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심 울렸던 '순정만화' 웹툰 타고 돌아왔다
'청소년물 심의'에 위축.. 구매력 갖춘 옛팬 성원에 '화려한 부활'
최근 월간지로 거듭난 만화잡지 '보고' 4호에는 김혜린 작가의 <광야>가 수록됐다. 이 작품은 1999년까지 만화잡지 '화이트'에 연재됐으나 잡지 폐간과 함께 연재가 중단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중국을 배경으로 조선 청년들의 사랑과 울분을 그린 대하역사 순정만화다.
1983년 <북해의 별>로 큰 인기를 얻으며 데뷔한 김 작가는 <비천무> <불의 검> 등을 통해 1980~1990년대 순정만화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작품은 선 굵은 서사와 복잡한 인물 구도로 유명했다. <북해의 별>은 가상의 국가 보드니아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을 그려 당시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중국 원·명 교체기의 권력쟁탈전을 그린 <비천무>는 영화와 드라마로 각기 제작될 정도였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그의 작품을 만날 기회는 극히 적었다. 2009년 10월 신작 <인월>을 잡지 '팝툰'에 연재했으나 이듬해 2월 잡지가 폐간되면서 연재도 중단됐다. <광야>는 <인월> 이후 5년 만의 작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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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린의 <광야> |
'순정만화'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내려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여성 독자들을 위한 만화를 지칭한다. 선남선녀가 등장해 얽히고설킨 연애를 펼친다. 한국 순정만화의 역사는 1950~1960년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엔 불우한 환경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소공녀형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았다. 1980년대 김동화·황미나·김혜린·신일숙·강경옥 등이 활약하면서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작품을 남겼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등 일본 순정만화의 영향을 받은 듯한 역사 서사, 인물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한국 순정만화는 1990년대 전성기를 맞았다. 백정숙 '보고' 편집위원장은 "천계영, 유시진 등 젊은 만화가들이 등장해 동시대의 사회·문화 코드에 맞는 작품들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지나친 장식성을 배제한 세련된 그림 스타일로, 유럽의 가상 국가나 아시아의 고대·중세가 아닌 동시대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삼았다.
그러나 한국 순정만화는 2000년대 들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발표 매체의 축소, 특히 순정만화 잡지의 잇단 폐간이었다. 백정숙 편집위원장은 "1990년대 중반엔 한 달에 35종의 만화잡지가 나올 정도였으나 1997년 청소년보호법이 발효되면서 만화 유통 공간이 급속히 위축됐다"고 말했다. 청소년보호법은 성인만화를 청소년유해물로 지정해 판매·유통에 제약을 가했는데 심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순정만화 단행본 수도 2002년 835종에서 2011년 189종으로 급격히 줄었다(한국만화연감).
2000년대 들어 다음·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웹툰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대하서사 순정만화의 시대는 돌아오지 않았다. 1980~1990년대 순정만화 특유의 복잡한 그림체, 방대한 서사 등은 가볍고 속도감 있는 웹툰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최근에는 도시 남녀의 로맨스를 현실적으로 그린 순정만화가 웹툰 시장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네이버 웹툰에서는 <우리 헤어졌어요> <연애혁명> <치즈인더트랩> 등이 요일별 웹툰 조회 수 3위권 내에 자리하고 있다. <치즈인더트랩>은 드라마 제작도 추진 중이다. <우리 헤어졌어요>는 5년의 동거 끝에 이별을 결심한 남녀가 어쩔 수 없이 같은 집에 계속 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인물들이 놓인 상황은 극적으로 과장돼 있지만 그들이 겪는 감정의 흐름은 현실적이다. 류채린 작가(30)는 "강경옥, 이은혜 작가의 작품을 보며 자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적인 소재에 끌렸다"며 "앞으로도 20~30대 여성이 겪을 만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데 주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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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채린의 <우리 헤어졌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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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혜의 <설 그해 그 여름> |
옛 순정만화 팬들이 구매력 있는 30~40대가 되면서 순정만화에 대한 수요는 조금씩 늘고 있다. 콘텐츠를 유료 판매하는 카카오페이지 내 만화 장르를 살펴보면, 전체 만화 판매량 중 65%가 순정만화다. 이들은 1980~1990년대풍 대하서사 순정만화를 찾는 데도 적극적이다. 네이버 콘텐츠 마켓인 엔스토어의 만화 부문에선 한승원 작가의 <프린세스>가 전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가상의 유럽 국가를 배경으로 한 대하서사극인 <프린세스>는 1995년부터 연재, 휴재를 반복하다가 지난 6월부터 네이버에서 과거 분량이 리마스터 형식으로 연재되고 있다. 과거 분량 연재가 끝나면 새로운 내용이 나올 예정이다. 박은선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정책기획팀 과장은 "작가들도 의지를 갖고 새 플랫폼을 이용하려는 추세"라며 "대중에게 접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1990년대 주로 활동했던 강모림, 김기혜, 이영란 작가의 신작 연재를 지원하고 있다.
웹툰 시대가 10년에 이르면서 보다 다양한 순정만화에 대한 욕구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만화평론가인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시각정보가 풍부한 순정만화를 웹툰 형식으로 보기엔 익숙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지금은 10년에 이르는 웹툰 독서 경험을 가진 독자층이 보다 진지한 만화를 요구하는 전환기적 시점"이라고 말했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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