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② 같은 뿌리, 그러나 다른 삶

2014. 6. 1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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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니콜라이·빅토르 vs 까샤·두샤·안나 "한국도 어려울때 파독광부 덕 보지 않았나. 고려인 한국行도 마찬가지" "주관적 민족 정체성 시각서 벗어나 독립적 한인으로 존중하는 자세 필요"

게오르기·니콜라이·빅토르 vs 까샤·두샤·안나

"한국도 어려울때 파독광부 덕 보지 않았나. 고려인 한국行도 마찬가지"

"주관적 민족 정체성 시각서 벗어나 독립적 한인으로 존중하는 자세 필요"

(블라디보스토크·타슈켄트·알마티=연합뉴스) 김현재 논설위원 =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들은 같은 뿌리지만 삶의 모습은 다양했다.

그들은 모두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자신들의 조상이 연해주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 부모 또는 조부모 세대가 1937년 혹독한 강제이주를 경험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지금의 처한 상황과 생활기반, 특히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생활 양태나 사고 방식이 전혀 달랐다.

모든 고려인들이 모국을 그리워 하거나 과거 고려인 선조들의 개척자적 정신을 이어받아 강인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모두 러시아에 동화돼 민족적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다양한 문화와 의식을 갖고 있는 외국인이라는 것이며, 잘사는 대한민국과 유대를 맺고 싶어하는 우리의 핏줄이라는 점이었다.

알마티에 본부를 두고 있는 고려일보의 남경자 주필은 "우리 고려인은 각자 국적을 갖고 있고, 그 나라에서 열심히 땀흘리며 살아온 사람들"이라며 "고려인의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한국 사람과는 다른 독립적인 한인으로서 존중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 다른 삶을 살아온 고려인을 한국적인 민족 정체성의 시각에서 이해하려 하지 말고 독특한 그들의 경험을 수용하는 개방적인 민족정체성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김 게오르기(62) =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러시아 극동 국립수산대 총장이다. 벌써 11년째 연방 대학의 총장직을 수행하는 고려인으로서는 드문 성공 케이스다.

그는 조상이 함경도 출신이라고 했지만 구체적 지명은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때 고향의 터가 세서 아이가 태어나면 자꾸 죽자 연해주 포시에트지역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그후 할아버지는 아들을 6명이나 뒀고 밀과 쌀 농사를 지어 제법 부를 일궜다고 한다. 집안에 사과나무가 20그루, 자두나무가 36그루가 있었으며 크고 아름다운 집을 갖고 있었다고 아버지에게서 들은 포시에트 집 얘기를 세세히 기억해 기자에게 들려줬다.

그러나 1920년대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주였던 할아버지는 잡혀갔다가 몇개월 뒤 풀려났다고 한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아르종으로 이주했고, 10여년만에 또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강제이주 전날 소련 정부는 기차를 타라고 통보하면서 할아버지에게 연해주에 있는 가축과 집을 놓고 가면 이주후에 그 값을 매겨 그대로 보상해 주겠다고 문서로 약속했지만 할아버지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 밤 가축들을 소금에 절여서 식량을 마련했고, 그 덕분에 가족들이 굶지 않고 몇달을 열차에서 버틸수 있었다고 전해줬다.

그가 할아버지의 땅 연해주로 재이주한 것은 1974년. 공산당원으로 군 관련 일을 하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이후 그는 40년 동안 북한과 가까운 연해주에서 살았지만 북한을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고 했다. 북한 사람들은 고려인들을 `변절자'로 불렀고, 북한을 가면 고려인들을 총살시킨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80년대 초반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걷다가 버스에 타고 있던 북한군인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들이 고려인인 자신을 알아보고 주먹질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때 이후 북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생겼고, 총장이 된후 북한 유학생들에게 그리 너그럽지 않게 되더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우리 학교에 북한 유학생이 5명 있는데 그들과는 만나지도 않는다"며 뿌리깊은 반북성향을 보였다.

그렇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자신과 오래전 사업관계(그는 교수가 되기 전에 수산업 분야 사업을 하면서 한국을 오갔다고 한다)로 잘 아는 부산의 친구들이 아이들을 자신의 학교로 유학보냈는데 그들은 친자식처럼 챙긴다고 말했다.

그는 부산에 부인 명의로 아파트도 갖고 있다고 했다. "집 사람은 러시아 사람인데도 한국말을 잘 한다"며 멋쩍게 웃어보이는 그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김 니콜라이(60) = 그의 명함에는 우스리스크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회장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는 고려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연해주 교통의 요지 우스리스크에서 소문난 부자다. 그는 기자에게 "중국과의 무역업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가 우스리스크에서 가장 큰 차이나 마켓을 소유하고 있고, 큰 건물과 농장도 여러개 갖고 있다고 귀띔했다.

