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왜 19세기 조선인가..지금 우리의 거울"
어린 시절 집에는 신서(新書)보다 고서(古書)가 많았다. 연필보다는 붓이 더 가까이 있었다. 부친께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셨기 때문이다. 새벽이면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책 읽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갓 쓴 노인들도 가끔씩 집에 드나들었다.
옛날 책들은 냄새부터 쾨쾨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것은 어느새 그윽한 서향으로 바뀌어갔다. 10대 후반 나는 그 향에 이끌려 고서점을 찾기 시작했다.
신간 '서재에 살다'(문학동네)의 저자 박철상(48)은 서문에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고서 천지에서 나고 자라고 숨 쉬었다.
그로부터 30년. 뜻밖에도 지금 그의 직업은 은행원이다. 이재(理財)에 밝디밝을 만한 지금, 그는 난데없이 옛사람들의 서재 문화를 예찬하는 책을 써냈다.
하지만 이력을 보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의 이름이 맨처음 세간에 알려진 것부터가 고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저자의 '완당평전'이 발단이었다. 그때까지 '무명'이었던 그가 이 책에서 '숨은 오류'를 찾아냈고, 학계에서는 일대 파문이 일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에도 추사 김정희의 학문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연구 성과까지 발표해 왔다. 은행 일을 그만둔 것도 아니었다. 두 일을 병행했다.
이번 책만 해도 잘 짠 책시렁 같다. 두껍지 않은 분량에 조선 후기 지식인 24인의 서재 이야기가 가지런하다. 왜 하필 옛날 서재 타령인가. 그의 별난 관심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책에다 이렇게 써놨다.
"전통 시대 서재는 학문과 아취를 상징하는 특별한 곳이었다. 지식인의 삶이 거기서 시작되고 갈무리됐다. 서재 이름이 그 주인과 동일시됐다. 그 이름에 삶의 방향과 기호가 담겼고, 시대에 대한 고민이 깃들기도 했다. 당연히 작명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서재 이름이야말로 그곳에 머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단초이자 한 시대를 이해하는 통로라고 믿는 이유다."
그는 조선의 19세기야말로 지금 우리 문화가 싹튼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때도 지금처럼 외래 문화와 접촉이 빈번했고 그만큼 지식인들의 고민도 깊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사색의 결과물이 이번 책,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서재 이름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고문헌 연구와 저술, 그리고 은행 업무. 이 불협화의 영역을 손바닥 뒤집듯 오가는 이는 대관절 어떤 사람인가. 전화로 찾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젊었다. 대답은 선선했다. "평일에는 광주에서 일하고 있으니 주말에나 만날 수 있겠다"고 했다. 조근조근한 말투로 보자면 영락없는 '은행원'이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 "주말엔 거의 인사동 쪽에 있으니, 인사동에서 보시죠." 고서 연구가의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지난달 14일 오전. 한산한 인사동 거리 전통 찻집에서 첫 손님으로 자리를 잡았다. 따끈한 대추차를 홀짝이면서 그는 그토록 '애정'하는 19세기 조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나?
2008년부터 2012년까지는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일했다. 원고는 그 때 썼다. 책을 내기로 한 뒤 작업할 때엔 서울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출간 직전에 인사 발령이 나서 광주로 다시 가게 됐다.
-이력이 특이하다. 은행원이자 고문헌 연구가라니. 어떻게 고문헌에 관심을 갖게 됐나?
아버지가 한학(漢學)을 하셨다. 어릴 때 한옥에서 자랐다.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잤고, 아버지는 건넌방에서 따로 주무셨다. 새벽마다 아버지가 책을 읽으셨다. 보통 새벽 5시쯤. 우리는 책을 '본다' 고 하지 않나. 옛 사람들은 책을 말 그대로 '읽는다' 고 했다. 소리내어 읽는다고 해서 성독(聲讀)이라고 한다. 아버지도 새벽 4~5시쯤 일어나 매일 성독을 했다.
문장을 몰라서 읽는 게 아니다. 읽으면서 계속 음미한다. 마음에 새기는 거다. 소리내어 읽지 않으면 말도 잘 안 나온다고 했다. 외국어 배울 때 지금도 소리내어 말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지 않나. 그것과 똑같다. 외국어니까. 아버지께서 새벽마다 두 시간씩, 그렇게 매일 읽으셨다.
꿈결에 그 소리가 들려오는 거다. 아마 나는 아버지가 책 읽기 시작하신 뒤 한 시간쯤 지나서 잠이 깨곤 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연세가 많아서 그렇게는 안 하시지만 그땐 그렇게 생활했다.
-혹시 회초리 들고 한자를 외우게 하신 건 아닌가?(웃음)
그렇게는 안 하셨다. 그 때도 그런 시대는 지났을 때니까. 아버지가 먼저 가르치신 게 아니라, 내가 궁금한 걸 여쭤보면서 흥미를 갖게 됐다. 스승이 어떤 사람인가. 내가 궁금할 때 물어보면,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 요즘 멘토(mentor)라고 많이 하지 않나.
아버지가 멘토였다. 원래 굉장히 엄했는데 한자를 배우면서 가까워졌다. 초등학교 때 한문 숙제를 하는데, 옥편을 찾아야 했다. 그럴 때 어려운 문자를 아버지께 여쭤보면 바로바로 답이 나왔다. 이렇게 쓰는 거라고 보여주시기도 하고. 어느 순간부터 '아 이렇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고사(故事)도 옛날 이야기처럼 알려주시곤 했다. 요즘 부모가 애들 손 잡고 고궁(古宮)에 가면, 잘 모르지 않나. 표지판이나 읽고. 그런데 난 아버지가 그런 걸 술술 설명해주시곤 했다. 그런 옛 문화를 내가 항상 접하고 산 게 중요한 거다. 배운 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계속 접했다 .
