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119> 적 심장부에 던진 폭탄, 이봉창 의거

손용석기자 2014. 1. 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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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경시청 앞.

군중에 섞여있던 한 사내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더니 주머니에 감추고 있던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표적은 두 번째 마차였다. 사내의 손을 떠난 수류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사쿠라다문 궁성을 지나는 행렬을 향했다. "쾅"하는 폭발음과 함께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말 두 필과 함께 근위병들이 나뒹굴었고 부서진 마차에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이치키 구토쿠로 일본 궁내성 대신이었다.

'아뿔싸…' 목표물을 오인한 것이었다. 사내는 주저 없이 선두에 선 마차를 향해 또 하나의 수류탄을 집어 던졌다. 하지만 불발탄이었다. 거사 성공 후 자살용으로 사용하려던 폭탄마저 연기 속에 사그라지자 사내는 분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그 사람의 이름은 '기노시타'라는 일본 이름을 가졌던 32세의 한국 청년 이봉창 의사였다.

일제 강점기, 백범 김구선생이 조직한 '한인애국단'제1호였던 이봉창이 히로히토 일왕을 폭살할 목적으로 적의 심장부인 도쿄로 잠입해 의거를 일으켰으나, 정보부족과 무기부실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이다.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난 이봉창은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인 주인이 운영하는 과자점 점원과 기차운전을 하며 굴욕적인 모멸과 차별대우를 받았다. 1925년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오사카로 건너갔지만, 그곳 역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심했다.

그의 일생을 바꾼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28년 히로히토 일왕의 즉위식 당시에 발생했다. 교토에서 열린 즉위식을 구경하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은 이봉창은 한글로 쓰인 편지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체포돼 9일을 유치장에서 지내야 했다. 처음으로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 그는 31년, 떳떳한 조선인으로 살기 위해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백범과 마주했다.

"제 나이 31세입니다. 인생 쾌락을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백범과 의기투합한 이봉창은 히로히토 일왕 폭살을 목표로 삼고 꼬박 1년의 거사 준비기간을 가졌다. 그 해 12월 13일 백범이 준비한 두 개의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 아래서 기념촬영을 마친 그의 얼굴은 확신과 결기가 가득했다.

마침내 1932년 1월 8일, 신년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해 수류탄을 던졌지만,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봉창의 도쿄 의거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일본 내각은 총 사퇴했고 중국 신문들은 사건을 대서특필할 정도였다. 특히 이 의사의 의거는 3개월 후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로 이어지는 항일투쟁의 도화선이 됐다. 경찰에 체포된 이봉창은 그 해 10월 10일 사형 집행을 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광복 후 김구선생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했고 62년 정부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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