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월드컵이 24년 만에 정상에 오른 독일의 통산 4번째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화제의 연속이었다. 경기 내외적으로 이렇게 흥미진진했던 대회가 있었나 싶을 만큼 놀라웠다. 32개국의 교차한 희비, 스타들의 눈부신 활약과 그에 반하는 돌발 행동 등 예측 불허의 사건들이 쏟아졌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스페인 제국이 무너졌고 루이스 수아레스(우루과이)는 '이번에도' 깨물었다. 대한민국의 축구는 실망스러웠고 알제리의 투지는 놀라웠다. 이렇게 이슈들이 쏟아진 브라질 월드컵, 이번 시간에는 다양한 이슈 가운데 의미를 둘 만한 이슈들을 선정해 대회를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브라질 울린 '미네이랑의 비극'
영원한 우승후보이자 개최국인 브라질의 1대7 참패, 이보다 더 놀라웠던 소식이 있을까. 아무리 공수의 핵인 네이마르와 티아구 시우바가 빠졌다고 해도, 상대가 물이 오른 독일이라고 해도 브라질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모습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전반 중반, 약 5분 사이 4골을 얻어맞으면서 '멘붕'에 빠졌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리고 이 충격은 3위 결정전까지 이어져 네덜란드에게도 0대3으로 완패했다. 2경기 10실점. 3위라도 차지해 위로받길 원했던 팬들의 기대조차 저버린 실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엔딩이었다.
대회가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브라질은 6번째 우승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에 역전패해 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마라카낭의 저주'를 씻어낼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그랬던 그들은 오히려 '미네이랑의 비극'이라는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악몽을 남기며 브라질 전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결국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루이스 필리페 스콜라리 감독도 버티지 못했다. 이 참사는 월드컵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경기이자 '축구=브라질'이라는 인식을 바꿀 만한 충격적인 결과였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사실 이런 결과가 나오면 항상 특정 선수 일부가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되며 뭇매를 맞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렸던 다비드 루이스, 무기력했던 프레드 등이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경기는 어느 선수의 잘잘못을 따지긴 어렵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지만 때로는 이렇게 분석을 벗어나는 의외의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 법이고 이것이 축구의 묘미이기도 하다. 한 축구팬으로서 브라질에겐 이 비극적인 결과가 부디 쓰디쓴 보약이 돼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한 베테랑의 파격 변신
가장 놀라웠던 팀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수에 대해선 모두 공감하지 않을까. 바로 네덜란드의 베테랑 공격수 디르크 카위트다. 그가 브라질에서 보여준 파격적인 변신은 상대는 물론, 동료까지 놀라게 만들었다. 지치지 않는 체력, 왕성한 활동량을 기반으로 위치를 가리지 않고 여러 포지션을 소화해온 그이지만 설마 측면 수비까지 이렇게 훌륭하게 소화해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것이 네덜란드의 변화무쌍한 전술 변화를 이끌고 탄력적인 선수 운용을 가능하게 했다.
카위트의 윙백 전환은 '준비된 변신'이었다. 루이 반 할 감독은 '윙백' 카위트를 처음으로 선보였던 칠레와의 조별리그 3차전(2대0 승)이 끝난 뒤 "1개월 넘게 카위트의 측면 수비 전환을 준비해왔다."며 상황에 따른 즉흥적인 기용이 아니라 준비된 전략이었음을 밝혔다. 한편, 미국 스포츠 전문매체 'ESPN'은 '포기를 잊은 디르크 카위트에 대한 찬사'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그의 성공적인 변신에 박수를 보내기도. 카위트의 변신은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축구팬들에겐 파격 그 자체였다.
카위트가 전천후 공격 자원으로 명성을 떨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보직 변경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따라다녔다. 공수에 부지런히 가담하는 적극성, 능숙한 연계 플레이 등 측면 수비 혹은 전투적인 미드필더로도 활약할 만한 재능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그리기만 했을 뿐, 실천에 옮긴 지도자는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반 할의 용단과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준비와 노력은 월드컵을 지켜본 모든 이들에게 좋은 롤 모델이 됐을 것이다.