그게 내게 미친 영향이 컸다.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그보다 접하는 게 가장 중요한 거 같다. 남들은 책을 보고 공부해야 하는 것들이 나에겐 일상이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체득된 거다.
-아버지가 한학자라면 오히려 한학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큰 형은 별로 안 좋아했다. 아버지가 실제로 큰 형은 어릴 때부터 천자문을 가르치셨다. 새벽 네시에 애를 깨워서 붙들고 가르치신 거다. 큰 형은 졸려 죽겠는데 혼나면서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다음 애들은 굳이 가르치지 않으셨다. 내 경우는 내가 여쭤봐서 알게 된 거다. 큰 형도 커서는 "그 때 배우지 않은 게 후회된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본격적으로 한학에 빠져들게 된 계기가 있었나?
엄청난 사건이나 계기는 없었다. 나는 농담삼아 이걸 업보(業報)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였나, 한문 시간에 선생님이 쭉 설명하면 그냥 바로 이해가 됐다. 시험기간이 되면 애들이 나한테 질문을 한다. 선생님께 여쭤보긴 껄끄러우니까. 그럼 내가 설명해준다. 그러면 다른 애가 또 와서 묻고, 다시 설명한다. 그러면 나도 사실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가르치면서 공부를 다 한 셈이니까.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접근하게 됐다.
-전공을 고문헌 연구와 관련된 쪽으로 할 생각은 없었나?
대학에 진학할 때 사실 역사학과를 생각했다. 그런데 큰 형이 강하게 말렸다. 밥벌이 힘들다고. 그래서 경영학과로 진학했다. 경영학과 나오면 취직이 잘 되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1년쯤 공부해보니, 경영학은 별로였다. 이게 기술이고 기법이지 학문이 맞나 싶었다. 시시하게 느껴졌다. 수업 때 듣고 시험 때나 공부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 대신 따로 한문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고서점에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다.
제일 처음 고서점에 가본 건 고등학교 때였다. 그땐 서점 주인이 사람 취급을 안했다. 인사동의 고서점에 갔는데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학 다니면서는 하나씩 사모으기 시작했다. 그 땐 돈이 없으니 서서 보다가 싼 걸로 하나씩 샀다. 제대로 고서를 모으기 시작한 건 은행에 취업한 뒤다. 그 때도 고서점 주인이 나한텐 눈길도 안 줬다. 양복 입은 채 들어가면 "에이, 귀찮은 놈 또 왔네" 하는 식이었다.
-'선수한테만 판다' 이런 거였나 보다.
그렇지. 다 아니까. 내가 뭐 물어보면 대답도 안하다가, 계속 물어보면 "없어" 하면서 퉁퉁거렸다. 하루는 같은 서점에 들어갔는데, 주인 뒤편에 좋아보이는 책이 있었다. "저거 좀 보여달라" 했더니 "비싼거야" 하더라. "그래도 보여줘 보세요" 했더니 "이거 진짜 좋은 책이야, 비싸" 라는 말만 했다. 그래서 "아니 얼만데요?" 했더니 백만원이란다. 그래서 "그럼 살게요, 주세요"했다. 주인이 그땐 깜짝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뒤에야 나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었다. 지금은 아주 가깝게 지낸다.
원래 고서점 주인들이 그렇다. 책을 보여주는 것도 잘 하지 않는다. 나한테는 특별히 싸게 해주는 건 아니지만, 좋은 자료가 있으면 보여주긴 한다.
-원래 집에 장서가 많았나?
아버지가 보시던 책 정도다. 옛날 집엔 책이 많을 수가 없다. 책이 귀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퇴계 이황의 제자 월천 조목(月川 趙穆·1524~1606)이라는 분이 있다. 퇴계가 이렇게 조명받도록 만든 주역이다. 그 대단한 학자가 평생 모은 책이 1400권 밖에 안 됐다.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1606~1672) 선생도 장서가 3000권이 채 안 된다. 나중에 지방에서 책 많이 모았다는 사람들은 구한 말 때, 책이 좀 흔해진 뒤에야 모으게 된 거다. 중국에서 책이 쏟아져 들어올 무렵에 한꺼번에 사들인 게 대부분이다.
우리 집도 본가가 전주인데, 동학혁명 때 소장했던 책이 많이 탔다고 한다. 일부만 가지고 완주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보시던 책 말고는 별로 없었다. 아주 옛날 고서 말고는 일제 때 나온 책 이런 걸 보셨다. 그 뒤로 내가 수집을 많이 했다.
-민간 출판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렇다. 조선시대 출판은 기본적으로 왕실에서 했다. 현대로 치면 국정 교과서 성격이 강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출판에 돈이 많이 들었다. 책 찍을 때 가장 중요한 게 종이 아닌가. 그런데 종이값이 금값이었다. 민간 출판이란 게 당연히 관(官)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 종이 질에서 경쟁이 안 됐다.
그래서 민간 출판은 이야기책이나 과거 볼 때 꼭 필요한 책 중심으로만 발달했다. 돈 있는 양반들이 누가 그런 책을 보나. 좋은 종이에 찍은 책이나 중국에서 수입한 책을 봤다. 그러니 민간에선 시장 형성 자체가 안됐다. 수요가 없으니까.
민간 출판이 잠깐 성행한 때가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 직후다. 책이 다 불에 타서 없어졌으니, 양반들도 급한대로 질 떨어지는 책을 산 거다. 그거라도 베껴야 하니까. 그래서 조잡한 수준이지만 민간에서도 책이 나왔다.
그러다 왕실 출판이 다시 살아나면서 시장이 싹 죽었다. 민간 출판이 일어나기 시작한 건 19세기부터다. 민간 문화가 상승한 영향이다. 그전까진 돈 있는 양반만 배웠는데, 민간에서도 배우려는 사람이 늘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책이 팔린 거다.
