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 이씨 시조 묘지석 등 200년만에 공개

강신욱 2014. 8. 2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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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뉴시스】강신욱 기자 = 연안(延安) 이(李)씨의 시조 묘(墓) 지석(誌石)과 이를 찾은 과정을 기록한 일기가 200년 만에 공개됐다.

(사)괴산향토사연구회 이효영(전 괴산군의회의원) 회원은 '괴향문화' 22집에 '연안 이씨 시조묘 지석 발견 일기 고찰'이란 제목의 글에서 시조 묘 지석과 이를 발견하는 과정을 적은 일기를 소개했다.

충북 괴산군 감물면 백양리에 사는 월계공(月溪公) 이문우(李文愚)는 연안 이씨 시조 이무(李茂)의 묘소를 찾던 중 1821년 6월24일(음력) 황해도 연안부 서편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隱逸洞)에서 시조 묘소와 함께 찾은 지석을 봉안했고 이 과정을 기록한 일기를 함께 보존한 5세손 이동훈(괴산군 감물면 백양리)씨가 처음으로 공개했다.

일기를 보면 이문우는 여러 차례 수소문한 끝에 황해도 연안의 시조 묘소에 묻혀 있던 지석을 찾아 그곳이 시조의 묘소임을 확인했다.

지석에는 '延安伯李茂(연안백이무)'라는 다섯 글자가 세로로 음각돼 있다.

이문우는 일기에서 "(주변에서)연안이씨댁 선조 묘소가 틀림없다고 일러줘 확신을 하고 6월24일 인부들에게 혼유석과 상석 밑 부분을 팠을 때 묘토(墓土) 속에서 '延安伯(연안백)'이라는 세 글자가 보이는 돌이 드러나 계속해서 아랫부분을 파니 '李茂(이무)'란 글자가 보였다"고 당시 발굴 상황을 적었다.

이문우는 어렵사리 시조 묘소와 지석을 찾았지만 곤욕을 치렀다.

연안에 사는 8·9명의 이씨 무리가 찾아와서는 분묘를 발굴해 자신들에게 치욕을 줬고 지석을 보고는 진품표석(眞品表石)이라는 허황한 일을 꾸몄다고 행패를 부렸다.

황해도 감영에서는 주인 없는 고총(古塚)을 발굴했으니 법률에 따라 유배해야 하지만 특별히 조용하게 넘겨 준다며 급히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문우는 "어찌 이 같은 낙망지사(落望之事)가 어디 또 있단 말이오"라며 "시조 묘소를 찾기 위해 생업을 돌보지 않고 여러 달 동안 역경과 고행 속에 선묘를 찾았건만 도리어 허황한 일이라 해서 죄과를 운운하니 원통하고도 억울함을 어찌 기록으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라고 탄식했다.

이문우는 서울에 도착해 집안 어른에게 지석을 헌납하려 했으나 물리치는 바람에 괴산군 감물면 백양리 자신의 집으로 가져와 보관했다.

연안 이씨 시조 이무는 본래 당나라 출신으로 당 고종(650~683)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 나당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의 부장으로 신라에 들어와 백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진 뒤로 신라에 귀화했다.

감물면 백양리는 이효장(李孝長)이 낙향한 후 500여 년 동안 연안 이씨가 집성을 이뤘고 한때 200여 가구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100여 가구가 남아 있다.

ksw64@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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