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FOCUS] 360년간 이어온 장맛, 며느리의 유쾌한 반란

1972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고씨 집성촌.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 장군으로 유명한 장흥 고씨 후손이 모여 산 이 마을에서 300년 넘는 세월을 이어온 고씨 문중 10대 종부로 한 처녀가 시집을 왔다. 명문가의 1남5녀 중 막내딸로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자란 처녀의 나이는 스물네 살. 지금이라면 갓 대학을 졸업한 앳된 나이지만 당시에는 늦은 나이에 시집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보다 다섯 살 많은 남편을 장남으로 둔 시어머니의 나이가 마흔네 살이었다. 전남 곡성에서 온 이 처녀가 바로 조선 시대 대유학자인 고봉 기대승 선생의 후손이자 훗날 대한민국 전통식품 제35호 진장(陳醬) 명인이 된 기순도 씨(66)다. 기 명인이 처음 시집올 당시에는 "얼마나 없이 살면 소금으로 간을 하느냐"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든 음식간의 기본은 간장이었다. "누가 간장을 보고 마술 간장이라고 하데. 음식은 간이라고. 간이 맞아야 음식이 맛있는데, 간장을 넣으면 마술처럼 맛있어진다는 거여." 360년 동안 전해 내려온 장흥 고씨 문중의 씨간장을 지켜오고 있는 기 명인은 시어머니에게서 장 담그는 법을 전수받아 40년 넘게 전통장을 담그고 있다.
기 명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전날 눈이 내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화창했다. 서울 김포공항에서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한 광주공항. 광주공항에 내리자 명인의 딸인 고민견 씨(40)가 환한 미소로 반긴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다. 군 단위에서도 한 명 나오기 힘든 명인을 4명이나 배출한 면이다. 그러나 굳이 이런 설명을 듣지 않아도 도심을 떠나며 들떴던 마음은 길 옆 한옥집과 푸른 소나무를 보자 금세 차분해지고 그야말로 슬로(slow)한 여유로움이 절로 생겨났다.
그렇게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대나무밭 하나가 나왔다. 바람에 스삭스삭 소리를 내는 대나무가 우거진 이 대나무밭 옆이 바로 기순도 명인의 집이다. 집에 들어서자 높이가 20m는 족히 넘을 듯한 100년 묵은 붉은 소나무가 병풍처럼 펼쳐져 손님을 반긴다. 대나무와 소나무로 둘러싸인 이 집의 마당에는 1000여 개 장독대가 오와 열을 맞춰 즐비하게 서 있다. 간장, 된장, 고추장…. 장독대에서는 켜켜이 세월을 머금은 장들이 눅진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명인의 칭호를 얻게 해준 진장(5년 넘게 발효된 간장)은 여인의 머릿결처럼 윤기 나는 검은색을 뽐내고 있었다.
진장은 토판염을 대나무 속에서 9번이나 구운 구벌 죽염 간장으로 기 명인의 기술을 집대성한 간장이라 할 수 있다. 토판염은 갯벌 흙속에서 채취한 천일염으로 갯벌의 다양한 유기화합물과 영양분이 스며들어 있다. 일반 천일염보다 10배 정도 비싸다. 이런 토판염을 수분이 적어 단맛이 가장 강하다는 겨울 대나무에서 9번 정도 굽는다. 구울 때마다 양이 줄어든 소금은 9번 굽고 나면 굽기 전 소금 양의 30% 정도만 남게 된다.
"이렇게 소금을 굽고 나면 재 때문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하지. 힘들지만 그래도 그런 정성과 인내가 들어가야 제대로 된 장이 나오재." 이 소금이 들어가는 것은 장을 담그는 일련의 과정 중 중간 과정에 불과하다. 그전에 햇콩을 쑤고 메주를 만드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다. 콩을 고르는 과정부터 까다롭다. 콩이 해풍을 맞아 병충해에 강하다는 전남 무안에서 유기농 대두를 구해온다. 기 명인은 "콩이 너무 크면 싱겁고 너무 작으면 뭉개진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구해온 콩은 동짓달(음력 11월) 첫 말날(12간지 중 오(午)자로 끝나는 날)에 삶아 메주로 빚어낸다. 기 명인은 "시어머님은 장을 담글 때 항상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궂은일을 피하라고 말씀하셨다"며 "장 담그는 일을 할 때는 장례에 다녀오거나 궂은일을 겪은 사람은 물론 출산을 앞둔 처자도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고 말했다.