-지금 개인적으로 소장한 책은 얼마나 되나?
세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아마 만 권은 넘을 거다.
-옛 사람들처럼 목록 적어서 관리할 줄 알았다.
그럴 시간이 없다(웃음). 옛날 책도 있고 요즘 책도 많고. 만 권은 넘을 거 같은데 일일이 셀 수 없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학에 집중하게 됐다고 들었다.
당시 외국환 업무를 하고 있었다. 항상 바쁜 부서인데, 외환위기가 닥쳤다. 출근했더니 하루아침에 할 일이 없어졌다. 충격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이 처음 선택할 땐 월급도 많고 복지도 좋았다. 게다가 오래 다닐 수 있다는 게 매력이었다. 처음 들어갈 당시엔 일반 기업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우가 좋았다. 그런데 은행들이 우수수 망하니 이게 수용이 안 됐다.
원래 일상은 출근 직후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아침부터 일 하고, 점심 먹고 와서 또 바삐 일 하고, 저녁엔 야근하고. 항상 그랬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오니, 갑자기 일이 없어졌다. 보통 직장 일이란 게 그렇지 않나.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지만, 한 달 뒤를 준비하는 일도 있고 길게는 일 년을 준비하는 일도 있다.
그런데 내일 우리가 어떻게 될 지 모르니 당장 닥친 일만 하는 거다. 할 일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는데 막상 보니까 일이 없더라. 그럼 뭘 할까. 그럼 번역을 하자고 생각했다. 때마침 번역하고 싶은 책도 있었다. 중국 서지학을 집대성한 '서림청화(書林淸話)'란 책이다.
그 뒤로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번역을 했다. 좀 어려운 글자가 나와 막히면 남겨둔 뒤 집에 가서 다시 확인해 보고. 아침에 출근하면 또 번역을 했다. 그렇게 4개월을 보냈다. 4개월 만에 10권짜리 책의 초벌 번역이 다 끝나 있었다.
지금 나더러 그걸 하라고 하면 안 할 거다. 돈 준다고 해도 직접하진 않을 거다. 그런데 그 당시엔 마음이 불안하니까, 마음 쏟을 게 필요했던 거다. 집중할 게 필요했던 거지. 그렇게 초벌 번역을 끝냈지만 달리 책 내거나 할 계획이 없어서 그냥 뒀다.
-개인 소장용 번역이었던 거네.
그렇다. 굉장히 하고 싶었던 일이다. 서림청화란 게 대단한 책이다. 아시아권에서 최초로 서지학(書誌學)을 다룬 전문서다. 책에 관한 모든 게 들어있다. 청 말기 학자 섭덕휘(葉德輝·1864~1927)가 중국의 출판문화 전반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일본 학자는 물론 우리나라의 유명 학자들도 다 그 책을 인용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필요한 부분만 인용한 거다. 책 내용 자체도 그렇지만 지명과 인명이 너무 많이 나와서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일본 사람들이 번역을 얼마나 좋아하나. 웬만한 책은 번역 안한 게 없다. 그런데 이 책만큼은 번역을 안 했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고문헌을 웬만큼 본 나도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중국 서지학의 모든 걸 집대성해 놓은 거다. 이 사람이 중국 장서인(臟書印·책이나 그림 등의 소장자가 자신의 소유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 찍은 도장) 문화를 연구했다. 이걸 읽다가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싶어 찾아봤는데 아무것도 연구된 게 없었다.
다른 분야 연구는 어떨까, 비교해봤다.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돼 있는 게 없었다. 이 책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연구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특별히 중요한 책이다.
-어떻게 책까지 내게 됐나?
우연한 기회에 '문헌과 해석' 모임을 알게 됐다. 그 모임에서 "내가 서림청화를 번역해서 갖고 있다"고 했더니, 다들 놀라워했다. 당장 출판하라며 출판사까지 연결해줬다. 그게 2004년이다.
외환위기 때 번역해둔 원고를 몇 년이나 갖고 있다가 계약한 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글 프로그램으로 작업해뒀는데, 그 당시엔 책을 내려면 원고를 매킨토시용으로 변환해야 했다. 그런데 변환하면 작업해 둔 게 다 깨진다는 거다. 출판사에서도 난감해했다. 워낙 양이 많은 책이니, 재미있는 부분만 발췌해서 일부만 내자고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완역한 의미가 사라진다. 그래서 내가 설명했다. 어차피 이건 전문서고, 완역을 한 데에 의미가 있는 거라고. 그래도 출판사가 고민하는 바람에 몇 년이나 흘렀다.
그 사이 2010년에 내가 쓴 다른 책 '세한도'(문학동네)가 출간됐다. 이 책이 온 신문에 다 나오고 잘 팔리니까 서림청화 계약한 출판사에서도 깜짝 놀라서 책을 빨리 내자고 전화가 왔다. 그때는 세월이 지나서 한글 파일을 매킨토시용으로 변환해도 글자가 깨지지 않았다.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정말 우연인데 출간 시기가 절묘했다. 섭덕휘가 이 책의 서문을 쓴 게 1911년이고, 내가 번역한 서림청화(푸른역사)가 나온 해가 2011년이다. 100주년에 꼭 맞추게 된 거다. 일부러 한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신기하게도 그렇게 됐다.
