곳' 그리고 '꾀꼴새의 매끄러운 울음 끝에 구슬 목청을 메아리가 도로 받아 얼른 또 넘겨 빽빽한 가지 틈을 요리조리 휘돌아 굴러 흐르는 곳'이었다.
그후 드문드문 부암동으로 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목적도 없이 마을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걷다 온다. 소요와 은일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다.
부암동은 서울의 자하문(紫霞門) 밖에 있다. 자하문은 창의문(彰義門)의 다른 이름이다. 서울의 4대문 사이에 있는 4개의 소문 중 하나이다. 자하문은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지하철 경복궁 역에서 부암동으로 가는 길은 서너 갈래쯤 된다. 경복궁 역에서 사직공원 방향으로 가다가 인왕 스카이웨이를 따라 20여 분 걸어가면 자하문 터널 위가 나온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오는 곳이 부암동이다. 또 다른 길은 경복궁 지하철 역 2번이나 3번 출구에서 20여 분 도로를 따라 걸어가 청와대 길로 접어들어 북악산 허리를 타고 언덕길을 올라가면 자하문이 나오는데, 그곳을 빠져나가도 된다. 사직공원 방면에서 인왕산을 올라 기차바위 쪽으로 내려가도 된다.
어느 길로 가든 부암동으로 가는 길은 매혹적이다. 산길로 접어들어도 좋고, 시내 도로를 따라가도 좋다. 시내 도로를 따라가도 날선 직선의 빌딩들이 눈을 가로막지 않아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하문을 빠져나가면 북악산과 인왕산 두 산의 기슭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고, 멀리 북한산이 그림처럼 보인다. 자하문 터널을 가운데 두고 부암동은 인왕산 쪽 마을과 북한산 쪽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두 마을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인왕산 기슭 쪽에 있는 마을이 훨씬 적요롭다. 마을주민센터 뒤쪽으로 걸어 들어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는 숲이 나타난다. 이 숲의 나무로 부암동을 느낀다. 수령이 족히 100∼200년은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와 상수리나무, 소나무 들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위 '힐링'이 된다. 서울의 어느 마을에서 이런 오래된 나무를 볼 수 있는가.
나무들에 빼앗긴 시선을 돌리면 무계원(武溪園)이라는 현판을 단 번듯한 한옥이 나타난다. 조선 말기 서양화가 이병직의 집이었던 이 한옥이 호텔 신축으로 헐리게 되자 종로구에서 이곳으로 이축했다.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있었던 자리에 세워져 무계원이라고 이름 붙이고 전통문화 공간으로 시민에게 개방하였다. 이곳은 안평대군이 꿈에 본 무릉도원과 비슷한 장소라고 한다. 안평대군은 이를 안견에게 이야기를 했고, 안견은 그 이야기를 듣고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그리고 안평대군은 이곳에 무계정사를 세워 글을 읽고 활쏘기를 했다고 한다.
무계원에서 골목을 따라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반계 윤웅렬의 별장이 나타난다. 윤웅렬은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의 아버지이다. 1906년 건립 당시에는 서양식 붉은 벽돌집이었으나 윤웅렬의 셋째아들인 윤치창이 상속받아 한옥 건물을 추가로 지었다고 한다. 이 두 번듯한 한옥과는 대조적으로 그 맞은편에 다 허물어진 집 한 채와 나무들과 잡초가 무성한 빈터가 보인다. 소설가 현진건의 집터이다. 이곳에서'빈처' '운수 좋은 날' 등 식민지 시대 민초들의 고단하고 핍박받는 삶을 그린 소설들이 탄생했다고 생각하니 남다른 느낌이다. 윤웅렬의 집과 무계원과는 대조되는 이 쇠락한 집터에서 생의 쓸쓸한 조락을 생각한다.
인왕산 자락의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길 건너편 마을로 간다. 북한산을 뒷자락에 둔 이 마을은 작은 카페들과 맥줏집, 음식점, 옷집, 갤러리들이 빼곡이 차 있다. 건너편 마을의 적요로움과는 대조적으로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백사실 계곡으로 향한다. 백사실 계곡은 조선시대 별서가 있던 곳이다. 주변에 흰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석은 백악, 즉 북악산을 말하며 동천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곳에 별서를 짓고 시를 읊고 자연을 완상했던 것이다.
백사실 계곡을 향해 가다보면 삼거리 길목에 회색 칠을 한 벽돌담에 '동양방앗간'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오고, 손맛 좋은 할머니가 만드는 고소한 떡 냄새가 발길을 붙잡는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부암동을 찾는 사람들은 이 방앗간에 꼭 들른다. 많은 떡 중에도 송편 맛은 으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동양방앗간에서 왼쪽으로 빠지면 '환기미술관'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빠지면 백사실 계곡이 나온다.
백사실 계곡 입구에 7년 전 크게 히트한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촬영 장소가 카페로 개방되면서 주말이면 더욱 붐빈다. 부암동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다. 그 전에는 사실 서울이라는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 안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곳은 외진 곳이었다. 교통도 불편하고 편의시설도 없어 찾는 사람이 드물어 서울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카페와 미술관이 생기고, 도심의 복잡함에서 벗어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고급 주택가로 변하고 있다. 오래되어 낡고 낮은 지붕과 흙담 벽과 마당에 빨래를 넌 풍경은 이젠 볼 수 없다. 그나마 이곳에서 찾을 수 있었던 잃어버린 우리들의 시간들이 이곳에서마저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백사실 계곡을 돌아나와 다시 자하문 터널 위에 선다. 윤동주 시인이 터널 안쪽인 수성동 계곡 아랫마을에서 하숙을 했고, 이 자하문까지 산책을 하면서 시를 구상했다는 연유로 이곳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을 바라보고 시상을 떠올렸을까. 연유야 어쨌든 한 시인이 오래도록 후세에게 기억되고 그의 시가 읽힌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하문 터널 위에서 광화문 방향과 부암동 방향을 둘러본다. 한쪽은 빽빽한 건물들의 도시, 한쪽은 나지막한 사람의 집과 숲의 마을. 같은 서울이지만 이렇게 다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것은 꼭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아직은 옛날의 시간들이 머물러 있는 곳, 부암동이 그중 하나이다.
과거의 우리들 삶과 문화가 있는 장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향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히려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북촌에 이어 삼청동과 서촌에서 보았다. 부암동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동화작가·문학세계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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