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新 풍물기행'>검은 아스팔트 광장이 푸른 공원으로.. 빌딩숲 속 '영혼 쉼터'


"긴장은 네가 되고자 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면, 휴식은 바로 너 자신이다." 여의도공원은 도시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곳이다. 검은 아스팔트의 서울 여의도광장. 20여 년 전 방송의 꿈을 품고 여의도를 처음 찾아온 날이 떠오른다. 검디검게 펼쳐진 여의도광장이 인상적이었다. 방송국에 입사 지원서를 넣고 산란한 마음을 달래고자 고작 한 일이라곤 친구들과 함께 광장에서 자전거를 탄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여의도를 평정하러 왔다는 호기라도 부려보겠다는 심산으로 말이다.
여의도광장을 자전거로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 불안한 마음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헛헛한 마음과 달리 여름날 광장의 햇볕은 유난히 뜨거웠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까지 더해져 더 이상 거기서 우리는 머물 수 없었다. 땀을 훔치며 우리는 도망치듯 광장을 빠져나왔다. 허전함, 이것이 여의도에서 받은 첫인상이었다.
몇 달 후 가을날 나는 KBS 아나운서 합격 연락을 받았다.
이제 나의 여의도 생활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1991년이었다.
# 여의도공원
20여 년이 훌쩍 지나고 보니, 방송은 정말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잊고 방송이란 시공간 안에서 살다보면 마음 속 나이는 전혀 먹지 않게 된다. 방송이 우리들의 시간을 다 가져가버렸기 때문이다. 방송은 우리에게서 시간만 가져가는 게 아니다. 마음도 가져간다. 내 마음 안의 열정도, 호기심도, 사랑도, 슬픔도, 아픔도. 모든 것을 방송 안에 쏟아붓고 나면 나 자신은 텅텅 비워지고 만다. 이렇게 '방송인 정용실'은 KBS 방송사 건물 속에서 살아냈다.
방송이 끝난 오후, 나 자신으로 돌아와 보면 정말 허전한 마음이 든다. 인간 정용실은 누구인가. 나는 뭘 좋아하고, 난 무엇을 사랑하나. 그 허전했던 어느 날(1999년 1월) 아나운서실에서 내다본 여의도광장은 공원으로 변해있었고, 그날은 하얀 눈이 소복이 공원의 나무와 풀들을 감싸고 있었다. 포근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눈은 순식간에 삼켜버릴 것 같은 검은 아스팔트의 비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런 공원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 눈이 이 세상만이 아니라 내 마음 위에도 살포시 내려앉았다.
나는 그날 이후 아나운서실 창가 자리를 사랑했다. 음악만 있다면 그곳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봄의 연초록색 싹들의 생명력과 여름으로 갈수록 점점 짙푸르러져가는 녹음, 갖가지 아름다운 색깔로 물드는 낙엽을 보고 있노라면 난 다시 삶으로, 방송으로 돌아갈 원기를 회복했다. 이렇게 나의 여의도공원 바라기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운동화를 하나 샀다. 드디어 신을 갈아 신고 공원으로 나섰다.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기로 맘을 먹었다.
# 휴식은 바로 너 자신이다
아침 방송을 마치고 여의도공원으로 나왔다. 햇살이 화사하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생기가 있다. 물기를 머금은 풀들이 싱그럽다. 난 따스한 햇볕을 쬐며 여의도공원 산책에 나섰다. 아주 천천히 걷는다. 공원에서 바라본 하늘은 어떤지, 새로 심은 꽃들은 어떤 게 있는지, 자주 걷는 길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밤에 걷는 것과는 어떤 점이 다른지, 최근에 왜 벤치를 바꾸었는지, 아침 햇살을 받은 공원은 어떤 인상인지…. 하나하나를 살피면서 걸으려니 당연히 빨리 걸을 수가 없다. 제일 먼저 여의도공원 곳곳에서 사물들의 안부를 확인했으면, 커피를 한 잔 사들고 좀 더 공원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마치 공원이 아니라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 나무로 놓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간혹 외로운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기도 하는 곳. 작은 호수를 바라보며 마시는 차 한 잔의 시간. 이곳은 공원 안 '내 속살' 같은 곳이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잠시 풀어놓는 곳. 답답한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커다란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떨어져 있는 아이가 보고 싶을 때 조용히 목놓아 울기도 하고, 누군가에게서 받은 상처를 맘대로 꺼내놓고 아파하기도 했다. 늘 긴장하며 붙들고 있어 간신히 버텼던, 약하고 쉬 흔들리는 내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사람은 어디선가 자신을 다 내보일 수 있어야 살 수 있다. 어린 시절 엄마의 품처럼 마구 응석을 부릴 수 있는 곳에서. 다 커버린 난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다가 여의도공원 작은 숲 속에 내 몸과 마음을 맡겼다.
# 도심 속의 숨구멍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힘겨운 도시 직장인들이 겨우 숨을 돌릴 수 있는 작은 공간. 어떤 이는 벤치에서 담소를 나누고, 어떤 이는 양복을 벗어들고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여유 있게 산책을 하고, 어떤 이들은 무리지어 박장대소를 하며 이곳을 지나가고, 어떤 남녀는 구석에서 사랑을 나누고, 어떤 이는 망연한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각각의 사연과 감정들이 이곳을 흐르고 있다. 도심의 공원이란, 이렇듯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며지는지도 모른다. 공원이 이 모든 이야기들을 품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읽은 시의 한 대목처럼 여의도공원을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여의도공원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적혀있다. 네 이야기와 내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 여의도공원에 아로새겨진 수많은 도시인들의 이야기가 바로 여의도공원을 다르게 다가오게 한다. 오늘도 나는 또 다른 이야기보따리를 들고 여의도공원으로 나간다.
가을바람이 참 선선하다.
'정용실의 저녁길 매거진'(KBS 1R) '한국 한국인'(KBS 1TV)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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