수년 전 사망한 그의 형이 이 지역의 마피아 거물이어서 그가 지금의 부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스리스크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연해주 고려인의 상징처럼 돼 있는 문화센터는 현재 그의 명의로 돼 있다. 그가 땅을 제공했고,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들이 후원해 건물을 지었지만 러시아법에 법인 명의로의 재산 소유권 등기가 쉽지 않아 그의 명의로 등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인 단체들 가운데 일부는 그가 수십억원에 달하는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원을 받아 지은 이 건물을 통째로 삼켰다고 비난한다. 이 건물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고려인들을 위해 쓰이지 않고 그의 개인적 사교의 장이 됐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건물에서 식당과 카페, 예식장 등을 운영해 개인적인 돈벌이를 하고 있다고도 주장한다.

그는 "가당치 않다. 큰 건물을 운영하려면 최소한의 운영비를 마련해야 하는데 지금의 수익사업으로도 충당이 안 된다. 오히려 내가 돈을 메우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해주에서 잘 나가는 고려인들과 친하다. 그는 "9월 선거에서 고려인 출신 후보가 나오면 고려인들은 압도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항상 그래왔다"고 말했다. 또 "검찰이나 경찰에 있는 고려인 공무원들에게도 항상 도움을 주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박 빅토르(56) =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문화협회 회장이다. 연해주에 살 때 증조부 박익춘옹이 한의사를 했다며 도포를 입은 선조의 옛날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강제이주 때의 고통스런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소비에트 시대에는 그런 것들을 밖으로 얘기해선 안 된다는 묵계 같은 것이 있어 친구들과 만날 때는 전혀 그런 얘기를 하지 못했다고도 했다.

우즈베크 고려인 협회의 중점 사업은 `한글 교육'이라고 말하는 그는 한국어를 약간 알아듣기는 하지만 말로 옮기지는 못한다. "몇년 전에 청와대에서 160여개국 해외동포단체 회장들이 모였는데 우즈베크, 카자흐스탄 등 CIS(독립국가연합.러시아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모임) 국가의 회장들만 한국말을 하지 못했다"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소비에트 시대에는 러시아어로 쓰고 말하고 생각하도록 철저하게 교육받았다"며 "70여년이 지나서 다시 한국어를 쓰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래도 어렸을 때 집에서 썼던 고려말을 기억하고 있어서 남들이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알아듣는 편"이라고 말했다.

"고려인들이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살아온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한국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살아도 우리는 전통을 지키고 살았다. 한국말을 몰라도 밥, 김치, 된장을 모르는 고려인은 없다"는 것이다.

최근 우즈베크 젊은 고려인들의 서울행 붐에 대해서는 "한국도 못살았을 때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에 가서 광부도 하고 그러지 않았느냐"며 "우리 고려인들이 잘사는 대한민국, 그것도 같은 민족의 땅에 가서 힘든 일들(3D 업종)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뭐가 나쁘냐. 그렇게 벌어온 돈으로 우즈베크 고려인들은 이곳에서 꽤 잘사는 민족이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즈베크 고려인 협회의 당면 현안이 대규모 문화회관 건립이라면서 우즈베크 정부로부터 1 ㏊의 땅을 무료로 받았는데 건설 자금 200만 달러 정도를 조달하는 것이 큰 걱정이라며 은근히 한국 정부의 지원을 기대했다. 연해주 우수리스크 문화회관 건립에 한국 정부의 지원과 민간의 기부금이 큰 몫을 했던 것도 거론하면서 커다란 설계도면까지 보여줬다. 그는 타슈켄트에서도 꽤 이름난 건설업체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최 두샤(70), 까샤(65) = 10여년전 우즈베키스탄에서 연해주로 이주해와 지금 우수리스크 고향마을에서 살고 있는 재정착민 자매다.

막내이자 `귀남이'인 니키타(63)는 부모님이 딸 넷을 연이어 낳은 뒤 얻은 귀한 아들이었지만, 그 아들을 얻은 해에 아버지는 우즈베크 콜호스(집단농장)에서 사고로 말발굽에 가슴을 밟혀 숨을 거뒀다.

혼자서 다섯 남매를 키운 어머지는 운명하기 직전 우즈베크 타슈켄트에서 함께 살던 두샤와 까샤 자매에게 "꼭 니키타를 지켜줘야 한다. 그 옆에서 살아라. 원동(연해주)이 우리 땅이다. 언젠가는 꼭 그곳으로 가거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둘째, 셋째 자매는 시집을 간 뒤 30여년전에 각각 모스크바와 우크라이나로 이주해 간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 막내 니키타가 제일 먼저 연해주로 와 라즈돌리노예의 군막사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몇해 뒤늦게 온 까샤는 음식점 등지에서 일하며 한달에 1천200루블(5만원가량)을 벌었다고 한다. "개고생했지. 벌레처럼 살았어"라고 그녀는 당시를 회생했다.

지금은 동평(동북아평화연대)이 건설한 고려인 정착촌 `고향마을'에서 조그만 텃밭을 가꾸며 전보다는 낫게 살고 있다. 마을 회관 돌보는 일 등 궂은일도 항상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열혈 고려인 할머니다.

