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가 나쁘기만 하냐고 묻는 너희에게

안정선 입력 2014. 12. 22. 17:07 수정 2014. 12. 2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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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말고사를 마치고 내신 성적 산출까지 끝난 중3 교실. '공부'라 할 만한 것을 하기 참 힘겨운 시기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교과서에 얽매이지 않는 공부를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학교 중3 국어 시간에는 A4 반 장 정도에 '200자 논술 쓰기'를 하고 이를 모아 3학년 복도 큰 게시판에 붙여둔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게시판에 붙은 내용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토론을 벌일 수 있도록.

첫 번째 주제는 '나는 일베를 '이렇게' 생각한다'였다. '이렇게' 안에는 다양한 내용이 들어 있다. '안 좋게' '쓰레기 집합소라고' '그럴 수도 있다고'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등등. 개중에는 '그것도 일종의 자유언론이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을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도의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면 법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개인의 의사 표명일 뿐이니 비난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걱정이 들면서도 꼭 한 번 이 논쟁을 이끌어보고 싶어진 계기가 있었다. 1학기 수업 중에 어느 반 아이가 '샘, 는 일베래요'라고 일렀다. 가볍게 생각하려 했지만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즈음 동영상 만들기 수행평가에서 한 아이가 이승만에 대해 '대한민국을 건국한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다른 반 토론 수업에서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가 꼭 나쁘기만 한 거냐'는 발언을 한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의 이런 인식의 흔들림을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이념적인 균열로 보아야 할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표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지 착잡했다.

'일베가 나쁘기만 한 거냐'고 묻던 아이는 군 가산점 문제나 된장녀 같은 이슈에 대해 일베에서 나오는 주장에는 옳은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남자아이들은 PC 게임에 '셧다운제'로 제재를 가한 일 등 여성가족부가 펴는 일련의 정책과 주장을 '남녀' 간의 대결로, 남성에 대한 역차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여성가족부에 각을 세우는 '일베'를 보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남자들에게는 '별거 아닌 일로 성범죄자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이 늘고 있다. 근본적으로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성교육을 시작해야 하는데 '걸려들면 안 되니 이런 거 조심하고 저런 거 하지 말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젊은 남자들을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하는 시선과 닿아 있다. 군대도 가야 하지, 자칫하면 성범죄자 취급 받지, 나라에서는 게임도 못하게 하지, 여자친구 잘못 사귀면 돈 많이 써야 하지, 공부며 취업에서 여자아이들에게 자꾸 밀리지…. 남자로 살아가는 일이 하나도 신나지 않는 이 사회에서 일베의 가학적이고 패륜적인 '남녀차별 드립'이나 거침없는 '성적 표현들'은 마치 억눌린 상처를 대변하는 저항적인 이미지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일베에는 청소년, 특히 남자아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요소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청소년 범죄에 '일벌백계'를 외치던 정부는?

고등학생 딸아이 말로는 일베를 하는 남자아이들이 '엄청' 많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일베에서 열사로 추종받는 고교생까지 등장했다. 학교폭력을 포함해 다른 청소년 범죄에 대해 '학교는 무엇을 했느냐' 일갈하며 그토록 단호한 '일벌백계'를 외치던 정부가 이 사안에도 과연 그러할까 의문이 든다. 또한 어떤 사안이 터질 때 교육부나 교육청에서 많이 내려오던 '호들갑성 교육'이나마 실시될까 궁금하기까지 하다.

아이들과 200자 논술 쓰기를 하면서, 나는 그리고 학교는 참 무력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베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보다, 또 무조건적인 비난으로 '왜 나쁜 건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궁금해하는 것보다, 공론의 장에서 허상은 무너지고 합리적인 논리가 힘을 얻는다고 믿고 싶다. 부디 아이들이 매혹적이나 과격하고 무리하기 짝이 없는 '일베 논리'를 토론으로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안정선 (경희중학교 교사)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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