-'완당평전' 오류 지적 사건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당시 세 권짜리 완당평전이 나온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책이 출간된 날 점심도 굶고 서점에 가서 책을 사왔다. 퇴근하자마자 그날 저녁에 다 읽었다. 읽으면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다른 오류도 문제지만, 특히 주석을 단 게 문제가 됐다.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나 잘못 해석한 부분이 학술적으로 인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급력이 큰 작가 아닌가. 너무 놀라서 '문헌과 해석' 연구회에서 상의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나보고 반박하는 글을 쓰라고 권했다. 그래서 글을 준비해 학회지에 발표했다. 학회에서 발표한 뒤 기자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런데 당시 내 나이가 30대 중반에 직업이 은행원 아닌가. 기자들도 "당신이 쓴 거 맞냐"며 의아해했다.(웃음) 워낙 다양한 분야에 걸친 분석이기 때문에 한문학만 전공한 사람은 쓸 수 없는 글이었다.
뭐 내가 쓴 게 맞으니, 기사가 나갔다. 파장이 엄청났다. 사실 반박이 들어올 것에 대비해 다른 글도 준비했다. 그런데 첫 번째 글에 대한 기사가 나간 뒤 저자가 비판을 수용했다. 그렇게 해서 사건이 일단락됐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건 그 뒷얘기다. '문헌과 해석' 모임이 매주 금요일 저녁에 있다. 완당평전 오류를 지적한 다음 날, 평소처럼 인사동으로 갔다. 자주 들르는 고서점이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다른 고서점 주인이 와 있었다. 나도 안면이 있는 분인데, 날 보더니 황급히 보따리를 싸는 거다. 그런데 그 분이 나간 뒤 서점 주인이 "저 분 지금 가져간 책이 추사 김정희 문집 필사본인데 아주 좋더라. 가서 사라"고 귀띔해줬다.
곧바로 그분한테 전화를 걸었다. 책 좀 보고 싶다고. 오라고 했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에 그 서점으로 갔다. 서점 한 쪽에 그 필사본이라는 책이 놓여있었다. 책을 들춰봤다. 와, 그런데 어마어마한 게 나왔다. 손이 덜덜 떨렸다.
김정희가 말년에 자기 저서를 두 번에 걸쳐 불태웠다. 그 때 불타지 않은 책이 나온 거다. 그것도 금석학에 관한 책이. 그게 바로 해동비고(海東碑攷) 필사본이었다. 추사가 한국의 고비문(古碑文) 7점을 옮겨 적고 이를 분석한 논문집이다.
추사가 관뚜껑을 박차고 나와 내게 선물을 주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다. 완당평전의 오류를 비판한 직후에 거짓말처럼 눈 앞에 해동비고가 나타났으니까.
'세한도'를 쓸 때도 그런 일이 많았다. 책을 쓰면서 꼭 필요했던 자료들이 운명처럼 나타났다. 연락 한 번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전화 와서 "책이 하나 있는데 혹시 필요해?"하며 보내주는데, 그게 정말 내게 필요한 자료라거나. 그런 식으로 갑자기 나타난 자료 몇 개가 없었다면, 세한도 책 역시 지금 모습과 많이 달라졌을 거다. 그래서 내가 '업보'라고 하는 거다.
그러고 보면 완당평전 사건이 나를 깨운 셈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런 글 쓰는 시기를 놓쳤을 거다. 원래는 이렇게 일찍 책을 쓰기 시작할 생각이 없었다. 늘 은행원 생활을 그만둔 뒤 말년에 책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자료를 모으고, 공부를 하곤 했었다. 그 일을 겪은 뒤 '아, 이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거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문헌과 해석' 학회에 나간 뒤부터다. 학회에서 계간지를 내는데, 거기에 장서인(藏書印) 이야기를 연재했다. 총 11회 연재했는데, 그 뒤로 학계 풍토가 바뀌었다. 그 전까지는 장서인에 관한 연구가 너무나 부족했다.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전시회에 가든, 도록만 봐도 장서인에 대한 설명이 꼭 나온다.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추사 150주기 특별전 자문위원을 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전시회 도록에 인장에 관한 설명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로는 이게 기본이 됐다. 그렇게 바뀌어가는 걸 보면 뿌듯하다.
-장서인 연구는 누구에게 배웠나?
사실 그런 부분은 따로 배운 게 별로 없다. 책을 보는데, 자꾸만 도장이 신경쓰였다. 궁금해서 찾아보고 공부하기 시작한 거다. 나는 직접 도장 파는 사람도 아니고, 글씨 쓰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19세기 문화를 살려내고 싶었던 거다. 숨겨진 문화를 계속해서 찾아내고 밝혀내고 싶었다.
인장의 역사도 내년쯤 책을 낼 계획이다.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문인 사이에서는 보편화된 문화였다. 얼마나 많은 문인들이 직접 인장을 팠는지 모른다. 상상해보라, 우리나라 장관들이 퇴근하고 집에 가서는 도장 파고 있는 셈이다. 조선시대엔 실제로 아주 지체 높은 양반들이 그런 걸 하고 있었다. 죽을 때 무덤까지 가지고 갈 만큼 애착을 가진 게 인장이었다.
-이번 책은 옛날 서재를 통해 사람을 본다는 발상이 특이하다. 어떻게 이런 걸 쓰게 됐나?
사실은 국회도서관보 쪽에서 먼저 제의해 왔다. 원래 다른 필자에게 의뢰했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나한테 왔다. 처음엔 요즘 사람들 서재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생각했다. 개인 서재를 찾아가서 취재하고 글 쓰는. 그런데 그렇게 쓰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러면 조선시대 인물의 서재를 한 번 해보자고 했다.
문제는 조선시대 서재 가운데 남아있는 실물이 별로 없다는 거다. 남아있는 건 이름 뿐이다. 그렇다고 이름만 쓸 수는 없지 않나. 거기에 이야기를 더했다.
옛 사람들은 서재가 있으면 이름을 짓고, 그 이름에 맞는 글을 직접 쓰거나 지인으로부터 글을 받았다. 글을 써준 사람과 서재 주인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된 경우도 많다. 그 글에는 서재 주인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서재 이름이 중요하다 .
