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일의 들숨날숨] 2014년 가을, 한국 여자축구는 다시 태어났다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향한 여자축구의 도전은 아쉽게 멈췄다. 29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대회 준결승에서 태극 낭자들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북한을 맞아 시종일관 당당한 플레이를 펼쳤으나 종료 직전, 추가시간이 4분이나 지났을 때 통한의 역전골을 허용해 1-2로 패했다.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거짓말 같은 결과였다.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은 한참동안 라커룸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난 뒤 모습을 드러낸 자랑스러운 그녀들의 눈은 하나같이 충혈돼 있었다. 울지 않는 것이 이상할 패배였다.

누군가는 웃으면서 나왔다. 전가을이었다. "전 안 울었어요"라는 말과 함께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울 일이 아니니까 웃어야죠"라고 했다. 하지만 애써 참고 있었을 뿐이다. 전가을은 "우리 정말 잘했죠"라는 말과 함께 간신히 막아두었던 눈물을 쏟아냈다. 그 한 마디에 팀의 모든 감정이 함축돼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이제 우리도 잘해요"라는 말은 듣는 이의 마음까지 뭉클하게 만들었다.

남자 축구계에서 북한의 입지는 작다. 세계무대는 고사하고 아시아권에서도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자 축구는 상황이 다르다. 과거의 중국, 현재의 일본과 함께 북한 여자축구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골리앗처럼 거대했던 북한을 상대로 태극 낭자들은 대단히 잘 싸웠다. 진부한 표현이나, 아름다운 투혼을 보여줬다. 모두가 잠시 잊고 있었던 '한국축구의 미덕'을 여자대표팀이 되찾아줬다. 생각해보니, 이것이 한국축구였다.

기계처럼 훈련된 북한은 마치 남자 선수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경기력을 선보였다. 힘, 기술, 스피드, 스태미나 어느 하나 한국이 앞서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북한의 정신력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북한은,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강했다. 보는 입장에서도 주눅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맞서 싸우는 선수들은 전혀 기에 눌리지 않았다.

한국의 무기는 다른 것 없었다. 악착같은 근성과 반드시 꺾고 싶다는 간절함 그리고 모두가 하나로 뭉친 '팀 정신'이었다. 1승1무12패라는 일방적인 역대전적을 바꿔보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다함께 땀 흘린 지난 시간에 대한 믿음으로 잔디 위를 내달렸다. 한 걸음 뛸 것을 두 발 내딛고, 몸을 거침없이 내던져 유니폼의 색깔과 디자인을 바꿨다.

전반 11분 정설빈의 멋진 무회적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넣었으나 하지만 이 골이 경기 양상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북한은 강했다. 그리고 전반 35분,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워낙 북한의 공세가 뜨거웠던 상황에서 나온 득점이라 급격히 전세가 기울어질 수도 있던 분수령이다. 하지만 태극낭자들은 더 강해졌다.

후반 시작에 앞서 한국 선수들은 필드 중앙에서 어깨를 걸고 뜻을 뭉쳤다. 멀리서 봐도 기운이 느껴졌다. 전의를 다지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 심판이 다가왔을 정도다. 선수들의 각오는 그만큼 뜨거웠다. 윤덕여 감독은 "1승1무12패라는 역대전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계기가 되고 싶다"는 출사표를 던졌고 전가을은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인데 정말 꼭 이기고 싶다. 팬들에게 여자축구도 재밌고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그 뜻이 필드를 적셨다. 후반전부터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대등한 경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후반 20분이 지나면서는 한국이 점유율을 높여 경기를 지배하는 장면도 나왔다. '철녀'의 인상이 강했던 북한 선수들이 힘에 부쳐 뛰지 못하던 모습은 꽤나 놀라왔다. 그들이 지칠 것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왜 한국 선수들이 힘들지 않았겠는가. 더 많이 뛴 것은 태극낭자들이다.

이후 시간들은 기적처럼 흘렀다. 마치 남자 축구에서 대한민국이 브라질이나 독일을 상대로 거세게 밀어붙이는 거짓말 같은 일이 펼쳐졌다. 꽤 많은 경기 장면이 북한 진영에서 나왔다. 한국이 그만큼 공격을 많이 했다는 뜻이다. 북한 선수들의 움직임에서도 긴장감이 엿보였다. 종료 2분을 남겨두고 시도했던 지소연의 회심의 중거리 슈팅이 크로스바를 강타하던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좋은 시나리오였는데 굳이 마지막에 반전이 삽입됐다. 종료 직전 역전골로 경기는 끝났다. 굳이 상황 묘사는 필요 없을듯하다.

거짓말처럼 잘 싸웠다. 마지막에 거짓말 같은 결과가 나왔을 뿐이다. 북한 여자축구 선수들은 그 혈투를 펼친 뒤에도 다 같이 모여 정리운동을 실시했다. 북한은 그런 팀이다. 전사처럼 훈련된 그들을 쩔쩔매게 했던 이들이 대한민국 여자축구 대표팀이라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전가을에게 물었다. 어떻게 북한이 지칠 수 있냐고. 참 잘했다는 말을 에둘러 전한 것인데, 이에 전가을은 "우리도 이제 정말 잘해요"라며 또 눈물을 쏟아냈다.

한국은 대단히 잘 싸웠다. 결과가 너무 아쉽지만 박수가 아깝지 않은 경기였다. 다행히 이 경기를 많은 축구 팬들이 지켜본 것으로 알고 있다. 7532명이 경기장을 찾았고 지상파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여자축구가 이렇게 성장했음을 팬들이 보았다는 게 참 다행이다.

많이 아프지만 소중한 생채기를 얻었다는 생각이다. 2014년 아시안게임을 통해 한국의 여자축구는 다시 태어났다. 북한의 김광민 감독은 경기 후 윤덕여 대한민국 감독에게 "정말 많이 발전했다"는 소감을 전했다고 한다. 이제 또 성장할 동력을 얻었다. 아플수록 성숙해진다는 말을 믿는다. 2014년 가을의 상처가 한국 여자축구를 위한 더 튼튼한 새살로 돋아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 임성일[뉴스1스포츠체육팀장/lastuncle@daum.net]사진= 스포츠공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