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베'는 디즈니와 통했을까

입력 2014. 1. 31. 14:41 수정 2014. 1. 3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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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최한욱 기자]

< 겨울왕국 > 은 1월16일 개봉했다

ⓒ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주)

만화영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디즈니다. 디즈니는 만화영화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어린이들이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면서 성장한다. 미키마우스와 도널드 덕은 (적어도 뽀로로가 등장하기까지) 모든 어린이들의 친구였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서 디즈니의 명성은 예전 같지 않았다. 디즈니는 만화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극영화(2000년대 디즈니의 흥행을 주도한 < 캐러비안의 해적 > , < 트랜스포머 > ,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등은 대부분 실사영화였다)로 두각을 나타냈다.

젊고 혁신적이며 자유분방한 픽사와 드림웍스의 등장은 반세기동안 동심의 세계를 지배했던 디즈니왕국을 위협했다. 아이폰만큼 혁신적인 기술로 무장한 스티브 잡스의 새로운 만화영화들은 디지털시대의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픽사와 드림웍스는 기술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혁신적이었다. 디즈니의 보수주의를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 쉬렉 > 의 삐딱한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 좀더 성숙한 관객들까지 극장으로 불러냈다. 지각 있는 부모들은 더 이상 아이들에게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질적으로 더 뛰어나고 정신건강에도 더 유익한 대체상품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혁신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픽사와 드림웍스의 파상공세를 견뎌내기에 디즈니왕국은 너무 낡아 버렸다. 결국 적은 동지보다 더 가까이 하라는 정치격언대로 디즈니는 픽사를 인수해 버렸다. 2006년 스티브 잡스는 74억 달러에 픽사를 양도했다. 디즈니와 픽사,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됐다.

디즈니와 픽사, < 겨울왕국 > 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다

디즈니의 픽사 인수는 일단 성공적이었다. < 라따뚜이 > , < 월-E > , < 업 > , < 토이스토리3 >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디즈니 왕국은 명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픽사의 자장 안에 있었다. 픽사의 작품에 디즈니의 상표만 바꿔 단 셈이다. 디즈니가 자체 제작한 < 주먹왕 랄프 > , < 비행기 > 등은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픽사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최근 픽사의 간판스타인 < 카2 > , < 몬스터대학교 > 가 기대에 못 미치면서 디즈니와 픽사의 결합은 위기를 맞는 듯 했다.

< 라푼젤 > 과 < 메리다와 마법의 숲 > 은 일종의 과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디즈니와 픽사는 두 작품을 통해 이질적인 두 세계의 접점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디즈니의 고전적(혹은 보수적) 이야기와 캐릭터를 픽사의 혁신적 기술과 기계적으로 결합시킨 안일한 시도는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 겨울왕국 > 에서 디즈니와 픽사는 화학적 융합의 공식을 찾아냈다. 그것은 디즈니의 고전적 이야기와 캐릭터를 픽사의 신기술과 자유주의적 색채로 현대화하는 것이었다. 디즈니의 보수주의는 픽사의 자유주의와 융합되어 과거 디즈니 영화들과는 다른 비교적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와 캐릭터가 창조됐다.

< 겨울왕국 > 에서 공주는 백마 탄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지 않으며 더 이상 키스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엘사와 안나는 디즈니왕국에서 볼 수 없었던 자립적인 여성들이며 그녀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리고 디즈니세계의 영원한 주제인 '진정한 사랑'은 단지 이성애를 의미하지 않는다. < 겨울 왕국 > 은 월트 디즈니가 살아 있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온한(?) 세계가 되어 버렸다.

자유주의자로 전향한 디즈니의 고전적 캐릭터들은 픽사의 혁신적 기술로 활력을 되찾았다. 픽사의 최신기술로 재건축된 디즈니왕국은 관객들을 매혹적인 동화의 세계로 인도한다. < 겨울왕국 > 의 눈과 얼음의 이미지들은 < 그래비티 > 의 무중력공간 만큼 황홀한 시각적 체험을 선사한다.

디즈니의 장기인 뮤지컬은 픽사의 화려한 무대의상과 장치로 날개를 달았다. 엘사가 자신이 창조한 얼음궁전에서 < 내버려 둬 > (Let it go)를 부르며 디즈니왕국의 순종적인 공주에서 치명적인 여성(femme fatale)으로 다시 태어나는 장면은 마치 디(즈니)-픽(사)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화려한 축하무대와도 같다.