지금도 이름이란 게 그렇지 않나. 사람도, 가게도. 예전엔 더했다. 호적에 올릴 때 이름 짓고, 친한 친구들이 이름 지어주고, 성인이 되면 성인이 됐다고 이름 짓고. 일생 동안 자주 이름이 바뀌었다.
옛날 사람들은 갖고 있는 물건에도 곧잘 이름을 붙였다. 그 뜻을 풀이한 글도 남겼다. 가장 많은 게 문방사우다. 벼루, 붓, 먹. 심지어 지팡이나 베개에도 이름을 붙이고 글을 지었다. 서재는 그런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거다.
특히 지식인에게 서재는 각별했다. 지식인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사회 생활을 시작한 뒤부터는 서재가 모든 활동의 중심이 됐다. 그러다 보니 서재 이름에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서재 이름을 갖고 그 주인의 이야기를 풀어보는게 어떨까. 내가 고쳐 제안했고, 좋다고 해서 연재를 시작한 거다.
-옛 서재나 도서관이 실물로 남아있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뭘까? 고택이나 고궁만 해도 어느 정도 남아 있는데.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있다. 하나는 전란이다. 임진왜란 때 특히 손실이 심했다. 병자호란, 정묘호란도 있었다. 타고 남은 책들을 강화도로 가져갔는데 그게 또 불타지 않았나. 그나마 남은 건 동학혁명,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됐다.
또 한가지는 조선의 기본 문화다. 집안, 패밀리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 그러니 공공 도서관이란 개념이 아니라 집안 단위로 있었다. 서재란 게 다 그런 거다. 책에서 다룬 심상규(沈象奎·1766~1838)는 4만권의 책을 소장했는데, 그 부친이 대단한 장서가였다. 그 뒤를 이은 거다. 그의 서재는 화려하기로 유명했다. 중국풍 건물을 지어 중국풍으로 장식하고, 중국 서적을 쌓았다. 그런데 그것도 다 불타 없어지고 기록만 남았다
-연구자 입장에선 아쉽겠다.
많이 아쉽다. 기록에는 남아 있는데 실체가 없다. 아무래도 땅이 좁은 탓이 큰 거 같다. 한 번 전란이 나면 다 불타니까. 중국만 해도 땅이 워낙 넓으니 일부가 불타도 일부는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린 그게 안 된다. 충청도 진천 초평리란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도 18세기에 아주 유명한 장서가 이하곤(李夏坤·1677~1724)의 서재가 있었다. 아주 유명했던 곳인데 거기도 불에 탔다. 우리나라에 남은 서재는 일부 고가(古家)에 있는 건데, 다들 자기 집안 서재로 쓰고 공개는 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서재를 각별히 생각해서 이름까지 붙이고 글까지 주고받았다니 재밌다.
조선시대에는 그게 일반적인 문화였다. 19세기 때 지식인들 서재 이름이 특히 흥미롭다. 정조(正祖·1752~1800)의 서재 이름이 '홍재 (弘齋)'였다. '홍(弘)'은 '크다, 넓다'는 뜻이다.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라고 했던 증자의 말에서 따왔다. 글자 하나 놓고, 경전 문구로 글자를 풀이하는 식이었다.
갈수록 점점 더 서재 이름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다산의 서재명이 '여유당(與猶堂)'이었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젊은 날 천주학을 접했다는 이유로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젊은 혈기를 다스리지 못했던 지난 날을 되새기며 지은 서재 이름이다.
"여(與)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하고/유(猶)가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는 노자의 말에서 따왔다. 코끼리가 겨울에 살얼음이 낀 시내를 건너듯이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의 서재 이름이 '완당(阮堂)'이다. 추사가 스승인 완원(阮元)을 흠모한다는 뜻을 담았다. 마치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연예인 이름을 따오듯, 그렇게 붙인 거다.
조희룡(趙熙龍·1789~1866)은 벼루를 무척 좋아했는데 서재 이름을 '백이연전전려(百二硯田田廬)'라고 붙였다. '백두 개의 벼루가 있는 시골집'이라는 뜻이다. 벼루 많다고 자랑하는 이름이다. 지금이야 벼루 백두 개 갖고 있다고 하면 어디에 쓰나 한다. 하지만 당시 선비로서는 최고의 자랑거리다. 얼마나 좋았으면 서재 이름에 그런 이름을 지었겠나.
당시 사람들도 좋아하는 것에는 빠져들고, 미치고, 쫓아다녔다. 그 뜻을 담은 이름까지 붙이고, 그 이름에 자기 삶도 담았다. 지금 우리 모습도 똑같지 않나. 그 사람들과 우리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쓴 책들이 대부분 19세기 중심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지금 우리 정체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탐구와 관련이 있다. 조선의 역사를 보자. 1392년에 건국했고 200년 뒤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 200년 뒤가 1792년, 정조 때다. 정체성이란 게 어느 날 갑자기 바뀌는 게 아니다.
조선이 건국됐다고 해서 고려인이 하루아침에 조선 사람으로 바뀌지 않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세대 교체가 일어났다. 조선이란 나라의 정체성이 만들어질 무렵, 그게 임진왜란으로 한 차례 깨진다. 그 다음 17세기와 18세기 역사는 다시 조선이란 정체성을 재건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정조란 인물이 등장한다.
조선 지식인의 의식 속에선 명(明)의 존재가 특별했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군을 보내 우리를 구해준 나라였다. 지금 우리가 미국에 대해 갖는 감정과 다를 게 없었을 거다. 좀 더 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명이 망하고, 청(淸)이 들어섰다.
