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약속' 김태윤 감독, "외압? 지금은 판단 유보 중" (인터뷰)
김태윤 감독.
모두가 걱정했다. 영화를 완성할 수 있을지. 또 한 번 걱정했다. 제대로 개봉이나 할 수 있을지를. 이처럼 많은 걱정을 품고 있는 영화는 바로 '또 하나의 약속'이다. 삼성 반도체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 씨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거대기업인 삼성의 심기를 건드리는 민감한 소재 탓에 이래저래 걱정의 눈초리다. 진정성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달려온 김태윤 감독 역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외압이 있었느냐'는 것"이라고 할 정도다. 실제 외압 여부를 떠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우리도 모르게 가득한 것 같다. 하지만 개봉을 앞두고 상영관 수 때문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동시기 개봉작 중 예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었음에도 현저히 적은 수의 상영관만이 '또 하나의 약속'에게 상영공간을 내주고 있다. 그러면서 '외압 의혹'도 수면 위로 부상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답답해하는 김태윤 감독을 만나 그 심경을 직접 들었다.
Q. 상영관 수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영화에 대해 묻기 전에 이거 먼저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최초 영화를 기획하고 촬영할 당시에는 어느 정도 개봉 규모를 예상했던 건가.
김태윤 감독 :
고민을 많이 하긴 했다. 물론 대중영화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최소한 관객들이 쉽고, 편안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 외적인 걸 떠나 상업적 측면에서 가족드라마 형태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다.
Q. 지금 예상보다 상영관 수가 적은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진짜 외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김태윤 감독 :
지금까지 인터뷰하면서 많이 받은 질문이 '외압이 있었느냐'는 거다.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이건 극영화다. 극영화 만드는데 무슨 외압이 있겠느냐는 맥락으로 인터뷰했다. 그런데 지금은 좀 아닌 것 같다. (웃음). 이해가 잘 안 되는 거다. 관객 한 명 유치하려고 애를 써야 할 극장이 자신들의 수익을 줄이면서까지 배정하지 않는 게. 지금은 판단 유보 중이다. 저예산이고, 주연배우도 약하고, 민감한 소재니까 상영관을 배정하지 않았다고 양보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관객 점유율이 높은데도 말도 안 되는 배정을 한다면 뭔가 확실한 거 아니겠나 싶은 거다.
Q. 이슈와 흥행 그리고 상영관 수는 별개인 경우도 꽤 많다. 예매율도 허수가 있기 마련이다.김태윤 감독 :
그래서 판단을 다음 주로 유보한다는 거다. 상영관 수가 몇 개고, 관객이 얼마나 들었는지 나오지 않나. 가령 상영관 수가 더 많은 '프랑켄슈타인'과 '또 하나의 약속'이 비슷한 숫자의 관객이 들었다고 하면 실질적인 근거가 되는 거다. 실질적인 개봉은 다음 주라고 생각하고 있다.
Q. 그런데 이런저런 이슈가 생기면서 영화의 본질이 다소 묻히는 느낌도 있다.김태윤 감독 :
그건 개봉하고 나서 관객들이 평가해주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웃음).
Q.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 이야기에 언제부터, 왜 관심을 두게 됐나.김태윤 감독 :
2011년 6월 23일, 황상기 아버님이 근로복지 공단을 상대로 승소한 날인데 그날 기사를 읽었다. 불가능한 일이 벌였다는 생각에 그 관련 기사를 다 찾아봤는데 감동적이었다. 팩트를 기반으로 극화한 것들이지만, 그 면면이 너무 극적이었다. 자료조사를 하고, 인터뷰하면서 영화로서 매력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Q. 황상기 아버님을 비롯해 실제 피해 가족들을 만났을 때, 그분들은 뭐라고 하던가.
김태윤 감독 :
다들 '이런 걸 영화로 만들 수 있어요. 안될 것 같은데'라고 했다. 그 분들은 굉장히 평범하신 분들이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영화화된다는 게 그 분들 입장에선 이상한 일인 거다. 그래서 반신반의 하셨던 것 같다.
Q. 실제 자료 조사나 취재는 어떻게 했고, 얼마나 준비했나.김태윤 감독 :
반도체라는 걸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용어들이 너무 어렵다. 마지막 판결문이 A4로 80장인데 어려운 용어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 기승전결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맞추는 과정이 힘들었다.
