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이 만난 사람] 성공한 벤처의 대명사 김정주 NXC 대표
지난달 중순 미국 샌프란시스코 중심가 한 호텔. 햇빛이 좋은 날이었다. 길 건너 투명한 창문 너머로 짧은 머리의 동양인 남자가 보였다. 성공한 벤처창업가를 거론할 때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김정주 NXC 대표다. NXC는 국내 1위 게임회사 넥슨의 지주회사 격이다.
김 대표는 자그마한 부티크호텔 좁은 로비에 놓인 한 소파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이전까지 일면식도 없었기 때문에 인사는 어색하기만 했다. 처음부터 인터뷰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 역시 언론 인터뷰라면 사양한다고 몇 번에 걸쳐 강조했다. 백화점 위 한 식당에서 점심을 들며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눴다. 그는 가슴속에 불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질문에 즉답을 피하며 선문답을 늘어놓던 그가 자리를 파할 즈음에는 어느새 달변가로 변해있었다.
-평소 대학생들에게 창업에 뛰어들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KAIST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그런 얘기를 몇 번 했다. 사업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다. 단 몇 명이라도 고용을 일으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좀 더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얘기다.
KAIST 학생은 대학도 장학금을 받고 다니고 받은 혜택이 많기 때문에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안락하게 살 생각을 하지 말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살라는 얘기다. 꼭 모든 사람이 창업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김정주의 성공 방정식을 듣고 싶어한다.
▶성공이라는 게 뭔가. 성공은 주관적이다. 말하기 힘든 주제다. 난 체질상 인생을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사업이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매 순간 열심히 살았고, 때마침 운이 터져 나름대로 성과를 냈다. 하지만 나 역시 지금 이 순간, 성공하기도 하고 또 실패하기도 한다. 투자를 결정해 손실이 난 경우도 많다. 지금도 '그때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남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내가 꼭 성공한 사람일까.
-엄청난 재산을 벌었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듣는 것 같다.
▶돈이 많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신용카드를 아무리 많이 긁어도 평소 생활로 한 달에 200만원 이상 쓰기 힘들다고 한다. 남자인 내가 옷을 많이 사는 것도 아니다. 매일 비싼 술을 마시면 수천만 원도 나오겠지만 그런 스타일은 아니다. 좀 벌었다고 돈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으로 비칠까 두렵다.
돈은 살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한 달을 살아내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번다. 어떻게 들릴지 조심스럽지만 어느 선을 넘으면 돈이 주는 가치는 거기서 거기다.
그 선이 일반인이 상상할 만큼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괜찮은 연봉을 받는 평범한 직장인과 내 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직장인이 되기도 쉬운 건 아니지만.
요새 미국 동부에 사는데 내 집은 학생들이 주로 사는, 정말 작은 원룸이다. 여러 나라에서 온 5명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거기엔 내 책상도 없다.
-돈을 더 벌고 싶은 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사업을 키웠나.
▶난 그냥 일하는 게 좋은 사람이다. 일하다보니 운이 맞아 이렇게 된 것이다. 맥줏집을 예로 들어보자. 맥줏집 하다 잘되면 분점을 하나 더 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다보면 가게가 4개 되고, 5개 되고 하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물론 맥줏집과 NXC는 사업 규모가 다르지만 본질은 결국 같다. 그러면서 직원들 더 뽑고, 월급 더 주고 그러는 게 보람이다.
난 지금도 뭐가 더 되고 싶다거나 사업을 얼마큼 더 키우겠다, 이런 생각 자체가 없다. 그냥 내게 주어진 일,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 매일 바쁘게 움직일 뿐이다.
-출근하다 얼굴을 못 알아본 경비원이 제지했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한국에서만 내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회사가 수십 개는 된다. 어쩌다 가끔 가는데 어떻게 나를 알아보겠나. 경비가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렸다가 전화해서 잠시 나오라고 하고. 누가 나와 있으면 더 좋고. 한 곳에 정기적으로 출근을 안 한 지가 10년이 넘는다.
특정 장소로 출근을 안 하는 것은 내가 꼭 그곳에 머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노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장담하지만 어떤 직장인보다 내 업무시간이 더 길 것이다. (주말인) 오늘도 미팅 일정이 빼곡히 잡혀 있다. 일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놀면 뭐하나. 늙으면 진짜 할 게 없을 것 같다. 난 일하는 게 너무 즐겁고 좋다.
-얼마 전 스토케를 인수해서 화제가 됐다.
▶유럽에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별도 법인이 있다. 거기서 검토해보니 괜찮다고 알려와 투자를 결정했다. 내 돈으로 인수한 건 아니다. 차입매수(LBOㆍ피인수 기업 자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경영권을 획득하는 금융 기법) 방식이었다.