하지만 조선 입장에서 보면, 청은 오랑캐였다. 문명도 떨어지고 예의범절도 모르는. 그러니 조선 지식인들은 '명은 망했지만, 그 문화는 우리가 계승했다'는 의식이 있었다. '우리가 명의 적통(嫡統)'이라는 거다.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한 뒤, 우리가 사신을 보내면서도 그 쪽은 사람같지 않게 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깜짝 놀라게 됐다. 명나라 말기의 지식인이 다 죽고 새 세대가 들어섰는데, 청이 이런 지식인을 포용하는 모습을 본 거다. 이 때가 정조 세손시절이다. 정조는 그 때부터 새로운 세상을 만들 준비를 했다. 그전까지 조선은 청이 문화적으로 우리보다 떨어진다고 얕봤다. 그런데 실제로 가서 보니, 이제 그게 아닌 거다.
당시 문화 발달의 정도를 가늠하는 기준은 책이다. 모든 정보가 다 담긴 유일한 통로였으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게임이 안 되는 거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청을 어떻게 따라잡을지 연구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뒤, 굉장히 많은 책을 출간하고 조선을 새롭게 만들어내려 했다. 그러다 정조가 사망했다. 그게 1800년이다. 나는 사실 정조가 죽으면서 조선이란 나라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뭔가?
정조가 죽은 다음이 문제다. 정조는 청의 문물을 주체적으로 수용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떤 부분은 수출입을 통제했지만 서학(西學), 천주교 같은 건 허용했다. 정조 말년에 가면 그런 문물이 정치적으로 이용됐는데, 그 와중에 정조가 죽는다. 그런데 정조의 죽음은 의미가 매우 크다.
정조는 생전에 군사(君師)를 자처했다 . 임금(君)이자 신하들의 스승(師)이란 뜻이다. 조선 시대에 '경연(經筵)'이란 게 있다. 신하들이 왕에게 왕도를 가르치는 수업이다. 그런데 정조 때엔 스승과 제자의 위치가 바뀌어버린다. 왕이 질문하면 신하들이 답을 하지 못할 지경이 됐다.
정조는 학자로서도 조선시대에 손꼽힐 만큼 박식했다. 세손 시절부터 역대 우리나라 학자들의 문집을 거의 섭렵했다. 중국 책은 말할 것도 없다. 학술적으로 신하들을 모두 장악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거다. 신하들도 왕의 신하임과 동시에 제자가 됐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중국의 문물을 들여와 섞는 작업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정조는 탕평책(蕩平策)을 썼다. 신하의 파벌을 따지지 않았다. 거기에 유득공, 박제가 등 서얼 출신을 보좌관으로 삼았다. 그렇게 전보다 자유스러운, 새 시대가 만들어지나 싶었다. 그런데 정조가 갑자기 죽고, 어린 아이가 왕위에 올랐다. 정조 덕분에 신하들의 수준이 올라갔는데, 이번엔 반대로 왕 수준이 내려간 거다. 여기에 인척 관계가 얽히기 시작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조 사후 60년 동안은 그가 길러놓은 신하들에 의해 굴러간 거다. 그래서 정조가 죽으면서 '조선'이 끝났다고 본다.
이 때, 19세기에 왕실문화가 민간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왕실 문화와 민간의 문화가 섞이기 시작한 거다. 그러면서 이른바 '여항(閭巷) 지식인' 이 부상한다. 사대부나 양반은 아닌데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 역관 같은 사람들이 자꾸 위로 올라간다. 정치사에선 아니지만, 점차 사회 문화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이런 사람들의 사회 중심부 등장, 그게 지금 우리 모습과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느 사회에나 '층' 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 중간층을 어떤 사람들이 장악하느냐다. 19세기 조선에선 원래 사대부가 장악했던 자리를 어느새 중인들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바로 추사 김정희가 있었다. 추사는 영조의 외증손, 왕실 문화를 잇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여항인과 승려들의 문화를 가져 온다. 가장 밑에 있던 문화를 왕실 문화와 섞는 역할을 한 거다.
-책에선 조선시대 지식인 24인을 추렸다. 특별한 기준이 있었나?
책에서 다룬 사람들은 추사 김정희 전후로 살았던 19세기 조선 인물이다. 19세기 조선의 모습이 바로 지금 우리와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19세기에 우리의 정체성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우리의 20세기라는 게 뭔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나. 전반부엔 일본이 언어부터 문화까지 우리를 지배했다. 해방 후엔 미국이 들어왔다. 미국이 원하는 문화를 받아들여 살아왔다. 그 사이 우리는 우리 정체성을 잃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과연 조선의 뿌리를 이은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볼 땐 아닌 거 같다. 서양을 보면, 200년 전 프랑스 혁명 이후로 갖고 있던 생각을 지금도 이어간다. 그때의 문학이 지금까지 연결된다 .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물론 한자 문화가 한글로 바뀐 영향도 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19세기엔 이미 한글 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한글 소설부터 시작해서 천주교가 들어올 땐 성경이 다 한글로 번역됐다. 외서도 한글로 번역됐다. 20세기에 갑자기 한글이 등장하는 게 아니다. 19세기의 연장선에서 20세기를 봐야 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19세기를 이어온 것인데, 느끼지를 못한다. 내가 19세기를 자꾸 끌어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세기라는 단절의 시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지금 하는 작업 가운데 하나가 19세기의 전문가 집단을 밝혀내는 것이다. 지금은 자료가 없는데, 그걸 자꾸 밝히는 거다. 예를 들어 역관. 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 시대 역관이 어떻게 활동했나. 기생도 있고, 내시도 있고. 내시라고 하면 흔히들 터부시한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오면 그게 아니다. 내시가 문인들과 교류하고, 출판을 한 사람도 있다. 우린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 화가들도 단순한 그림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사회활동을 해 나간다. 앞으로도 이런 쪽의 연구 작업을 계속 해나가려고 한다.
