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1950년 6월27일 이승만 '서울 사수' 방송

박래용 정치에디터 2014. 6. 26.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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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이틀 뒤인 1950년 6월27일자 경향신문은 '아군 용전(勇戰)에 괴뢰군 전선서 패주 중' 기사를 1면 머리에 실었다. 기사는 국방부 보도과(報道課) 발표문을 토대로 '아군은 육·해·공 삼군의 긴급한 협동작전을 전개하여 각 전선 도처에서 맹격을 가하여 공세를 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구체적으로는 해주시에 돌입하였으며, 동해안에서는 적함을 격침하고, 38선 전면에서는 국군이 반격태세를 취하고 적을 압박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내용은 '뻥'이었다. 실제 전황은 달랐다. 북한군은 6월27일 서울에 진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날 새벽 2시에 경무대를 빠져나와 대전으로 달아났다.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달아난 이승만은 대전에서 '서울 사수' 녹음 방송을 내보내며 국민을 기만했다. 많은 시민들은 대통령이 서울에 함께 머무르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배가 기울고 물이 차오르는데도 "가만히 있으라"고 한 세월호 선원들의 원조 격이다. 팬티 바람으로 도망친 선장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다음날인 6월28일 군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가만 있으라"는 말을 믿고 남아 있던 150만 서울 시민은 퇴로를 차단당했다. 이들은 북한군 치하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3개월 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이 수복되자 달아났던 '도강(渡江)파'들이 돌아와 적 치하에 남았던 '잔류파' 중 많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처형했다. 시민들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정부로부터 다시 처벌받았다. 모든 전쟁의 특징은 군인보다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가 더 많다는 것이다.

64년이 지난 오늘, 정부에 대한 신뢰가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과거 적폐를 해소하겠다고 약속했다. 눈물까지 흘렸다. 이 역시 '뻥'이었다. 대통령은 눈물이 마르자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표변했다. 생각이 다른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폐쇄적인 모습은 여전하다. 급기야 경질한 총리를 다시 불러 앉혔다. 헌정 사상 초유요, 세계 정치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황당 해프닝이다. '대통령이 수첩을 분실했느냐'는 말까지 나온다.

서울 함락 후 수복까지 석 달이 걸렸다. 국정시계가 멈춰선 지 두 달째다. 민심 수복까지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른다. 무신불립(無信不立).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정권을 유지하기 어렵다. 한국전쟁 때와 지금의 국민은 많이 달라졌다.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해서 가만히 있을 국민들이 아니다.

< 박래용 정치에디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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