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큐' 외국 욕이라 덜 불편한가
[강상헌의 말글바다] <150> 퍽큐는 '빌어먹을'이 아니라 '씹할'이다
[미디어오늘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사람아 /입이 꽃처럼 고아라 /그래야 말도 /꽃같이 하리라 /사람아 (황금찬 시 '꽃의 말')
2년 전 쯤 이 칼럼에 삽입했던 아름다운 시를 다시 인용한다. 맥주집 간판 '퍼킹헬'과 지하철에서 본 외국브랜드 '꼼데퍽다운' 옷을 보고 이를 시정했으면 좋겠다고 쓴 글이었다. 오물 뒤집어 쓴 듯 했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인간모독의 마케팅 아닌가. 외국말 써서 매운 눈도 피하고, 젊은 층 눈도 끌어 보자는 속셈도 있었겠지.
퍼킹헬은 '제기랄'이지 니(필자)가 생각한 '씨발'이 아니다, 꼼데퍽다운과 '퍽'은 다른 말 아니냐 등의 댓글 여럿 붙고, 꽤 농도 짙은 욕설도 섞인 '항의문'들도 이메일로 받았다. 격식과 요건을 갖추지 않은 '서신'이었기에 답장을 쓰지는 않았다. 격려와 응원도 서넛 있었다. 집 부근 그 맥주집은 그 사이 문을 닫았고 간판도 바뀌었다. 그 후론 그 브랜드 옷 못 봤다.
발랄한 필체의 한 언론인이 한겨레에 최근 쓴 글에 섞인 '퍽큐'라는 단어를 보고 다시 시시비비를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넘 쩨쩨함 아님?, 나이 들면 할 수 업쪄, 그 정도로 멀? 맘 점 열어 바! 하는 등의 댓글 즐겁게 읽어낼 배포 없으면 못할 일이다.
그 시를 다시 불러내 방패삼은 것은 겁도 좀 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논은 있어야 한다. 주류언론에까지 등장한 외국어 욕설이 공공언어로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주제다.
물론 필자의 그 글처럼 '퍼킹헬'과 '꼼데퍽다운'이 시민들에게 그렇게 노출되어도 좋으냐? 또는 '퍽큐'라는 외국어 욕설이 유행하는 현상을 알리고 분석해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글(스트레이트 기사이건 칼럼이건 간에)에 들어가는 그 단어들은 불가피한 측면은 있다. 인용한다.
…유치원에서 포켓몬 놀이를 하다 원하는 캐릭터를 가질 수 없어 한바탕 싸운 걸 시작으로, 헤어스타일을 바꾼 여동생을 놀리고, 체육시간에 오빠에게 '퍽큐'를 날리는 이 남매의 시시콜콜한 싸움의 역사는 매일 아침 같은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뒷모습으로 마무리된다… (2월 6일, '정다운 오누이에 대한 판타지, 그런건 없엉~'의 일부)
퍽큐라는 말에 따옴표를 붙인 것으로 보아 필자도 이 단어를 쓸 때 평상시와는 달리 뭔가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또 이 '퍽큐'는 외국어 욕설의 신문 노출에 관한 논의를 세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평론 성격의 글에 들어간 보통 단어다. 한겨레의 진보적인 자유분방함은 이제 '퍽큐' 정도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신호인가. 이 신호가 언론 언어의 어떤 신기원이 될까?
사전의 fuck you(퍽큐)는 '빌어먹을!' '썩 꺼져!'다. fuck(퍽)은 뭔가? 남녀 간의 성교를 비하하는 말이다. '저열한 섹스'의 여성 파트너를 이르기도 하고, 저주의 말로도 쓰인다. 원래 뜻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전 예쁜 여학생들이 버스에서 '씨발' '씨발년' 없이는 대화를 잇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런 꼬장꼬장한 논의가 과연 뜻이 있을까 문득 회의가 들기도 했다.
말은, 바꿔 쓰기도 하고(전용) 그 과정에서 뜻이 비틀리거나 확대되기도 한다. 비유나 시적 변용과 같은 노력이 기왕의 뜻을 더 화려하게 장엄하기도 하고 새 말을 짓기도 한다. 어떤 말은 맥없이 죽는다. 언어의 생로병사다. 그 핵심은 원래의 말이다. 퍽에서 퍽큐가 나왔다. 퍽큐가 '빌어먹을!'의 뜻으로 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알아야 바르고 고운 말글 세상 만든다.
시인처럼, 언론(인)도 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꽃보다 고운 독자를 위하여.
< 토/막/새/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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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상헌 언론인·(사)우리글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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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의 시 '꽃'은 사물과 그것의 이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언어학적 이론이나 철학 같다. 몸짓에 불과한 그가 내 부름에 '꽃'이 된다. 세상의 조화와 섭리가 빚은 삼라만상이 어떻게 그 각각의 이름을 갖게 됐을까? 경이롭지 않는가. 대답이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시인은 속삭인다. 언어(이름)는 마음(생각)을 잣는 연모다, 인간의 세상을 짓는다. 꽃 같은 문화다. 그와 내가 붙인 그 이름들, 말과 글은 문화의 바탕이자 씨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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