강호들의 몰락이 준 교훈
브라질 월드컵은 충격적인 결말이 쏟아져 오히려 이변이 담담하게 와 닿았던 대회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메이저 대회 3연속 우승 중이던 '전설의 무적함대' 스페인이 단 2경기 만에 짐을 싸는 수모를 당했다. 이어서 유로 2012에서 각각 결승, 준결승전에 올랐던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와신상담을 노리던 잉글랜드 등 유럽을 대표하는 강호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이변이 워낙 많았던 터라 크로아티아와 러시아의 16강 진출 실패가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정도. 남미에서 치러진 대회답게 남미와 북중미 팀의 강세가 두드러졌고 상대적으로 유럽에서 건너온 팀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남미에서 치러진 대회라 운이 없었다고 할 수만은 없는 것이 강력한 팀워크를 발휘한 독일과 네덜란드는 각각 우승과 3위라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안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체면을 구긴 강호들을 잘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모두 준비가 부족했다. 상대를 신경 쓰지 않고 '우리 것만 잘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과 계획이 실패를 불렀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상대하는 팀들은 자신들의 것을 잘하는 동시에 상대에 대한 분석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칠레가 스페인을 압도하고 코스타리카가 우루과이-이탈리아를 연파한 것이 좋은 예. 결국 그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독일은 다시 정상에 서고자 10년을 준비했다. 그리고 끊임없는 변화와 지치지 않는 도전정신으로 틀을 깨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네덜란드는 어떠한가. 한 조에 속한 스페인과 칠레, 나아가 유력한 16강전 상대로 예상되던 브라질에 맞춤형 전략을 준비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반면 스페인은 메이저 대회 3연패에 심취해 변화를 두려워한 것이 발목을 잡아 전력 분석을 마친 상대 팀들에 찢겨졌다. 포르투갈도 유로 2012에서 변하지 않은 전략, 선수 구성으로 월드컵에 임했다가 수모를 당했다. 축구계를 이끄는 굴지의 강호도 준비가 없으면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필드플레이어들보다 빛난 수호신
스포트라이트는 항상 공격수들의 몫이었다. 브라질 월드컵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별리그까지만 해도 이변이 속출해 선수보다 팀이 더 주목을 받는 대회가 되리라는 섣부른 예상까지 쏟아졌다. 그러나 토너먼트로 접어들자 어김없이 별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 아르옌 로벤(네덜란드), 하메스 로드리게스(콜롬비아) 등 스타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희비가 교차했다. 대회 MVP에 해당하는 골든볼 실버볼, 브론즈볼 모두 공격수들이 독식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월드컵이 공격수들의 기량 경연장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브라질 월드컵은 골키퍼의 중요성과 가치가 재조명된 대회로 남을 것이다.
골키퍼들이 이렇게 주목을 받은 대회가 있었나 싶다. 돋보인 선수들의 이름만 나열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작은 거인' 기예르모 오초아(멕시코)와 케일러 나바스(코스타리카)는 연일 신들린 선방을 펼쳤고 '캡틴 아메리카' 팀 하워드(미국)는 벨기에와의 16강전에서 슈퍼세이브만 16차례를 기록,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미국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격려 전화를 받았다. 팀 크룰(네덜란드)은 주전이 아니었음에도 코스타리카와의 승부차기만으로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고 마누엘 노이어(독일)는 정확한 패스로 경기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넓은 수비 범위로 최후방 수비수까지 병행하며 '완성형 골키퍼'의 표본을 보여줬다.
결과적으로 브라질 월드컵은 간과하기 쉬운 골키퍼들의 역할과 비중을 재확인하는 대회가 됐다. 현대축구에서 압박과 탈압박이 핵심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골키퍼들에게 점점 많은 역할이 요구되고 있는데 이것이 이번 월드컵을 통해 잘 드러났다. 네덜란드가 이름값 있는 두 수문장 크룰과 미셸 포름 대신 야스퍼 실리센을 주전으로 낙점한 것도, 디펜딩 챔피언 스페인과 유럽의 강호 포르투갈-러시아가 맥없이 무너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때론 필드플레이어처럼 팀의 일부로, 때론 차별화한 독자 노선 구축으로 현대축구의 전술과 전략에서 존재감을 넓혀가는 골키퍼, 앞으로 이들이 빛날 기회는 더 많아질 것이다.
코스타리카가 보여준 '팀'의 의미
스타들의 열연도 '원팀(One Team)'이라는 타이틀 아래 조화를 이룬 독일을 넘어서진 못했다. 독일의 우승은 축구가 팀 스포츠이며 선수보다 팀이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팀의 의미를 보여준 것은 코스타리카라고 생각한다. 축구계에서 변방 국가에 불과한 그들은 깜짝 놀랄 만한 수준 높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돌풍을 일으켰고 브라질 월드컵의 판도를 뒤바꿨다. 조별리그에서 우루과이-이탈리아-잉글랜드를 제치고 선두로 16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며 토너먼트에서도 그리스, 네덜란드와 연달아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독일의 조직력은 선수 개개인의 뛰어난 기량이 뒷받침됐다. 그러나 코스타리카는 다르다. 이름값, 개인 기량 등 어느 하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순전히 조직력만으로 이를 극복한 것이다. 2011년부터 팀을 이끈 조르제 루이스 핀투 감독의 장기 전략과 선수들의 전술 이해도 & 수행 능력이 더해진 결과였던 셈. 단순하게 '수비가 견고하다', '압박이 뛰어나다'는 수준을 벗어나 계획적이고 전략적이며 때론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조직 체계가 잘 잡혀있는 팀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월드컵을 무패(2승 3무)로 마감할 수 있었다. 반복된 훈련이 만든 값진 성과.
무엇보다 코스타리카만의 색을 보여줬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수비적인 색채가 강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적극성만은 칭찬을 받았다. 스페인, 독일 등 선진 축구에서 보고 배울 점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그것에만 개척자들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론 코스타리카처럼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자신만의 색을 구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코스타리카의 선전은 귀감이 되기 충분했으며 '팀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