유럽과 일본 굴지 은행이 공동으로 책임을 떠맡았다. 스토케 미래를 밝게 봐서다. 요새 은행에 돈 넣어놓으면 누가 이자 주나. 남는 돈으로 한국에서 카페 같은 사업 하면 안전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인수 자금이 6000억원가량 됐는데 사실 이 정도 규모 딜은 내가 아는 것만 1년에 30여 건은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마이너다. 좋은 매물이 나오면 아랍계 왕자를 비롯해 메이저들이 싹 쓸어가는 구조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좀 더 인수ㆍ합병(M&A) 시장에 적극적으로 나서면 좋겠다.
-게임회사가 왜 유모차 업체를 인수하느냐는 시선도 있다.
▶투자 대상이 꼭 게임일 필요는 없다. 앞으로도 좋은 매물이 나오면 업종을 가리지 않고 검토할 것이다. 스토케 유모차는 엄마와 아기가 언제라도 시선을 마주치며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정교하게 디자인 된 게 특징이다.
스토케 본사가 있는 노르웨이 올레순에 가보니 배 나온 아주머니들이 손수 수작업을 하고 있더라. 비용 절감이 우선되는 미국계 기업과는 사뭇 달랐다. 회사가 추구하는 철학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게임왕 김정주, 강남 유모차 스토케 인수' 이런 식으로 받아들인다. 언론에도 비슷하게 자극적인 제목이 달린다. 스토케 가치와 잠재력이나 딜이 일어난 과정에 주목한 매체는 없더라. 결국 이상한 놈이 이상한 짓을 한 것처럼 인식되곤 한다. 이런 점이 솔직히 좀 섭섭할 때도 있다.
-샌프란시스코 창업 문화는 요즘 어떤가.
▶샌프란시스코에 다니기 시작한 게 벌써 20년쯤 된다. 요새 가장 뜨는 지역은 '리틀 이탈리아'다. 예전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이런 별명이 붙은 곳인데 새로 생겨나는 스타트업이 전부 이곳으로 모이고 있다. 팰러앨토가 전통적으로 유명했지만 신생 기업은 이쪽으로 잘 안 가더라. 아마도 유행이 바뀌는 중인 것 같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그건 비밀이다(웃음).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들은 미국에서 같은 사무실을 쓰는 5명의 다국적 동료다. 미국인도 있고 남아공 사람도 있고 한국인인 나도 있다. 나는 여기서 일개 팀원이다(실제 그가 아이폰으로 보여준 웹사이트 주소에는 그의 이름과 사진이 제일 마지막에 놓여 있었다).
기업들 돌아다니며 미팅하는 게 요새 주요 업무다. 그러다보니 1년에 절반 넘게 해외에 머문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면 힘들다. 그래도 계속 다닐 것이다. 나는 발로 뛰어다니며 기회를 찾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렇게 살 것 같다.
-제2의 김정주를 꿈꾸는 사람에게 한마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걸 해라. 직장을 다니면서도 뿌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또 좌절도 할 것이다. 창업자 길을 걸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똑같이 좋았다가 나빴다 한다. 결국 정답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개인재산 1조…'스토케'인수로 조명
김정주 NXC 대표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와 KAIST를 마치고 1994년 12월 서울 역삼동에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 넥슨을 세웠다. 당시 나이 26세. 김 대표는 세계 최초로 그래픽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를 발표하며 게임계 지존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때 세운 넥슨은 올해로 창립 20년을 맞는다. 넥슨은 이제 한 해 1조원 넘는 매출을 올리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세간이 평가하는 김 대표 자산 가치는 최소 1조원을 웃돈다.
NXC는 얼마 전 노르웨이 자랑거리인 '스토케'를 인수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튼튼하고 쓸모가 많기로 유명한 명품 유모차를 만드는 곳이다. '마이 비즈니스'를 꿈꾸는 수많은 예비창업자들은 김정주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김 대표 스스로도 "대기업의 안락함에 안주할 생각을 하지 말고 창업에 뛰어들라"는 메시지를 여러 차례 전파했다.
사업가로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그 때문인지 이런저런 오해에 시달리기도 했다. 말을 할 때마다 메시지가 왜곡돼 전달될 때가 많아 상처도 받았다. 세상이 그를 성공한 부자로만 보는 시선에도 작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인터뷰 때도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지만"이란 수사를 반복해 쓰기도 했다. 이런 점들이 그가 공개석상에 자주 모습을 비추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김 대표는 1년 중 절반 이상을 외국에서 보낸다. 시간을 쪼개 공항에서 미팅을 해야 할 정도로 시간에 쫓긴다. 인터뷰 전날도 유럽 당일치기 출장을 갔다가 바로 미국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 김정주 대표는… △1968년 2월 출생 △광성고 졸업 △1991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졸업 △1993년 KAIST 석사 △1994년 넥슨 창업 △1996년 KAIST 박사 수료 △1997년 넥슨 미국법인 설립 △1999년 넥슨 일본법인 설립 △2006년 넥슨홀딩스 대표 △2009년 이후 NXC 대표 [샌프란시스코 = 홍장원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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