유기농 볏짚 위에서 발효시킨 메주는 음력 정월에 다시 날을 받아 장을 담근다. 이때 비로소 구벌 죽염 토판염과 메주, 150m 지하수가 만난다. 이후 발효 과정을 거치는데 5년 넘게 일정한 염도를 유지해야 하는 진장은 그때그때 햇간장을 조금씩 넣어줘야 한다. 기 명인은 "장 담그는 과정은 매년 실험을 하는 것과 같다"며 "해마다 온도나 습도가 바뀌기 때문에 그해 상황에 맞게 매번 담그는 법도 조금씩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기 명인이 전통 장에 죽염을 활용하게 된 것은 남편 덕분이었다. 남편 고갑석 씨는 남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해 어려운 집에 쌀이나 나물을 퍼주는 것은 예삿일이고 학창 시절에는 남의 납부금을 대신 내주기도 했다. 형제들이 모두 서울대로 진학할 때 그는 동국대 불교학과로 갈 만큼 불교에 심취했다. 장손만 아니었으면 그 길로 스님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남편은 한 스님으로부터 죽염 만드는 법을 배웠다. 남편이 죽염을 만들자 기 명인은 된장과 간장에 죽염을 응용했다. 장을 담글 때 사용하는 소금을 죽염으로 바꾼 것이었다. 10대를 내려오는 장맛에 죽염이 더해지니 장맛은 감칠맛을 더해갔다. 기 명인이 남편의 죽염을 살림에 활용하고 있는 사이 남편 고씨는 죽염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씨는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째에 돌연 병석에 눕게 됐다. 생계를 꾸려갈 수단이라고는 고씨가 미리 구워둔 죽염밖에 없었다. 기 명인은 아들딸과 힘을 합해 죽염을 팔았다. 그때 된장, 간장을 팔아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모두가 '장을 누가 사먹느냐'며 반대했지만 그는 장을 팔아보기로 했다. 5년간 앓던 남편 고씨는 세상을 떠났지만 기 명인의 장은 날이 갈수록 잘 팔려나갔다. 두 자녀와 함께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장을 연구했다. 2001년 기 명인은 냄새나지 않는 분말 죽염 청국장을 만들어 담양군으로부터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이렇게 기 명인의 장이 소문이 나자 그를 명인으로 올리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명인 칭호는 전통식품의 제조·가공·조리 방법을 원형대로 보존해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심사 과정도 매우 까다롭다. 20년 이상 해당 분야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 외에도 전통 방식을 따라야 하고 해당 음식을 계승하려는 생각을 평가받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농림축산식품부가 1994년부터 식품명인을 지정하기 시작했지만 현재 그 숫자는 64명에 불과하다.
명인 심사를 받던 날 당시 심사관은 "점점 짜지 않게 먹는 소비자들에게 진장은 너무 짠 것 아니냐"고 물었다. "배부르려고 간장 자십니까? 한 숟가락 넣어서 짜면 반 숟가락 넣으면 되재." 재수·삼수를 해도 얻기 힘든 명인 칭호를 기 명인은 특유의 장에 대한 철학으로 단번에 명인 심사를 통과했다.
기 명인은 이후 경복궁 장고지 복원 자문위원으로도 선정되고 청와대 바자회에도 장을 납품했다. 1996년 장독대 5개로 시작한 사업은 이제 장독대 2300개가 됐다. 장독대 하나에는 메주가 50~60개, 콩으로 치면 40㎏ 가마니 3개가 들어간다. 하지만 기 명인의 우리 음식에 대한 연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매운 고추장을 못 먹는 외국인을 위해 담양 특산물 딸기를 활용한 딸기 고추장을 담갔다. 바쁜 맞벌이 주부를 위해 우거지와 들깨를 섞은 된장을 만들었다. 물만 넣어 끓이면 즉석 우거지 된장국이 되는 제품이다. 요즘엔 전남대와 청국장을 이용한 한국식 낫토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고, 집에 와서는 설탕을 사용하지 않고 식혜를 담그는 법을 고민하고 있다.
기 명인의 아들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고훈국 씨(42)는 명품 반찬 세트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전국 팔도를 돈다. 인삼을 구하기 위해 충남 금산에 가고, 자연송이를 구하기 위해 강원 양양, 꼬막을 구하기 위해 전남 벌교, 전복을 구하기 위해 전남 완도를 가는 식이다. 이렇게 구한 재료 중 인삼의 경우 6개월의 숙성 기간을 거치고, 전복 꼬막 자연송이 같은 생물은 15일간 숙성시킨다.
"예전에는 우리 간장을 잘 모르는 젊은 사람들을 원망했수. 그런데 명인이 되고 보니 그들에게 우리 간장을 알려야 하는 의무는 나한테 있더라고." 기 명인은 조만간 이화여대 등 식품학과에서 직접 장 담그는 것을 보여줄 계획을 하고 있다. 육순이 훌쩍 넘은 명인은 젊은 학생들에게 우리 장을 알릴 것을 생각하며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담양 = 조성호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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