수년 전에 한국에서 고려인들을 위한 구호품이 왔을 때 러시아 관리들이 이를 착복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리려고 까샤는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총영사관을 찾아갔지만 옷차림이 `거지꼴'인 자신을 경비원이 들여보내주지 않더란다. 하룻밤을 꼬박 총영사관 앞에서 세우고 아침에 출근하는 총영사의 차를 세웠다. "재정착민 한 사람당 신발과 옷가지, 이불을 몇채씩 지원했다던데 우리는 고작 헌옷 한벌 밖에 받지 못했다"고 하소연하자 당시 총영사가 상황을 파악해 구호품을 되찾아 주었다는 얘기를 신나게 떠드는 까샤. "누가 착복을 한거냐"고 묻자, "여기 관리들이 다 그렇지 뭐. 내가 우리 조상들 땅에 와서 사는데 제깐 놈들이…"라며 털털하게 웃어 보였다.

까샤와 두샤, 그리고 니키타 형제는 동평이 연해주에서 개발 생산하는 차가버섯 청국장 사업인 `바리의 꿈'에 고려인 70여명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 바리떼기 공주 신화에서 이름을 차용한 이 바리의 꿈은 150년전 제조기법을 따라 약을 넣지 않고 효소로만 장을 담그는 그야말로 친환경 장이지만 한국시장에서 홍보 부족 등으로 그리 만족할만한 수익을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그 사업이 잘돼야 여기 사람들이 그나마 먹고 살텐데"라며 까샤는 서울 가서 홍보좀 잘 해달라고 당부했다.

성격이 내성적인 큰 언니 두샤는 14살 된 손자 막심과 7살 난 손녀 알리나와 셋이서 산다. 두 아이의 엄마 스베타는 서울에서 일을 하며 한달에 100만원 가량을 송금해 주고 있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두샤에게 물어보자 "몰라"라고 했다. 서울에 간 고려인들의 직업은 대개 식당이나 여관 등지에서 종업원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동네 주민이 귀띔했다.

고향마을이 생기기 전에는 송금한 돈에서 1만5천루블(50만원 가량)을 월세로 내고 살아 빠듯했지만, 지금은 집이 생겨서 그 돈을 절약하니 살만하다고 했다. 딸이 보고 싶지 않느냐고 하자 "어디 좋은 사람 생겨서 서울에서 시집이나 갔으면 좋겠어"라고 한다. 아이들은 자기가 돌보면 되니 연해주는 잊고 서울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읽혀졌다.

강한 함경도 사투리 억양의 이들 남매는 "우즈베크에서 살때는 고려말을 잘 못했는데 지금은 방송을 보면서 옛날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고 했다. 어둡고 눅눅한 집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이들이지만 인정은 살가웠다. 오후 늦은 시간의 방문인데도 차를 내오고 빵도 썰어 내놨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데 "밥은 먹고 가야지"라며 계속 붙잡는다.

◇강 안나(90) =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서 운영하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인근 시온고 마을의 `아리랑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요양원은 1937년 강제이주 이전에 태어난 이주 1세대 노인들을 위해 한국 정부가 우즈베크 정부의 협조를 받아 운영하는 시설이다. 40명의 1세대 노인들이 이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한다.

강 할머니는 강제이주 당시 가족 8명이 원동(고려인들은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아시아 지역을 이렇게 부른다)에서 이주해 왔지만 지금은 오빠 한 명만 생존해 있다고 했다.

24살에 결혼해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세살때 홍역으로 사망했고, 남편도 40세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강 할머니는 콜호스에서 혼자 생활하다 이곳 요양원으로 들어왔다.

강제이주 당시 얘기를 해 달라고 하자 "컴컴한 짐승 실어나르는 열차 객실을 두층으로 나눠서 사람들을 쑤셔 넣었지. 가끔 정거장에 서면 물도 길어오고, 먹을 것도 사고, 그러다가 울란우데 쯤인가 가서 너무 추우니까 난로를 한 차에 하나씩 넣어 줬어. 거기다 밥도 해먹고… 고생 많았지. 그렇지만 우리 열차에서는 죽은 사람은 없었어"라고 했다.

이주 직후의 상황에 대해선 "싹 깔밭(갈대밭) 이었지. 고려사람들은 벼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물을 흐르게 해서 논을 만들었지. 돌피를 훑어서 쪄 먹기도 하고 풀도 뜯어 먹고, 얼마 안있어 옥수수 심은 게 나니까 그거 삶아먹고 하면서 굶지는 않았어. 그러다가 전쟁(2차세계대전)이 나고 하니까 나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모두 콜호스에서 일만 해댔지. 바쁘게(어렵게) 살았어. 전쟁 끝나고 나니까 세상이 좋아지더만"하고 회고했다.

강 할머니는 "여기 사람들은 모두 소련 시대를 그리워 하며 살고 있지"라고 했다. 안나 할머니는 고려말이 능통했다. 자신이 이주한 과정을 한글로 적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강 할머니와는 달리 그곳의 대부분 사람들은 모국어를 잊고 있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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