Q. 이 영화를 기획한 뒤 여러 투자 제작 관계자를 만났을 것 같다.김태윤 감독 :
(투자하겠다고 나선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당연하다. 나라도 투자 안 했을 것 같다. (웃음) 소재도 민감하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배우도 약한데 누가 하겠나. 객관적으로 인정한다. 속으로는 '영화 나오면 보자'라고 생각했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Q. 투자나 제작 관계자들이 했던 말은 무엇인가.김태윤 감독 :
투자받기 어렵다. 투자받아도 개봉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또 들었던 이야기가 모티브만 가져와서 장르영화로 바꾸라는 거였다.
Q. 장르영화로 바꾸라는 말에는 약간 마음이 움직였을 것 같다. 그동안 장르영화를 해오지 않았나.김태윤 감독 :
'용의자X'(각본), '인사동 스캔들'(원안) 등 장르영화 시나리오를 해오긴 했다. 그런데 장르영화를 할 거였으면 이런 소재를 택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힘이 있는 거다. 장르영화로 하면 본질 자체가 달라진다고 생각했고, 그 경우에는 아이템만 가져와서 써먹는 거밖에 안 된다.
Q. 투자 과정에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꼭 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으니까 이렇게 영화가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김태윤 감독 :
황상기 아버님을 인터뷰하면서 만나다 보니 느껴지는 게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왜 합의를 안 하는지 이해가 안 됐고, 궁금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힘든 일을 겪으셨고, 어려운 싸움을 하는데도 항상 웃으신다. 그걸 보고, 합의했으면 저렇게 밝게 웃으면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겠느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해 반성하게 됐다. 영화판에 들어온 지 10년 넘었는데 그동안 나는 왜 영화를 만들었는지, 왜 찍으려고 하는지, 무슨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지 반성을 많이 했다. 내가 대중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고, 그런 진심이 담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Q. 캐스팅 과정도 궁금하다. 가령 '변호인'의 경우 송강호란 배우가 합류하면서 판이 커지게 됐다. '또 하나의 약속' 역시 그럴만한 누군가를 공들여서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김태윤 감독 :
몇 분 드렸는데 차가운 반응이 왔다. (웃음)그리고 매니지먼트사는 영화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뭔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 걱정들을 많이 해서 '안 되겠구나' 싶었다.
Q. 그럼 현재 참여한 배우들의 경우에는 어땠나.김태윤 감독 :
선뜻 동의했다. 박철민 배우는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따님한테 읽혀 봤다고 하더라. 그런데 따님이 아빠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합류하게 됐다. 나머지 배우들도 '극영화고, 시나리오 좋은데 왜 못해'라는 반응이었다.
Q. 이처럼 선뜻 참여하는 배우들을 좀 더 찾아볼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김태윤 감독 :
만약 투자가 되는 배우가 됐다고 하자. 그럴 경우엔 이런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투자사에서 제안이 오기도 했다. 그래서 '위에서 개봉하지 말라고 하면, 막아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사실 그게 되게 무서웠다.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를 더 지킬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Q. 그 문제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정말 그러면 더 큰 상처겠다.김태윤 감독 :
흥행을 떠나 온전히 우리 영화로 내세울 수 있는데 다 만들고 났는데 만약 영화 상영을 못 하게 되면…그 상처가 더 크다.
Q. 영화를 보면서 약간 엉뚱한 생각을 했는데, 김규리 씨가 딸 역할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이슈도 많이 됐을 텐데. (웃음)김태윤 감독 :
딸 역할은 처음부터 신인이 하길 원했다. 신인이 아닌 누군가가 머리를 깎고, 그 연기를 하면 감정이입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신인 배우를 원했다.
Q. 딸 한윤미 역의 박희정이나 아들 한윤석 역의 유세형은 완전 신인이다. 이들에게 중점적으로 말한 부분은 무엇인가.김태윤 감독 :
계속 만나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연기라는 게 연출이 관여한다더라도 고유의 영역이 있다. 그리고 디테일한 움직임까지 연출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 충분히 이해되면, 그 감정대로 연기하면 된다는 주의다. 그러기 위해서는 리딩을 많이 해야만 한다. 박희정 배우는 원래 딸 역을 맡았던 배우가 촬영 앞두고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가장 뒤늦게 합류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해줬다. 뭔가 날 것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잘한 것 같다.