지금 높게 치는 의사나 변호사, 외교관이 조선시대로 치면 다 중인들이다. 교수도 마찬가지다. 성균관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개념이지만,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중인이었다. 그런 중인들이 차츰 성장하면서, 20세기에 뭔가를 만들어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 시기가 일본과 미국에 의해 날아가버린 거다. 그 뒤 우리 문화 일부가 일본에 의해, 또 일부가 미국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걸 우리가 그대로 쓰는 거다.
요즘 '우리 것이 좋은 것이다'고들 한다. 그런데 진짜 우리 것이 뭔지 아나. 농악? 우리 문화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정말 조선시대 문화 가운데 유일하게 계승해야 하는 걸까. 농악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문화의 '일부'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
요즘 문화 주류가 공연 문화다. 그러다 보니 농악 같은 공연 문화만 발췌된 거다. 정작 조선 시대의 중요한 사대부 문화는 사실상 완벽하게 사라졌다. 19세기 인물들이 쌓아올린 삶이 지금 우리 삶 속에선 다 사라져 버린 거다.
-19세기 시대 상황이 지금 우리와 비슷하다는 얘긴데.
그렇다. 추사 김정희는 그 시대에 일본과 중국의 모습을 지켜봤다. 서양의 문물은 중국을 통해 번역된 것으로 봤다. 청나라를 배운 건 사실 서양문화를 포함한 '외래 문화' 를 배운 것이다. 한자로 번역된 외래 문화. 일본에서 온 자료들도 마찬가지다. 정조 때 대마도 등지에서 나온 자료들이 부산항을 통해 엄청나게 들어왔다.
옛날에는 일본이 중국 문물을 들여갈 때 우리나라를 통해 들여갔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는 중국 남방과 직접 교역하기 시작했다. 책을 직수입하고, 우리보다 더 빨리 최신 정보를 보고 있었다. 추사는 이런 상황을 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책이 문제가 아니라, 장차 일본이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주도에 유배됐을 때에도 배가 들어오면 아주 민감하게 관찰했다. 외래 문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앞으로 살아나갈 방향을 고민하는 그런 모습, 지금 우리의 모습과 같다.
우리의 19세기 문화는 상층 문화가 내려오고, 하층 문화는 올라가면서 두 문화가 만난 시기다. 서재 이야기에서 다룬 24명만 그 시대의 대표 지식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식인은 지방에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넣을 수 없었다.
지방 문화는 호흡이 아주 길다. 퇴계 이황이 살던 16세기부터 17세기,18세기, 19세기까지 흐름에 큰 변화가 없다. 서울은 다르다. 모든 게 가장 빨리 변화한 곳이다. 18세기가 달랐고, 19세기가 또 달랐다. 그래서 서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거다.
거듭 말하지만 19세기 문화를 살려내야 20세기도 살아난다. 19세기가 살아나면, 20세기 초반의 문화도 밝혀낼 수 있다. 단순히 몇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한 시대 전체를 봐야 한다. 지금은 모든 역사 이야기가 정치사 중심이다. 그 못지않게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문화사가 중요하다. 그 점을 간과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정조 이후 시대는 대부분 쇠락하는 왕실로 묘사된다. 서양에선 시민혁명같이 아래에서 힘이 분출하던 시기로 조명되는데.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혁명이 어려운 사회다. 그런 혁명을 하려면 나라 크기가 좀 커야 한다. 작으면 쉽게 진압되니 어렵다. 우리의 19세기가 중요한 건, 시대를 바꾸려는 세력이 아래에서 커 나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막바지인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난다. 힘의 주도권이 바뀌려는 와중에 일본이 들어오고 청나라, 러시아까지 들어오며 외세 강점기가 됐지만. 그 전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우리가 너무 모른다.
이 시대의 주요 인물을 다룬 드라마가 드문 것도 우리가 잘 몰라서 그런 거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조명하면, 더 많은 이야기나 소설, 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 20세기 이상으로 19세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얼마나 많은 외래 문화가 뒤섞이고, 그걸 보며 지식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시대다. 그 고민을 거친 뒤 19세기 말부터 어떻게 되나. 미국, 일본, 프랑스로 유학 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앞선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거다.
-아예 한학에 집중하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한때 학교 출강 제의를 받기도 했고, 당시 잠깐 흔들린 적도 있다. 그러나 일단 학위 논문이 없다 보니 학계로 가기엔 제약이 많았다. 각 학교마다 내부 규정이 있는데 요건에 안 맞는 거다. 서로 곤란해졌기 때문에 그냥 은행 일과 병행했다.
학위라는 건 제도권 안에서 뭔가 할 수 있는 자격이다. 그런데 활동 폭이 넓어지다 보니 학위 없이는 불편한 점도 생겼다. 사람들이 "당신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데에 지치기도 하고. 그런 점을 고려해 그 뒤에 학위 과정을 따로 밟았다.(그는 지난해 계명대학교에서 '조선시대 금석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럼 앞으로는 은행 생활을 그만둘 수 있다는 얘긴가?
그렇지 않다. 은행원이라는 게 좋은 직업이다. 오랜 세월 애정을 품은 직장이기도 하다. 지금 일을 그만두지 않더라도 충분히 연구 활동도 할 수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두 가지를 병행할 생각이다.
-'이중 생활'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어려울 거라고 본다. '내일부터 두 가지 일을 병행해야지'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할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자기가 잘 하는 분야를 확실하게 구축해야 한다. '이게 내 분야'라고 자신할 수 있는 게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학계에 발 담그지 않고 재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난점 중 하나가 글을 써도 인정을 못 받는다는 점이다. 논문을 써야 학계에서 인정을 받는데, 논문 쓰기가 참 어렵다. 남들이 하지 않은 이야기, 새로운 시각을 써야 한다.