자신이 창조한 얼음궁전에서 엘사는 치명적인 여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주)

< 겨울왕국 > 은 대단히 혁신적인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디즈니와 픽사의 장점이 절묘한 지점에서 융합되어 또 다른 차원의 영화적 세계를 보여준다. < 인어공주 > 가 90년대 디즈니전성기의 포문을 얼었던 것처럼 < 겨울왕국 > 은 '왕의 귀환'을 알리는 화려한 서곡이 될 것이다. 엘사의 마법만큼 치명적인 픽사의 마법으로 디즈니왕국에는 한동안 뜨거운 여름이 지속될 듯 한다.

왜 일베는 디즈니와 통했을까?

최근 '일간베스트 저장소'의 한 누리꾼이 < 겨울왕국 > 의 주인공 엘사와 박근혜 대통령이 닮았다는 글을 올려 주목을 끌었다. 그는 < 겨울왕국의 여왕 엘사는 박근혜 대통령과 너무 닮았다 > 는 글에서 "이 에니('애니'의 오타인 듯)를 보면 노무노무(일베식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는 점을 양해 바란다) 레이디 가카(박근혜) 생각이 난다. 공주로 태어난 엘사는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늘 착한 아이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가르침을 받는다'가 맞다). 이는 원조 가카(박정희)의 엄한 가르침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엘사의 어머니 아버지는 자식들만 남겨놓은 체(오타다.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역시 같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쫓겨나고 세상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건 뭐 레이디 가카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동생과 그의 남친은 온갖 역경 속에 엘자('엘사'다)를 찾아가 돌아갈 것을 권한다. 레이디 가카의 정계 입문을 의미한다"는 기상천외한 해석을 덧붙였다.

그는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엘자('엘사'라니까!)마저 사라져버리니 세상은 온통 얼어붙는다. 이는 좌빨들이 점령한 세상을 의미한다. 레이디 가카는 그저 원칙을 지켰을 뿐인데, 왜 종북좌빨들이 비명들을 지르는 거노?"라고 통탄하며 글을 마무리했다. 이 글은 '애국보수의 아이콘'이라는 변희재씨도 트위터로 인용할 만큼 일베의 세계에서는 화제가 되었다.

물론 디즈니는 '레이디 가카'를 염두에 두고 < 겨울왕국 > 을 제작하지 않았다. 엘사에게 '레이디 가카'의 향기를 느끼는 것은 지구상에 오직 일베인들 뿐이다. < 겨울왕국 > 의 '레이디 가카'는 일베인들의 지독한 이념편향과 가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빚어낸 정치적 환각일 뿐이다.

월트 디즈니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극우보수주의자였다

ⓒ 위키디피아

하지만 일베인들이 디즈니와 통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디즈니왕국은 할리우드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기 때문이다. 월트 디즈니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극우보수주의자였다. 그는 한마디로 '할리우드의 일베'라고 할 수 있다. 월트 디즈니는 훗날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매카시의 마녀사냥에 앞장서서 동료 영화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탄압하는데 일조했다.

그는 < 백설공주 > , < 밤비 > 를 함께 만들었던 데이비드 힐버먼을 비롯해 디즈니 직원들에게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여 내쫓았다. 디즈니는 "만화영화노조는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이 내 스튜디오를 접수하려 했다"는 근거 없는 선동으로 노동조합을 파괴했다. 그는 심지어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월트 디즈니의 극우성향은 디즈니왕국의 이데올로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디즈니의 만화영화들이 남성우월주의와 반여성주의, 인종주의와 기독교적 가족주의, 극단적인 이분법적 세계관과 지배계급과 제국주의에 대한 찬양 등 보수적 가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89년 < 인어공주 > 로부터 시작해 1994년 < 라이언 킹 > 에서 정점을 맞은 디즈니의 제2전성기도 신자유주의의 전성기와 궤를 같이한다.

< 겨울왕국 > 은 자유주의적 색채로 윤색되었지만 여전히 디즈니의 보수적인 세계관을 기본골격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엘사와 '레이디 가카'를 혼돈하는 일베인들의 착시현상을 '정신승리'이라고 비웃을 수만은 없다. < 겨울왕국 > 에는 여전히 월트 디즈니의 푸른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베인들이 디즈니의 전향을 눈치 채 못한 것은 안타깝다. 그들이 < 변호인 > 의 치유제(?)로 < 겨울왕국 > 을 선택한 것은 탁월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디즈니 스튜디오는 이미 픽사의 자유주의자들이 절반을 '접수'했기 때문이다. 이제 디즈니도 보수주의를 대표하지 않는다.

영화는 대중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대중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오직 대중이 공감하는 영화만이 살아남기 때문이다. 디즈니의 정치적 혹은 예술적 전향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더 이상 대중은 이념적 편견으로 가득 찬 낡고 고루한 디즈니왕국을 원하지 않는다. 한국의 보수세력들도 대중과 교감하고 싶다면 디즈니의 전향을 진지하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 < 나홀로연구소 > http://blog.naver.com/silchun615에 중복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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