Q. 원래 제목이 삼성전자 캠페인 문구와 같은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지금 제목도 잘 어울리지만, 어찌 됐든 제목을 바꾼 건 뭔가 자기 검열의 하나로 보인다.김태윤 감독 :
마케팅 과정에서 시사회 모니터링을 하는데 제목만 봤을 때 삼성 고발영화로 인식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다. 근데 사실 이 영화는 그런 관객들을 만족하게 하기엔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런 선입견이 많아서 제목을 변경하게 된 거다.
Q. 또 영화를 보면서 너무 착한 영화란 생각이 들었다.김태윤 감독 :
남자 분들이 그런 질문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사실 악함을 만들려면 물리력이 들어가는 게 쉽다. 고문하고, 때리고. 또 절대 악이 나와야 한다. 근데 실제 황상기 아버님은 그런 일이 없었다. 그건 상상해서 써야 하는 거다. 그러면 김용철 변호사와 같은 내부 고발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게 편하다. 그런데 이건 그렇게 만들기 어려운 영화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시점인데 이 영화는 아버지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 영화는 팩트가 아니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Q. 무엇보다 외적인 시선을 떠나 영화 속 이야기가 현재 진행형이란 사실이다. 때문에 황상기 아버님을 비롯해 다른 유가족들의 진의가 행여 다르게 비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했을 것 같다.김태윤 감독 :
많이 했다. 시나리오 쓰는데 공을 많이 들였다.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남의 슬픔 가지고 장사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다 보니 연출도 조심스럽게 하게 되고, 담백하게 담으려고 했다. 그래서 첫 번째 관객은 황상기 아버님이나 노무사님을 비롯해 유가족분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지난해 부산영화제에 오셔서 보셨는데 좋아해 주셔서 다행이었다. 첫 번째 목적은 달성한 것 같아 안심했다.
Q. 근데 다른 유가족은 많이 다뤄지지 않는데.김태윤 감독 :
그 아쉬움이 있다. 다른 유가족들의 이야기가 많이 빠졌다. 시나리오상에서 많이 덜어냈고, 영화 찍고 나서도 두 장면 정도 들어냈다. 등장인물이 많아질수록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픔은 한상구 캐릭터가 쥐고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더라.
Q.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였나.김태윤 감독 :
역시 돈 문제가 가장 힘들었다. 아무래도 예산 압박이 심하니까 뭘 하려고 해도 거의 다 안 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리고 다른 영화의 절반 수준인 27회차로 찍었는데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빨리빨리 찍어야 하니까. 연출자로서는 그런 게 힘들었다. 그리고 개봉, 지금 이 순간. (웃음).
Q. 그래도 어찌 됐던 여러 난관을 이겨내고 영화를 완성했고, 개봉까지 하게 됐다. 뭔가 분명 다른 기분일 것 같다.김태윤 감독 :
정말 좋다. 다음 주에 개봉관만 열리면 더 행복할 것 같다.
Q. 이 영화가 의미 있는 흥행을 만들어 낸다면 일정 부분 사회적 영향도 미칠 것 같다.김태윤 감독 :
그걸 판단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만, 노동환경 개선에 대한 기본적인 재고, 산업재해에 대한 재고 등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비단 삼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문제다. 국민들을 위해 만든 보험인데 주변에서 산재 보험을 받았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Q. 이번 영화를 하고 나서 뭔가 개인적으로 큰 변화를 준 것 같다. 앞으로의 영화 인생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김태윤 감독 :
장르의 달인이 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나보다 잘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또 나이가 좀 들다 보니까 장르 영화를 만드는 게 점점 재미없다. 충무로에서, 소위 상업영화 아이템을 받아서 시나리오를 써서 먹고 살았는데 이 시스템에 스스로 지친 것 같다. 창작자로서 위기감도 있었다. 이렇게 하다가 언젠가 퇴출당해 없어지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내가 좋아하고, 진심으로 할 수 있고, 좋아서 쓸 수 있는 시나리오를, 영화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황상기 아버님을 만나면서 그게 더 커졌다. 감독이란 게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감독이 되는 것 같다.
글. 황성운 jabongdo@tenasia.co.kr사진제공. 영화사 도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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