재야에 있는 사람들 상당 수는 그런 걸 못한다. 책을 쓴다고 치자. 책 한 권 쓰고 나면 더 이상 쓸 게 없는 사람도 많다. 그 말은 결국 확고한 자기 분야가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저기에서 들은 이야기를 짜깁기해 전달하는 수준에 그친다. 무슨 일이든 그렇게 하면 결국 제대로 안 된다.
사실 내 경우는 특이하다. 따져보면 40년 이상 한학 공부를 해온 셈이다.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오래 공부했다. 이중 생활이라고 하는데, 공부하고 책 본 시간을 따지면 훨씬 많다. 내가 이 분야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어떤 자료가 있을 때 그 자료에서 밝혀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밝혀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다시 연구해도 더 나올 게 없을 정도로.
고문헌 연구는 요리에 비유할 수 있다. 아주 귀한 자료, 새로운 책은 요리 재료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쥐여줘도, 어떤 사람이 요리하느냐에 따라 너무나 다른 요리가 나온다. 각자 자기가 아는 수준까지만 해석하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 때 대구에 살던 일본인이 가져갔던 '아스트롤라베'란 휴대용 별시계가 우리나라에 돌아왔다는 기사가 났다. 이 별시계는 주로 아라비아에서 만들던 건데, 동아시아에서 제작된 것으로는 처음이라는 기사였다. 정작 만든 사람이 어느 나라의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았다. 사진만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다른 게 보였다. 그 기자에게 연락해 사진을 자세히 좀 보고싶으니 보내달라고 했다. 사진을 검토하다가 깜짝 놀랐다. 손잡이에 네모진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유득공의 숙부였던 선비 유금(柳琴·1741~1788)의 작품이라는 표시였다. 그냥 동아시아에서 제작된 게 아니라, 기하학에 몰두했던 우리나라 선비의 작품이었다. 이렇게 누가 보느냐에 따라 의미 자체가 달라지는 거다.
-앞으로 출간 계획은?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에 대한 책을 준비 중이다. 원래 올해 1월쯤 출간할 예정이었는데 약간 늦어졌다. 조만간 출간할 예정이다. 내년은 또 의미가 남다르다. 추사가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한 게 1816년이니 우리나라 금석학이 200주년을 맞는 해다.
-그 역시 19세기 이야기다.
그렇다. 언뜻 보면 내가 연구하는 것들이 다 따로 떨어진 것 같지만 하나로 연결된다. 19세기의 모습이 결국 우리 모습이다. 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아버지는 그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추사와 거의 동시대를 산 사람이다. 3대, 4대까지는 시대의식이 어느 정도 대를 이어 공유된다는 얘기다.
지금 문제는 20세기라는 시대가 통째로 날려버려야 할 정도의 공백이 됐다는 점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묻혀있던 문화와 역사를 살려내야 한다. 농악이나 판소리 같은 공연 문화만 우리 문화가 아니다. 사라진 19세기 문화를 밝혀내야 한다.
그 시대를 알고 나면 모두 대단하다고 할 거다. 관심을 더 가지면 자연스럽게 그 시대를 다룬 소설도, 드라마도 나올 거다. 그렇게 자꾸만 19세기를 밝혀내야 20세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지금처럼 공백의 시기로 둬선 안 된다.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서재 이야기
정조(正祖)에게는 홍재(弘齋)라는 호가 있다. 정조는 세손시절 자신의 서재에 홍재라는 편액을 걸었다. 논어의 태백(泰伯)편 증자의 이야기에 '넓을 홍(弘)'의 단서가 나온다.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된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정의 실현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있으니 얼마나 무겁겠는가? 죽은 뒤에나 그만둘 수 있으니 얼마나 먼 길이겠는가?" 서재를 드나들 때마다 그 편액을 마주한 정조는 늘 '홍'자의 의미를 새겼을 것이다. 정조는 이 호를 평생 부적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리고 인정을 베풀겠다는 큰 뜻을 펼치기 위해 준비하고 또 준비했던 것이다.
이덕무(李德懋)처럼 책을 좋아하고 책에 관한 일화를 많이 남긴 인물도 드물다. 그는 평생 자신이 보고 듣고 읽고 겪은 모든 것을 책으로 만들었다. 조롱을 받기도 했다. 책만 보지 세상 물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를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간서치란 책에만 빠져 있던 그를 조롱하는 뜻으로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별명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북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다. 생부인 김노경이 부사의 자격으로 연행할 때 따라나선 것이다. 연경에 머무르는 동안 추사는 자신의 일생을 결정짓는 두 사람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바로 옹방강과 완원이다. 추사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동안 준비해두었던 모든 것을 묻고 또 물으며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추사의 별호 중에 '보담재(寶覃齋)'가 있다. 옹방강의 호가 담계(覃溪)였기 때문에 옹방강을 존경한다(寶)는 의미로 보담재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추사는 완원을 흠모한다는 의미로 '완당(阮堂)'이란 편액을 서재에 내걸었다.
조그만 책상 위에는 돌 도장 12방과 붉은 인주를 담은 인주함이 놓여 있다. 차와 향도 필수품이다. 방 한가운데에는 짚으로 만든 자리와 다 해진 양탄자를 깔았다. 그리고 목침과 등받이도 가져다놓았다. 눈에 보일듯이 묘사된 조면호의 서재는 작지만 옛 풍취가 그대로 전해온다. 그 속에서는 시간을 희롱하는 백발의 노인이 누웠다 앉았다 반복한다. 그러고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혼자서 즐거워한다. 조면호(趙冕鎬)의 서재 '자지자부지서옥(自知自不知書屋)' 기문에 묘사된 모습이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온 뒤 아주 아끼던 제자가 바로 조면호다. 5000편이 넘는 시를 남긴 19세기 대표 시인이며, 추사 예서의 맥을 이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자지자부지선생(自知自不知先生)'이라 불렀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자신은 안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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